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들의 호국정신이 강하게 표출된 유일한 석탑

①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위치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 전경. ②구층석탑 내부의 불상 머리 위에 조각된 연꽃. ③석탑에 조각된 사자와 불상. ④사사자 구층석탑에 있던 건탑연기문의 3D 스캔본.
①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위치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 전경. ②구층석탑 내부의 불상 머리 위에 조각된 연꽃. ③석탑에 조각된 사자와 불상. ④사사자 구층석탑에 있던 건탑연기문의 3D 스캔본.

 

[동양일보]
-상층기단부에 4마리 사자가 탑신부 받들어
-하층기단면석 명문…탑의 조성시기 목적 ‘또렷’
-불타의 원력으로 적 소멸시키려던 염원 담



탑파의 조형은 인도에서 발원하여 동양 삼국으로 전래되었는데 원래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성스러운 장소를 기념하여 세워지는 고층의건축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후 삼국에서 모두 목탑을 세웠으나 6세기 후반부터 각지에서 석탑건축이 크게 유행하면서 가람배치의 중심건축물이 되었다. 탑파는 재료에 따라 목탑과 석탑, 금동탑, 청동탑, 전탑, 모전석탑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되며 우리나라에서 크게 성행한 석탑은, 양식적으로 일반형의 석탑과 특수형의 석탑으로 구분되어 진다.

쉽게 말하면 석가탑으로 일컬어지는 불국사의 삼층석탑은 일반형석탑이며 이와 대칭해 있는 다보탑은 특수형의 석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002번지 월악산에는 아주 특이한 고려시대 석탑이 위치한다. 월악산은 신라~고려까지는 월형산으로 불렸으며 신라가 국가차원에서 경영하였던 제의처(祭儀處)인 월악소사(月岳小祀)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월악대신(月岳大神)의 신력으로 몽골군을 크게 물리쳤다는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되었다. 우리나라의 여러 산중에서도 영봉(靈峯)으로 지칭되고 있는 곳은 백두산 영봉과 월악산 영봉 일 정도로 월악산은 오랫동안 신령한 산으로 알려져 왔다. 이곳 월악산록에 위치한 사자빈신사지석탑은 원래는 9층으로 조성되었으나 지금은 4층까지만 남아있다. 이 탑의 특징은 상층기단부에 4마리의 사자가 탑신부를 머리로 받들고 있는 점이다. 이렇게 석탑에 사자가 배치된 예는 국내에 총 4기가 현존하는데 지리산 화엄사에 있는 4사자삼층석탑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이곳 제천의 사자빈신사지석탑은 그의 모방작이라고 할 수 있다.

강원도 홍천읍 사무소 앞에도 사자 탑 1기가 있는데 원래는 홍천초등학교 뒤편의 괘석리 사지에 있던 것을 이건하였고,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중학교 교정에 위치한 사자탑은 인근의 주리사지에서 옮겨진 것이다. 홍천 괘석리 석탑과 함안 주리사지 석탑은 일찍이 원위치를 떠나 이건 되었으므로 원래 지녔던 문화재적 가치는 반감되었다고 하겠다.

빈신사지석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하층기단면석에 10행 79자의 명문이 있어서 탑의 조성시기와 건탑 목적을 또렷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명문을 통해 태평 2년 4월(1022년 현종 13)에 탑을 조성했음을 알 수 있어 우리나라 석탑연구와 미술사연구에서 절대편년을 가름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석탑이라고 하겠다. 또한 6행 상단에서 보이는 “영소원적”(永消怨敵)이라는 문구는 “영원히 원한의 적을 소멸하고자” 하는 기원을 담고 있는데 이때에 소멸시키고자 했던 숙적은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을 말한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거란이 우리민족이 세운 발해를 멸망시켰다는 반감에 의해 거란을 배척하고 친송(親宋)정책을 취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거란은 성종 12년인 993년에 1차 침입을 하였으나 뛰어난 외교가인 서희의 담판으로 여진족이 점령하고 있던 강동6주를 고려에 반환하고 철수하였다. 이후 거란은 7대 왕 목종의 폐위를 문제 삼아 정변의 주역인 강조의 죄를 문책한다는 구실로 재침입하여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하는 등 최악의 국면과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거란은 현종의 거란입조 약속 불이행을 핑계 삼아 3차로 침입하였는데 우리나라 3대첩의 하나인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에게 참패를 당한다. 귀주대첩의 명장 강감찬장군의 묘가 의외로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위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3년에 망실되었던 묘소를 후손들이 수소문 끝에 찾았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그 진위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확인도 시급한 문제이다.

<한국지명총람>과 <제천시지>에는 제천시 봉양면 공전리에 글안장 또는 거란장이라는 지명이 유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제천 의병전시관인 자영영당의 맞은 편 전답일대가 되는데, 글안장은 거란의 포로나 귀화한 자들을 수용하고 전답을 주어 살게 하여 생긴 지명이니 제천지역과 박달재는 거란과 몽골의 침입 때 마다 전장 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한편 지금의 현충일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을 추모하면서 시작된 망종에서 유래가 되었으니 의병의 도시 제천은 근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호국정신의 토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빈신사지석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를 위한 것 이라기보다는 불타의 원력으로 적을 소멸시키고자했던 고려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국가발원의 석탑이자 내면에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하게 담겨진 석탑이라고 하겠다.

석탑의 형태를 간단히 살펴보면 하층 기단은 3단으로 구성되는데 그 형태가 방형의 불상대좌와 흡사하다. 하대석의 각 면에서 3구씩 구름문양의 안상을 조각하고, 안상의 내부에도 화형문양을 표현하였다. 앞서 서술한대로 상층 기단부는 중앙의 불상을 중심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각 모서리에 배치되어 있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대의를 걸치고 있으며 지권인을 결하고 앉아있는데, 일반적인 불상과는 달리 두건과 같은 피건을 쓰고 있어 나한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불상의 존명에 대해서는 지권인을 결하고 있어 비로자나불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피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지장보살로 파악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화엄삼매의 경지를 일컫는 ‘사자빈신사’라는 사찰의 명칭을 볼 때, 이 불상은 화엄의 법신인 비로자나불로 이해하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석탑의 상대갑석의 윗면에는 16엽의 큼직한 연화문을 조식한 받침을 만들어 초층탑신을 받치고 있어 탑의 품격을 한층 더 높이고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의 석재로 조성되었다. 상륜부는 결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탑파의 내부에서 사리장엄장치와 더불어 발원자등의 연원을 기록한 탑지(塔誌)등이 종종 발견되곤 한다. 지난 호에 게재했던 법주사 팔상전의 탑지나 익산 미륵사지석탑 해체 시 심초석 아래의 사리공에서 발견된 탑지를 통해 그 탑들이 언제?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건립하였는가 하는 역사적인 의문점들이 일시에 해소되기도 한다. 하지만 빈신사지의 석탑은 기단면석에 탑지와 동일한 성격의 건탑연기문 79자를 각인하였는데 이는 탑 내부에 안치되는 탑지와는 달리 탑을 세운 목적과 염원을 누구라도 읽을 수 있게 한 선조들의 지혜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예는 다른 석탑에서는 찾을 수 없으므로 사자빈신사지 석탑은 한국의 석탑발달사와 미술사연구에 가장 중요한 석탑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원장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