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이충호 박사
이충호 박사

 

[동양일보]●민족교육을 뒷받침하는 힘

민족교육의 발족은 재일조선인의 희망이 실현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재일조선인은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자기들의 힘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그것은 ‘조련’계의 학교나 ‘민단’계의 학교 모두 인민의 차원에서는 같았을 것이다.

일본이 패전 후의 사회에서 재일조선인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1940년과 1952년의 직업별 인구를 비교해 보면, 첫째 실업·반(半)실업이 격증하여 직업 인구의 52%를 점하고, 둘째 광공업·토목업에 종사하는 자가 많았던 것에 비하여 상업·음식업 종사자의 비율이 늘어나는 직업 구성상의 변화를 보였다. 셋째 전후 일용노동자가 점점 늘어나는 상태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생활을 꾸려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후에는 식량을 산지에서 사다가 팔기도 하고 그것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다음에는 ‘담배 말기’, ‘탁주 빚기’, ‘돼지 치기’를 했다.

다시 이러한 일에 탄압이 가해지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고철 줍기’라는 식으로 하루 벌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생활을 한 당시의 재일조선인의 직업에 대한 이미지는 현재도 일본인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다.

재일조선인이 이처럼 극도로 궁핍한 환경 속에서 새로운 교육을 창조하였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교육을 생활 향상이나 출세의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들을 조선인으로 변화시키는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교육을 생활의 문제로서보다 존재와 관련된 문제가 되었다. 앞서 인용한 ‘교육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소책자는 ‘공공직업안정소 인부로 일하고 있는 한 학부모의 발언’을 다음에 소개해 본다.



나는 직업안정소의 인부로 일하고 있으므로 오늘 이 회의에 출석하게 되면 하루 치 생활비를 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내게 하루의 생활비보다도 아이들의 조선인으로서의 교육을 받는 쪽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출석하였다.



이 책자에 이어서 재일조선인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근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과거 일본어를 모르는 할머니와 조선어 사용을 수치스러운 일로 교육받은 손녀딸 사이에 한 핏줄로서의 애정조차 상실된 사실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조선어로 조선인으로서 교육받는다는 것은 인도적인 문제이고, 인간적인 애정에 관한 문제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민족적인 존재, 따라서 인간적 존재의 근저와의 관련 속에서 교육을 구하였기 때문에 산적한 난관을 극복하며, 교육을 창조하는 열기가 생겨났다.

무엇보다 어른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추운 밤, 바람은 씽씽 불고 텅 빈 교실에 20명 남짓한 중년의 조선인이 모여, 조선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마치 싸움이나 하는 것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것이 복도에서 들렸다. 창 쪽에 서서 잠시 들어보니 대강 이러했다.

40여 명의 아동을 교육하는데, 나이 차이, 학력 차이, 이해정도의 차이로 인해 2개 교실에서 교육한다고 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 두 명의 봉급조차 만족스럽게 지급할 수 없는 형편에 교실을 나누고 교원을 늘려 학급을 세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차라리 아동 40명과 교사 2명, 책상, 의자, 칠판, 오르간을 전부 후카가와(深川) 학교로 갖고 가자는 말이 나왔다. 흥분한 학부모 중의 한 명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먼 곳까지 7~8명의 아동을 통학시킬 수가 있는가, 이처럼 추울 때 아침에 해안을 지나 걸어가면 어른도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이다. 차로 통학시킬 수 있을 정도라면 차비를 모아 선생을 한 명 더 늘이자….



이러한 논의를 주고받는 마음속에는 전전의 차별 체험만이 아니라 일찍이 전후의 차별 체험이 뒤섞여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어머니는 그 기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큰딸을 일본학교에 넣었는데, 처음에는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금년 9월경 그 사실이 알려져 반 친구들로부터 마늘 냄새나는 조선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 눈물을 흘리고 학교에 가기 싫다며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10월에 조선 중학교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편입을 시켰다. 그 후부터 큰딸은 즐겁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기쁘기 짝이 없었다.



교사도 맨 밑바닥 생활을 인내하면서 청춘을 다 바쳐 헌신했다. 부모의 기부금으로 교사의 임금을 포함하여 학교의 재정 일체를 충당했으므로 조선인 학교의 재정은 어디에서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었지만, 특히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을 모집하고 있는 조선인학교의 경영은 비참했다. 교장은 가재를 팔아 죽을 먹으면서 교원봉급을 마련하고자 돼지를 치기도 하고, PTA(사친회) 회비 대장을 들고 모금을 하여 겨우 2백~3백엔의 돈을 거둬 야간 교원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이는 전차 삯도 안 되었다” 자신의 생활을 중시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른들과 교사가 가난과 어려움을 인내하고 계속 학교를 운영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여기에서 아이들의 민족적 재생이 준비되어 비로소 아이들의 생생한 성장을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여든 조선인 아이들은 선생님을 향해 이구동성으로 “다시 일본학교에 안 가도 되나요?”라고 물었다. 그리고 “가지 않아도 된다.”라는 대답을 듣고는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어떤 학생은 그때의 기쁨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처음 조선인학교 교문을 두드렸을 때, 교정에서는 나와 똑같은 연배의 소년들이 조선 말로 소리치면서 공던지기를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거리낌 없이 조선 말로 떠들면서 놀 수가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일본학교에 다닌 나로서는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



식민지 민족으로서 받는 착취에다가 전쟁에 의한 생활의 곤궁함이 겹쳤기 때문에 대부분 재일조선인은 빈곤에 허덕였다.



언젠가 너덜거리는 누더기를 걸친 아이 둘을 데리고 와서 무료로 조선 말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어머니도 있었다. 이윽고 추운 겨울이 닥쳤다. 이 두 아이는 너덜거리는 흰 셔츠에 볼기짝까지 내다보이는 바지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다. 차마 보다 못한 여선생님이 마침 그 자리에 있던 헝겊으로 간단한 옷을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정경도 민족교육 창설기에는 드물지 않았다.

재일조선인이 궁핍을 극복하고 민족교육 건설에 힘을 합친 이유는 ‘일본인’화 된 노예적 상황을 주체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스스로 조선인으로 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자기 아이들도 조선인으로 키워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역사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을 자주적으로 개시한 것은 지금까지 역사의 수난자에 지나지 않았던 재일조선인이 이번에는 역사의 창조자로서 주체적으로 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앞서 소개한 몇 가지 기록은 그 증언이기도 하다.



Ⅲ. 동화교육정책의 부활과 전개

1. 재일조선인 교육의 전후사와 그 구도



●재일조선인 교육의 구도

일본의 패전으로 재일조선인은 그들의 식민지 통치에서 광복이 되었다. 이것은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제국의 신민’에서 독립된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는 본래의 위치를 뒤 찾게 되고, 일본인 앞에서 외국인이라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이 역사적·정치적 변화를 인정하는 사상과 행동을 만들어 낼 것인지 그렇지 않을지가, 전후 일본의 재일조선인 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중심 문제가 되었다.

재일조선인은 조국의 독립을 지주로 삼고, 재일조선인의 조직화·권익 옹호 운동을 토대로 하여 자력으로 조선인학교를 만들고, 민족교육의 행로를 개척하였다.

그것은 전전(戰前) 동화교육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것이고, 또 민족교육의 성립은 전후(戰後) 일본의 교육에 새로운 상황을 전개하며,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여기에 반동적으로 대응했다. 정부의 동화주의적 자세는 자신들이 패전했음에도 변함없이 동화주의 방침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장해가 되는 조선인학교를 적대시하고 억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일본에서 전후에 생겨난 특징적인 정책 현상이었다.

이리하여 조선인학교의 억압과 동화교육의 전면화라는 두 개의 기둥이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일본 정부의 기본적인 정책구조가 되었다. 이 구조는 전후의 일본 정부가 자세를 재정비하고 재일조선인 교육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한 1948년 이래 지금까지 조금도 변경된 적이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정리하면, 전후의 재일조선인 교육의 동향은 실제로 민족교육을 만들어 내는 재일조선인의 노력, 즉 동화교육을 파괴하는 민족교육을 만들어 내는 재일조선인의 노력과, 이를 꺾고 동화교육을 꾀하는 정부 정책을 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정치 세계에서의 일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움직임 속에서 일본 국민은 어떠한 태도를 보였을까? 일본의 패배는 조선의 광복을 의미했다. 또 그것은 동화교육의 정치체계가 붕괴하고 조선인의 민족교육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했다.

재일조선인은 이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고, 바로 여기에 대응하는 행동을 취했다. 그러나 일본 국민 측은 여기에 무관심하기도 했고, 건방지다고 비난도 하면서 일본의 패전이 조선인들에게 갖는 의의나 재일조선인이 조선인으로서 살아가는 가치를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특히 패전 후 수년간, 즉 민족교육 창설기에 이러한 경향이 현저하였다. 조선 멸시 관을 핵으로 하는 아시아에 대한 우월 의식은 패전 후에도 여전히 구조적으로 변용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시적으로 잠재 화한 데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로부터 객관적인 사태의 변화를 포착할 눈을 빼앗아 버렸다. 이러한 역사 파악의 엇갈림이 재일조선인 교육문제를 일본 국민의 시야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동화교육을 보존함으로써 정부에 의한 조선인학교 억압→동화교육의 전면화를 허용하였다. 동시에 이는 민족교육을 지키는 재일조선인의 투쟁을 그만큼 고립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 후 재일조선인 교육을 둘러싼 이러한 구도 위에서 일본 국민 측에서도 민족교육의 의의를 이해하는 측이 늘어났고, 이를 두고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일본 국민의 정치적 수준에서의 조·일 연대의식의 성장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사회의식·교육의식이라는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비록 재일조선인이 조선인으로서 살아가는 가치와 의미를 보장하는 움직임이 서서히 힘을 얻어 가고 있다었고는 하지만, 총체적으로는 여전히 미약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재일조선인 교육을 둘러싼 정부의 억압과 재일조선인의 자력에 의한 권리 수호, 그 가운데 위치한 일본 국민의 무관심이라는 구도는 기본적으로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재일조선인 교육사의 시기 구분(1)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후 재일조선인 교육사에 하나씩 획을 그어 나간 주력은 일본 정부의 정책과 당사자가 전개하는 운동과의 모순이었다.

여기에서 편의상 그 구분을 각각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일본 정부의 재일조선인 교육정책은 그 정책 변화에 따라 세 시기로 나누어 구분할 수 있다. 이는 전후의 재일조선인 교육문제가 일본 국내의 문제임과 동시에 국제문제라고 하는 이중적 성격을 띤 데에서 온 것이다. 요컨대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교육역량의 고양과 그 기초에 있는 북한의 영향력 확대를 미·일·한의 국제관계의 변화에 응하면서, 그것과 균형을 맞추는 형태로 억압을 계속해 나갔다. 이렇게 하여 생긴 재일조선인 교육을 억압하는 방법상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시대 구분할 수 있다.



(1)미국 점령하에서 재일조선인 교육정책(1945~1952년):이 시기 재일조선인은 조련을 결성하여 민족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임을 강요하며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르는 교육을 계속하도록 강제하였다.

(2)‘강화’에서 ‘한일조약’ 성립까지의 시기(1952~1965년):‘강화조약’ 의 발효와 동시에 재일조선인에 대해 일본 정부는 그때까지 강요했던 일본 국적을 취소하고, 그 자녀의 취학의무를 폐지했다. 이것이 민족교육의 새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 중 하나가 없어졌음을 의미하지만, 재일조선인을 치안 문제로 취급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고, 이들에 대한 감시와 억압을 하고, 교육에 대해서도 음으로 양으로 간섭을 지속해 나갔다.

(3)‘한일조약’ 성립 이후의 시기(1965~1970):‘한일조약’에 기초한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의 책정을 토대로 하여 문부차관 통달을 내고, 조선인학교 규제와 동화교육 촉진을 기조로 하고 있었다. 특히 ‘외국인 학교법안’ 성립을 집요하게 시도함과 동시에, ‘출입국법’의 제정 때문에 민족교육의 기저부터 파괴하고자 노렸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