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영 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동양일보]쟤네 뭐지? 사무실 창문을 열다가 그대로 눈길이 멈췄다. 온통 흰 눈을 뒤집어 쓴 듯한 하얀 나무들이 갑자기 눈에 띄었다. 저곳에 나무가 있었던가. 얼마 전까지 해도 나무가 있었는지 의식도 하지 못했던 쓸쓸한 도로였다. 그런데 마치 배우들이 무대 위에 ‘짠~’ 하고 나타나듯 하얀 꽃으로 단장한 나무들이 일시에 눈부신 모습을 드러냈다. 이팝나무 가로수다.

요즘 출퇴근길은 이팝나무를 보는 재미로 행복하다. 딱딱한 시멘트 건물, 획일화된 상점들, 삭막한 회색 빛 도시 속에서 만나는 이팝나무의 소담한 흰꽃은 우울한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해주고 따듯하게 위로해 준다. 도시에 사랑받는 가로수가 있다는 것은 품격이 있다는 것이고 시민들에게 서정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청주처럼 명품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지니고 있는 도시의 가로수는 더 말하면 잔소리다.

도시를 계획할 때 미관과 환경을 위해서 가로수(街路樹, street tree)만큼 중요한 것이 없을 듯 하다. 세계 이름난 도시들은 모두 명품 가로수들이 그 도시를 상징하는데 한몫을 한다. 파리의 마로니에(칠엽수)가 그렇고, 베를린의 너도밤나무, 로마의 소나무, 센다이시의 느티나무 등 유명 가로수는 그 도시의 이미지와 격을 높인다.

이팝나무가 갑자기 사랑받는 가로수로 떠오르게 된 지는 얼마 안되는 것 같다. 아직까지도 ‘가로수’ 하면 넓은 잎이 너울거리는 플라타너스가 먼저 떠오르니까. 그러고 보면 가로수도 꽤 유행을 상당히 타는 편이다.

가장 오랜 추억으로 남은 것은 미루나무라 불리던 키가 큰 포플러다. 지금처럼 다듬어진 포장도로가 아닌 시절, 포플러는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나 논둑길에 많이 심었던 나무이다. 20m 이상 자라는 키 큰 나무들이 바람이 불면 일시에 아기 손바닥 같은 나뭇잎을 흔들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나무들과 비슷한 시기에 심어졌던 또다른 나무는 버드나무. 청주의 무심천 둑에는 마치 여인이 긴 머리를 늘어뜨린 듯 물쪽으로 푸른 가지를 드리운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러다가 이 나무들은 봄철이면 하얗게 날리는 솜털씨앗으로 미움을 받으면서 시나브로 사라지고 그 자리엔 새로운 나무들이 자리를 잡았다. 도로 가엔 플라타너스가, 무심천 둑엔 벚나무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또다른 나무들이 도심 속으로 들어왔다. 어느 날 보면 느티나무가, 어느 거리를 보면 은행나무가, 그리고 대왕참나무, 목백합, 메타세콰이어가 구획을 짓듯 도로 가 자리를 차지했다.

이 틈을 타 특색있는 나무들이 가로수로 사랑받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영동읍내의 감나무 가로수와 충주시 입구의 사과나무 가로수, 괴산읍내의 소나무 가로수이다. 올들어 울산시 동구가 산복숭아나무를 지역 주요 관문에 가로수로 심은 것도 이런 맥락이다. 서울시 역시 율곡로, 강남대로 등 10개 간선도로를 ‘가로수 10대 시범가’로 지정하고 2023년까지 단계적으로 칠엽수, 목련, 회화나무, 중국단풍, 복자기 등 특정 나무만 심은 거리를 만들어 나가기로 했다니 이 거리들이 완성되면 도시는 또다른 아름다움으로 빛이 날 것이다.

가로수가 있는 길을 가면 누구나 마음이 편안해지고 넓어진다. 그러나 나무들이 아름답다고 해서 무조건 가로수로 심을 수는 없다. 가로수로 살아남으려면 몇 가지 조건에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기후와 풍토에 알맞은 수종이어야 한다. 그리고 잎의 크기도 중요하다. 잎이 크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미세먼지를 흡수하며 도시의 열기를 식혀준다. 가로수는 또 식생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 자라므로 병충해에 강하고, 대기오염을 이겨내야 한다. 아울러 가로수의 특성상 주변의 간판이나 전선을 피해 가지를 잘라줘야 하므로 가지치기를 잘 견디는 나무여야 한다.

이팝나무가 가로수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은행나무가 열매의 악취로 불쾌감을 준다는 불만이 늘자, 대안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배고픈 시절 흰꽃이 푸짐한 쌀밥(이밥)처럼 보여 이팝나무롤 불린 이 나무는 한국인의 정서에도 맞는데다 흙이 얕은 곳에서도 잘 자라고 생명력이 강해 새로운 가로수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요즘처럼 하얀 꽃이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한, 이팝나무는 오래도록 사랑받는 가로수로 우리 곁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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