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진 음성 동성초등학교 교사

박효진 음성 동성초 교사

[동양일보]교실에서 아이들과 글쓰기를 하다 보면 슈퍼맨 같은 영웅의 이야기가 곧잘 등장한다. 괴물이나 적이 나타나고, 주인공에 해당하는 인물이 나타나 위험을 무릅쓰고 싸운다. 뭔가 필살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서 싸우는 족족 승리한다.

이런 스타일의 영웅 이야기는 비단 아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 같다. 헐리우드에서 제작한 어벤져스 시리즈나 스타워즈 시리즈의 관객을 보며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관람석 앞 길게 늘어진 줄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로 보이는 성인도 있지만, 어린이를 동반하지 않은 어른도 꽤 눈에 띈다. 알고 보면 이미 전편 모두를 섭렵한 매니아 층이 다수다. 어찌 보면 뻔한 전개와 정해진 결말이 예측됨에도 기꺼이 푯값을 지불한다.

최첨단 기술이 망라한 화려한 볼거리를 감상하기 위하여 극장을 찾은 관람객과 함께 특출난 영웅의 활약을 보며 통쾌함을 느끼기 위해 극장을 찾는 사람도 적지 않다. 군계일학 주인공의 도전이 매번 실패로 끝나고 급기야 지구의 멸망으로 인류가 사라지는 결말이 계속되었다면, 그 많은 영웅 시리즈가 성공할 수 있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헐리우드식 영웅 이야기와 조금 다른 방식의 영화가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다. ‘괴물’은 그 자체가 무섭기보다는 현실적인 시공간에서 오는 두려움이 크다. '괴물'에는 절대적 힘을 가진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괴물과 싸우는 이들은 평범한 소시민, 우리의 이웃, 우리의 가족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를 ‘한국형 블록버스터’, ‘한국형 괴물영화’라 불렸다.

그런데 이 영화가 요즘 우리와 꽤 닮았다. 어느 날, 한강에서 괴생물체가 나타난 것처럼, 우리에게 너무 갑자기 치명적인 ‘괴물’ 코로나가 나타났다.

난데없이 괴생물체가 출현했을 때 우리는 헐리우드 영화가 그러했듯 한 사람의 영웅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강력한 영웅이 나타나 일상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를 단번에 없애주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가 고대하던 영웅은 특출난 누군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극한의 공포를 이겨내고 의료현장에 투입된 의사와 간호사, 검역과 방역 일선에 있는 공무원, 현관문을 열고 나가고 싶은 욕구를 꾸역꾸역 참아내며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사람들,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으로 철저한 개인위생을 무기 삼아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 누구도 자신을 영웅이라 치켜세우지 않지만 우리는 모두 서로의 위대함을 알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국가적 아니 이제는 전 세계적인 위기가 되어버린 바이러스는 극복될 것이다. 오늘의 어려움이 역사의 한 자락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성숙한 시민의 영웅담이 기억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진정한 현실 속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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