신동학 충북문화원연합회 사무처장

신동학 충북문화원연합회 사무처장

[동양일보]영화를 1974년에 처음 보았다. 고등학교 들어가던 해다. 원주에 있던 ‘군인극장’이었다. 그 때까지 내가 살던 곳은 1975년에야 전기가 들어온 아주 외진 시골 마을이다. 당연히 텔레비전도 없었고 드라마나 영화를 접할 기회도 없었다. 몇 년에 한 번꼴로 10리(약 4㎞)는 떨어진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둘러친 가설극장이 들어오긴 했으나 그 가설극장조차 가보지 못했었다.

내가 처음 본 그 영화는 ‘007 죽느냐 사느냐’였다. 영화가 끝나고도 금방 일어서지 못했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세계에 대한 놀라움과 신기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며칠 동안 장면 장면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나중에야 007이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리 위험에 처해있어도 큰 걱정 없이 보았지만, 그때는 손에 땀이 나고, 가슴이 벌렁거리며 숨이 막힐 것같이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하다. 영화는 그렇게 내 인생 속으로 들어왔다.

당시 학교에서는 토요일 격주로 영화 관람을 허용했다. 소풍이나 학교에서 큰 행사를 치른 날이면 상영날짜와 관계없이 특별히 영화관람을 허용하기도 했다. 대부분이 군인극장 아니면 ‘시공관’이란 극장이었는데, 1학년 때 관람료가 40원이었으니 당시의 물가 수준을 감안해도 거의 무료 수준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극장은 언제나 군인들과 학생들로 북적였다. 이소룡과 왕우(王羽)의 홍콩 영화부터 액션과 스릴러, 고전과 종교, 서부극, 코믹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스티브 맥퀸의 빠삐용, 알랭 들롱의 ‘암흑가의 두 사람’, 로버트 레드포드의 ‘스팅’ 등등은 아직도 어제 본 것처럼 영화 내용이 생생하다. 영자의 전성시대, 홍콩영화 소녀(召女) 같은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는 같이 하숙하는 군인 형 군복을 빌려 입고 마음 졸이며 보기도 했다.

당시는 통기타와 청바지 그리고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춘 문화가 한창인 시기였다. 하숙방을 같이 쓰는 친구는 통기타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가르치려고 했지만 난 영화에만 몰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입학 전 직장 다닐 때 휴일에는 의례 서울의 개봉관을 순례했다. 개봉관에서 놓친 영화는 변두리의 재개봉관을 찾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 후 직장에 들어가서도 영화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웬만한 영화는 감독, 배우는 물론 주제가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고, 나름 영화의 고수로 인정받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영화에 흥미를 잃었다. 상황과 무관하게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상스럽고 저열한 욕설과 폭력으로 범벅이 된 우리 영화가 쏟아져 나오면서 부터다. 아무리 영화가 시대를 반영한다고는 하지만 영화가 품격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과는 달리 관객을 불러 모으는 데 성공하는 것을 보며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닌지 곱씹어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며 옛 영화에 대한 즐거운 추억도 점차 흐려져 갔다. 내 인생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던 영화는 그렇게 밀려나고 있었다.

코로나와 선거가 007 죽느냐 사느냐를 불러냈다.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한쪽에서는 살리기 위해, 다른 쪽에서는 죽이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다. 영화가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긴 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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