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를 떠난 문화재 Ⅰ

원랑선사탑비 운반 모습(1922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월광사지 전경.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동양일보]일제는 1915년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 5주년의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지금의 박람회격인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게 된다. 이러한 미명하에 경복궁의 자선당을 비롯한 아름다운 여러 전각들이 팔려가거나 무참하게 헐려지고 그 자리에 공진회가 개최된다. 아울러 공진회장의 야외공간을 장식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에서 수많은 석조문화재들을 반출하여 전시하였다. 천 여 년 이상 원위치에서 고고하게 자리를 지켰던 우리의 문화재들은 일인들의 강압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그 내부나 지하묘실 등에 봉안되었던 장엄장치들은 도난 되거나 멸실된 채 문화재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원위치를 떠나게 된다.

이러한 석조문화재들은 남한강의 수로를 통해 서울로 반출되어지는데 오늘날 “중원문화권”의 권역인 충주와 원주지역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남한강은 고대부터 우리민족의 젖줄로서 문화를 생성하고 융성케 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운송이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숫한 문화재를 약탈당한 역기능? 이 작용되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필자는 1980년대 후반에 약탈된 석조문화재에 주목하여 남한강변의 대 가람인 법천사, 거돈사, 정토사, 흥법사, 김생사, 월광사지를 답사하여 이들 문화재의 원위치를 확인하고 “일제강점기에 반출된 탑·비를 중심으로 한 중원지방의 석조부도”라는 논문을 발표한바 있다. 이후 1988년에는 충주문화방송의 협찬으로 이들 반출된 문화재가 있었던 장소에 석주형의 표석을 제작하여 설치하여 이들 문화재의 원위치를 고증하였다.

물산공진회가 끝난 1915년 12월, 그동안 반출해서 옮겨진 유물과 자료를 받아서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개관하게 된다.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일본의 조선침탈을 정당화하는 식민사관 정립의 중심기관이 된다. 그 후에도 총독부박물관은 전국의 주요 사찰이나 사지에서 석탑, 승탑, 석조불상, 탑비 등을 옮겨와 야외에 전시하였는데 1926년도 자료만도 그 수가 11점에 달한다. 이 11점 중에는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보물 제360호)가 포함되어 있다.(사진 1)

제천의 월광사지에서 반출된 원랑선사탑비를 탐문하던 중에 만난 석영수 옹(1989년 당시 90세)은 일인들에 의한 반출 상황을 상세하게 들려주어 녹취하였다.

석옹의 전언에 의하면 일인들이 탑비의 반출을 위해 산상에서 선창이 있는 월악산의 동창까지 길을 닦아 가면서 환목을 정자형으로 깔고 그 위에 선로를 놓고 선반차로 옮기는데 10여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원랑선사의 승탑지에서 동쪽 50미터 지점에 원랑선사 탑비의 원재지가 있는데 1916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4책에 이 탑비가 교란된 채 쓰러져 있는 도판이 게재되어있다.

이곳에는 일인들이 1922년 총독부 박물관으로 비를 이관하였음을 적시한 작은 표석이 위치한다. 이와 같은 일은 다른 반출현장에서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는 현상으로 원랑선사탑비의 반출은 밀반출이 아닌 공개적으로 반출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원랑선사탑비는 다른 석조문화재와 다르게 옮겨지는 전 과정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사진 2)

월광사지는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월악산록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된 사찰로 사력을 알 수 있는 원랑선사탑비가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이다.

원랑선사탑비는 890년에 건립되었는데 비문에 의하면 월광사는 신라 효소왕(692∼702)대의 승려 도증에 의해 창건되었고, 866년 이후 원랑선사가 주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의 편년으로 볼 때 월광사는 신라 이래 고려시대까지는 융성하였지만 17세기 이후에 폐사 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비는 귀부·비신·이수의 세 부분으로 조성되어 있어 전형적인 비갈 양식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귀부는 지대석과 일석으로 조성되었는데, 용머리의 형상을 지닌 귀두는 곧게 세워 당당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빨과 여의주 등의 표현은 생략되었고 머리 상면에 장식을 꼽았던 홈이 남아 있다. 등에는 귀갑문이 표현되었다. 네 발은 5개의 발가락은 물론 발톱까지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귀부 상면에는 운문대의 비좌를 마련하였고 그 위로 비신을 세웠다. 비문은 김영(金穎)이 지었고 승려 순몽(淳夢)이 구양순체로 각자했다. 이수는 전면 중앙에 방형의 제액을 마련했지만, 글씨는 모두 마멸되었다. 제액을 중심으로 구름과 용이 가득 조식되었는데, 용의 머리와 몸통의 표현이 생동감 넘치게 조성되었다.

월광사지가 위치한 송계계곡은 우리나라 고대 교통로 중 가장 중요시 되어 왔던 계립령이 지나는 곳으로 영남지방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미륵대원지를 비롯하여 삼층석탑. 사자빈신사지 사사자구층석탑, 덕주사, 덕주산성 덕주사마애불 등 수 많은 불교유적과 관방유적이 산포되어 있어 고대부터 근세까지의 문화유적 벨트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월광사지는 충북 지역에서는 보고 사례가 많지 않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손꼽힌다. 또한 우리나라 고대 교통로의 중요한 위치에 있던 계립령로의 역사문화상을 연구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는 불교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심에 원랑선사탑비가 있다고 하겠다. (사진 3)

원랑선사탑비는 현재 월광사지에 위치하지 않고 국립중앙박물관 1층 로비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문화를 대표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메인 전시물로 원랑선사탑비가 소개되고 있는 것은 자랑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 말한 대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일제강점기에 옮겨 놓은 많은 문화재들이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 국보·보물과 같은 국가지정의 문화재의 위상을 갖고 있다. 최근 들어 이들 문화재를 원 위치로 환원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어 주목된다.

우리나라 승탑의 백미로 꼽히는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호)은 1911년 본래에 위치하였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지를 떠나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반환되었지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다가 최근에는 보존처리를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다. 원 위치인 법천사지에는 지광국사현묘탑의 탑비(국보 제59호)만 남아 있는데 1980년대 중반부터 원주시와 시민들의 지광국사현묘탑 환수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고 그 결과 2019년 6월 문화재청에서 원 위치인 법천사지로 이전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이전 시점은 2021년 이후가 될 전망이지만 반출되었던 문화재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사실만으로도 강원도와 원주지역민들이 갖는 자부심은 커다란 성과라고 하겠다.

제천 월광사의 원랑선사탑비도 원주 법천사의 지광국사현묘탑처럼 언젠가는 제자리인 월광사지로 돌아올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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