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욱 서원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오봉욱 서원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동양일보]1995년 대학 면접을 다녀오는 길에 눈앞에 보이는 ‘헌혈버스’는 내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기회를 부여해주었다. 무엇인가 선한 활동에 참여하면 꼭 오늘 면접을 치룬 대학에 합격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물론 대학 입시는 불합격. 그러나 헌혈버스 안에서 경험한 ‘첫 헌혈’은 나에게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데 동참 했다는 기쁨과 자부심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고 헌혈 후 음료수와 빵 그리고 선물은 내게 ‘행복 plus’로 감동을 주었다. 그만큼 나는 단순했다.

이후 군 입대 후 본격적으로 헌혈에 동참하면서 군복무 혹은 휴가 중에도 헌혈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면 주저 없이 헌혈에 참여하면서 생명나눔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 계신 어머니께서는 헌혈에 참여하는 내 모습이 걱정이 되었는지 핀잔을 주었다. “맛난 음식 해주면서 키웠더니 피 뽑고 다닌다고”

군 제대 후에도 내 헌혈에 대한 열정은 이어졌다. 농촌복지에 대한 관심으로 충북 괴산에서 활동하면서도 헌혈은 지속됐고 30회 참여로 헌혈 유공장 은장을 수상하게 되었다. 직업 군인이었던 아버지께서 받은 훈장처럼 나도 헌혈에 동참하여 수여 받은 훈장이라 그런지 자랑스러웠고 당당히 부모에게 보여드렸다. 여전히 어머니의 눈빛은 사랑스럽지는 않았다.

한때 헌혈 30회 이상이면 대한적십자사 직원 채용 시 우대가 되는 시기가 있었다. 내 이력서를 작성할 때 수상 관련 부문에 헌혈 관련하여 수여 받은 상을 작성하면 그 어떤 것보다 자랑스러웠다. 그러다 3년 뒤 50회 헌혈 참여로 헌혈 유공장 금장을 수상했다. 간호사였던 아내 역시 나와 함께 헌혈에 동참해 제주도 신혼여행의 커플티는 ‘헌혈 기념 티셔츠’로 대체했다. 나뿐만 아니라 아내 또한 헌혈 참여 열정이 넘쳐났다. 아내는 헌혈에 참여하면서 같은 직종에 근무하는 간호인들도 배려해야 한다고 했다. 나의 팔에 바늘을 찌르는 간호사가 긴장하지 않도록 여유있는 모습과 혹시 바늘을 잘못 찌르는 실수를 했더라도 아프지 않은 척해야 한다고 설명해주었다.

2016년 9월 헌혈 100회에 참여하면서 헌혈 유공장 명예장을 수상하면서 잠시 나를 위해 ‘헌혈 휴식기간’을 가졌다. 이후 한동안 직장 일로 헌혈 참여가 쉽지 않다가 최근 코로나 19의 장기화로 인해 헌혈 수급에 어려움이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올해 4월 헌혈의 집에 방문하여 통산 109번째 헌혈을 했다. 헌혈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인지 헌혈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 역시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여러분의 헌혈 동참이 누군가의 생명이 아닌 나의 가족을 살릴 수 있음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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