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경 수필가

우승경 수필가

[동양일보]가경천을 걷는다. 걷는 걸음마다 신발에 노오란 살구 과즙이 묻어난다. 땅을 보지 않고 걸으면 미끈미끈 온통 살구 범벅이 된다. 살구는 바로 코앞에서 딱!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도 하고, 머리 위로 떨어져 콩! 쥐어박고 도망가기도 한다. 살구가 내게 말을 건다.

이른 봄, 7km의 가경천변은 연분홍 살구꽃 천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과 온갖 생물이 모여든다. 벌이 가장 먼저 찾아오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아기부터 반려동물 강아지까지 가경천은 장관이다. 꽃샘추위를 참아가며 볼그레 부풀어 올랐던 꽃봉오리가 다섯 장의 꽃잎을 펼친 후 꽃진 자리마다 파란 살구 구슬을 매단다. 여름이 짙어질 무렵 노오랗게 익은 살구가 나무에서 떨어진다. 이때가 되면 가경천은 온통 살구천이 된다.

노오랗고 탐스럽게 익은 살구가 화수분처럼 나무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면 친구 대여섯 명이 모여 가경천에서 살구천렵을 한다. 저마다 빛깔 곱고 향기로운 살구를 바구니 가득 담아가서 잼을 만든다. 각자 만든 잼과 식빵을 가지고 다시 모여 온종일 웃음꽃을 피운다. 같은 재료로 만든 잼이지만 친구들 수만큼 잼의 농도와 빛깔은 조금씩 달랐다. 이렇게 넉넉하게 만든 새콤달콤한 살구잼을 이웃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일 년 내내 두고 먹는다. 그러나 지금은 한자리에 모이기가 어려워졌다. 친구들 대부분이 학생들과 생활하는 직업이라 조심스러워 바이러스가 물러날 때를 기다리며 살구잼에 대한 추억을 한 페이지씩 넘겨보는 중이다.

걷다 보면 살구나무가 잘려 나간 구간이 나온다. 이곳을 지날 때면 튼실하고 가지런하던 이가 갑자기 빠져나간 것처럼 아리다. 지난해 수령 30년 넘은 살구나무가 하루아침에 꽤 긴 구간 싹둑 잘려 나간 일이 있었다. 깜짝 놀랐다. 나무를 자른 이유 중 하나는 자연재해에 대비하려면 하천 정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과 또 다른 이유로는 부패된 살구 열매가 내는 악취로 주민들의 민원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가경천의 살구나무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었다. 시민들의 저지로 지금은 멈춘 상태다. 그렇지만 기존의 다리를 걷어내고 더 높고 넓게 놓는 다리 공사가 현재도 진행되고 있어 또다시 살구나무가 잘려 나갈까봐 마음이 쓰인다. 빠른 시간 안에 식재하겠다는 현수막이 빼곡히 붙어 있지만 믿지 못할 약속처럼 현수막 색이 바래간다. 잘려 나간 살구나무 밑동 옆으로 도심의 자동차 소리가 요란하다.

살구나무 아래 앉아본다. 꽃을 보여줄 때는 좋다며 모여들고, 열매를 내보낼 때는 코를 막으며 불편을 호소하고, 쓰임과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재단을 해버리는 사람들이 살구나무 입장에서 몹시 두렵지는 않았을까? 가경천에서 군락을 이루며 살아온 살구나무가 사라져야만 자연재해도 사라지는 것일까? 그 반대는 아닐까?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두면 안 되는 것일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걷고 있을 때 살구가 또다시 말을 걸어온다. 살구 한 알을 입에 넣어본다. 향긋하다. 살구가 떨어지는 시기는 길지 않다. 잠시 우리 곁에 머물다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돌아가기까지 짧은 순간에도 생명을 깃들게 하고 작은 생물들의 먹기가 되기도 한다.

온 몸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키워낸 가경천의 살구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대견하고 고맙다. 가경천을 따라 걸을수록 살구나무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