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진천 문학평론가

강찬모 진천 문학평론가

[동양일보]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노래 ‘봄날은 간다’는 봄을 대표하는 노래이다. 언제부터 이 노래가 봄을 상징하는 내 개인 이미지로 체화되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가수 백설희가 1953년에 취입한 이래 국민가요로 널리 애창되고 나 또한 어린 시절에 이 노래를 많이 듣고 자랐다. ‘봄날은 간다’는 시 전문 문예지인 <시인세계>(2003)가 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노랫말이 가장 아름다운 우리 가요에서 단연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시인들이 눈여겨 본 점은 대중가요라는 통속성 속에 내포한 심오한 철학적 의미일 터이다. 미려한 ‘예쁨’만이 어찌 아름다움을 전유하게 될까. 슬픔과 비극이 결여된 아름다움은 일개 ‘당의정(糖衣錠)’같은 얄팍한 감미료에 지나지 않는다. 역시 생의 감식력과 직관은 시인들의 세포임이 자명하다. 언어의 모신(母神)인 시인의 선택을 받은 가사이기에 이론의 여지가 적을 듯하다.

내가 가사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건 성인이 된 후의 일이다. 유독 봄을 ‘봄날은 간다’의 노래로 기억하는 것은 바로 ‘연분홍색 한복 치마 ’이미지 때문이다. 엄마는 훤칠한 키에 어깨가 좁아 한복이 매우 잘 어울리는 계란형 전통 미인이었다. 외가의 대소사에 이모들과 찍은 사진이나 동네 아줌마들과 한복을 입은 단체 사진을 봐도 비녀로 쪽진 머리와 갸름한 얼굴이 한복과 조화를 잘 이룬다. 물론 내 엄마라서 피의 쏠림 현상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아무리 ‘초록은 동색’이라고 해도 붉은색을 초록으로 오인하는 청맹과니는 아니다.

8남매의 막내로 물가에 내놓은 자식처럼 나는 늘 엄마의 걱정과 염려를 먹고 자랐다. 스무 살 초입 처음으로 본격적인 객지 생활을 하기 위해 누나가 사는 ‘진천’으로 내려올 때도 엄마는 진녹색 치마에 연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설령 연분홍 치마를 입고 있지 않았어도 내겐 진녹색 치마보다 연분홍 저고리가 엄마의 연분홍색 한복 전체를 상징한다. 연분홍색이 주는 시각적 마찰과 봄의 화사함이 자연스럽게 연동된 탓일 게다.

며칠을 묵은 후 떠나는 차 안에서 엄마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이때도 연분홍 저고리의 옷고름은 흐르는 눈물을 닦는 엄마의 아픈 손수건이었다. 엄마와 작별한 4월 초의 날씨는 너무도 맑고 화창하여 이별의 슬픔이 차라리 처연했다. 당시 엄마는 큰형님이 모시고 있었고 나 또한 형 댁을 의지처로 일정 기간 똬리를 틀고 있던 때였다. 경제권을 넘긴 엄마 형편에서 막내 자식인 나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을 게다. 내가 설령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한들 막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태생적으로 씻지 못할 불효의 낙인이 된다는 것을 세월이 저만큼 흐른 뒤에 알았다. 당신 손으로 마지막까지 거두지 못하는 어미로서의 아픔이 당신 가슴을 도려냈으리라.

‘봄날은 간다’는 유한한 삶을 잘 표현한 노래이다. 사랑의 맹세도 삶이라는 불완전한 무대 위에서는 한낱 부질없는 약속이 되고 마는 불투명한 개연성을 이야기한다. 연분홍 치마를 입은 처자는 그러한 삶의 돌발적 예외를 인생의 한 부분이라 여기며 수용하고 긍정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애잔한 비극을 심화시킨다. ‘성황당 길→ 역마차 길→신작로 길’은 우리 근대의 전개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맹세를 저버리고 떠난 야속한 님을 시간의 흐름에 아랑곳 하지 않고 기다리는 영속을 보여준다. 이제 처자에게 기다림은 애끓는 고통과 불면을 초월, 생을 관통하는 희원(希願)과 가능성이 몽우리 진 시간으로 변한다.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의 별리의 정한과 잇닿는 정서를 보인다. ‘가시리’의 고려가요와 소월의 ‘진달래꽃’ 그리고 다시 만날 것을 믿는 만해의 ‘님의 침묵’과 동일한 정서를 내용으로 한다. 기다림을 유일하게 이기는 전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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