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택 전 제천교육장

최성택 전 제천교육장

[동양일보]엊그제가 ‘어린이날’ 이었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어린이’라는 말은 1920년대 들어 소파 방정환 선생이 정착 시키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방정환 선생은 1899년 서울 어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마치고 상업학교에 진학했으나 가난하여 중퇴하고 근근득생 1918년 보성전문(지금의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여 <청춘> 이라는 잡지에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1919년 3.1 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인쇄해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아동 예술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아동문학에 발을 들여놓았다. 당시에는 ‘어린이’ 라는 말이 없고 흔히 ‘이놈’ ‘어린것’ 하면서 아이들을 낮춰서 불렀다.

“어린이를 잘 자라게 하는 것이 독립운동이다. 하늘같은 어린이를 위해 평생을 바치리라” 고 생각한 방정환은 ‘어린이’ 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고 어린이에게 ‘존댓말 쓰기 운동’ 을 하였다. 또한 어린이들이 읽을 책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사랑의 선물>이라는 재미있는 외국 책을 번역하여 펴냈고 <어린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허지만 잡지가 팔리지 않자 직접 잡지를 들고 나가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 듣고 잡지를 받아 가라” 고 했다. 사람들은 이런 방정환을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비웃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기가 높아졌고 몇 달 뒤에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또한 어린이의 존엄성을 높이고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어린이 단체 ‘색동회’ 를 만들었으며 1922년 5월1일을 ‘어린이날’ 로 선포하고 첫 번째 기념식 뒤 200명의 소년들이 경성시내에 ‘장유유서에 찌든 옛 질서와 어린이 노동의 압박을 없애며 배우고 뛰놀 수 있는 권리를 주장’ 하는 선언문 12만장을 배포했다.

어린이날을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일요일로 날짜를 바꾸었다. 그런데 이 어린이날 행사가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지자 민족의식이 높아질 것을 염려한 일제는 1937년 어린이날 행사를 금지하였고 그보다 앞서 1934년에는 잡지<어린이>를 폐간 시켰다.

선생은 “무기를 만들고 싸우는 것만이 독립운동이 아니고 어린이를 올바르게 자라게 하는 것이 독립 운동이다.” 라는 신념으로 끊임없이 강연회와 동화대회 그리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어린이의 지위를 높이는 일에 전념하다가 과로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평생 어린이를 위해 살다간 방정환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57년 그의 호를 따서 ‘소파상’ 을 제정했다. 광복 후 1946년 잡지<어린이>가 재발행 되고 어린이날이 5월5일로 바뀌어 시행되었으며 1970년에는 어린이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후 지금은 정부와 지자체들이 나서 성대한 행사와 어려운 처지의 어린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런 행사와 업적 못지않게 소파 선생의 ‘어린이 예찬’ 을 다시 살펴보니 선생의 어린이 사랑과 깊은 뜻에 찬탄과 존경의 마음이 솟아오른다. 잠든 어린이를 보면서 예찬한다.



모든 고요를 모아가진 어린이의 자는 모습

평화라는 평화 중에서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모습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곱고 부드러운 모습

마치 신의 모습을 보는 듯 죄를 모르는 모습

아무 꾀도 안 부리는 순수함,

참되고 아름다움에 창조의 힘까지 갖춘 어린 하나님 같은 편안한 잠으로 다른 번추한 곳에 미칠 틈을 주지 않는 고결하고 순화 된 모습

사랑과 위엄으로 곱게 순화시켜주는 경건한 하나님의 자는 얼굴에 예배하고 있다.

고 끝맺는다.

그런데 방정환선생이 어린이를 귀히 여기자고 한지 1세기가 지난 지금 어린이들은 지위도 향상되고 경제적으로 윤택해져 자유롭게 배우고 뛰어 놀 수 있는 환경이 되었지만 어른들의 욕심으로 손때가 너무 많이 묻어 탁자 위의 분재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프다.

아마도 소파선생은 이보다는 순박하고 아름다우며 창조의 힘으로 자기의 길을 개척하는 어린이로 자라길 그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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