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동양일보]자그마한 테라스에 제법 여러 종류 꽃이 피어났다. 노오란 장미나무는 활짝 핀 여러 송이꽃을 매달고, 빨간 장미는 벌써 몇 송이 피었다 지는 중이다. 부겐빌레아도, 시계꽃도, 수국도 흐뭇하다. 겨우내 월동한 애플민트는 웃자라 있다. 배롱나무는 느긋하게 꽃필 준비 중인지. 좋은 계절, 비 오면 오는 대로 해 뜨면 뜨는 대로 이 계절은 은혜롭다. 놀기 좋은 날들이니 힘 넘치는 젊은 애들은 거리 유지하는 생활방식이 힘들기도 하겠다. 오랜만에 숲을 보러 나간 날은 수목원에 걷는 이들이 넘쳐났다. 할머니 부르는 소리, 아이들 재재거리는 소리가 맨 발로 걷는 황토길 위에 찰지게 들리기도 했다. 거리 유지 긴장감으로 더 더웠을까, 인적이 드문 곳이면 마스크를 벗고 찬연한 오월 공기를 들이 마셨다.

자연까지 아름다우니 사랑하기 더 좋을까, 오월을 가족의 달이라고도 부르니.

한 시절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소중한 것이니까.’ 이런 식 순환논법에 심히 멀미를 했다. 사랑도 의무는 괴로운 법, 명제처럼 던져지자 동의 과정 없는 규율처럼 무겁기만 했다. 어떤 목사님이 말씀했다. ‘성경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래야 우리가 사니까.’ 그 말이 적확하게 머리에 가슴에 들어왔다. 사랑은 사람을 사는 것 같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 되었다. 그거 없다고 죽기야 할까마는, 생기있게 살자면.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작가 김연수의 말이다.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 작가의 말에 적어두었다. 자신조차 완전히 알 수 없는 한계, 무엇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는 태생이다.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분명 다르고, 괴롭지만 그 괴리는 사실이다.

사랑이 있다고, 이런 세상에, 이해를 하는 일도 벅차서 노력이 필요한 이런 세상에 사랑이 있다고 작가는 한계에서 희망을 본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랑에는 얼마나 더 큰 노력이 필요할까. 그 노력이 얼마나 가상한지를 알기 때문에 그걸 잘 받고 잘 알아주는 것도 사랑일까. 그러니까 사랑에는 여러 모습이 있을까.

환갑이 넘거나 가까운 자식들을 만나면 아직도 어린애 보듯 끼니 걱정하는 엄마는 늙은 걸까, 늙지도 못한 걸까. 못 먹고 살았다던 시절로 퇴행을 하시는지, 아직 길러야 할 어린 것으로 보는지 어마무시하게 음식 해놓고 먹으라고 강권하다가 마침내 화를 내고 마는 엄마는. 자주 들르는 막내 동생은 도저히 엄마가 먹으라는 양을 감당할 수 없어 괴롭다고 호소하는데. 마침내 화를 내는 그런 방식의 사랑, 거절할 수밖에 없는 위장의 한계. 그애의 사랑은 엄마의 음식을 견디는 것일까, 그렇다면. 다정도 병인 양하면서, 절망하지 않고, 고생한 노력만 보면서 그렇게.

태생의 한계를 벗으려고 노력하는 아름다움만 봐주기로 하는 것은 그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는 방식일 수 있겠다. 살다가 너무 곤할 때는 절망 대신 쉬기도 하면서. 사랑도 꽃도 진홍으로만 필 수는 없다. 계절 따라 예쁜 꽃이야 피기도 지기도 하지만 그러는 사이 줄기가 굵어지고 길어지고 뿌리 깊어지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꽃도 피우고 쉬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사랑하면 되려나. 그나저나 해놓는 음식을 우리가 다 먹어치울 수 있으면 엄마는 행복할까, 얼마나 못먹어 저러나 싶어 또 다시 영변의 약산 진달래 따다놓듯 음식을 쌓아놓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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