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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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5월은 어린이날이 있는 달이다. 어린이날에 이어 어버이날까지 있어서 가족들이 모이는 기회가 많은 화기애애한 달이다. 올 5월은 때마침 코로나 방역지침도 완화되고 계절도 좋다보니, 유원지마다 행사장마다 어린이를 낀 가족 모임들이 넘쳐났다. 오랜만에 보게 된 기분 좋은 풍경이다.

더구나 올해는 ‘어린이날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2년 여러 소년운동단체, 신문사, 천도교 등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한지 꼭 100년이 된 것이다. 어린이날을 선포한 이듬해 방정환 선생은 일본 유학생들과 함께 도쿄에서 ‘색동회’를 발족하고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한다. 그리고 5월 1일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당에서 크게 열었다. 어린이날 행사를 알리는 선전지만도 4종류 12만 장이 배포됐으니, 당시로서는 꽤 큰 규모였다.

이후 어린이날은 전국적인 기념행사로 발전한다. 그런데 5월 1일이 노동절과 겹치기 때문에 1927년부터는 좀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어린이날 행사를 5월 첫째 일요일에 열었다. 일제의 압제 속에서 민족정신을 심어주고 꿈을 키워주고자 하는 어른들의 염원으로 어린이날의 행사 규모는 매년 커져갔다. 이렇게 규모가 커져가자 일제는 어린이날 행사를 통해 반일감정이 길러질 것을 염려해 1934년 잡지 ‘어린이’를 폐간한 데 이어 1937년 어린이날 행사도 금지했다. 결국 ‘어린이’ 잡지 발행이 막히고, 어린이날 행사도 중단됐다. 그러나 광복이 되자마자 1946년부터 다시 ‘어린이’가 발행됐으며 어린이날 역시 부활했다. 이때도 기념식은 5월 첫째 주 일요일인 5월 5일 열렸는데, 이후 날짜가 달라지는 불편을 막기 위해 아예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면서 어린이날은 국가적인 행사가 됐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지닌 ‘어린이날’이 있게 한 ‘어린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씌어진 것일까. ‘어린이~’라고 부르면 어감도 좋지만, 그 의미도 좋아서 사용하는 사람의 인격이 느껴지는 단어. 이 단어는 원래 있던 단어가 아니었다. 아동문학가 소파 방정환 선생이 만들었다. 그 이전엔 아동을 아이, 아해, 애새끼, 아이놈 등 다소 비하적인 낱말로 불려왔는데, 방정환 선생이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불을 켜는 아이’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어린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도 아이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인격적인 존재로 대접받지 못하고 어른의 소유물로 여겨졌다. 이에 방정환은 ‘늙은이’나 ‘젊은이’와 대등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아 ‘어린 사람’이라는 의미로 ‘어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역사적으로도 최초로, 아이들을 대접해 부르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어린이’라는 말에 빗대서 ‘요린이’, ‘주린이’, ‘토린이’ 등의 합성 신조어들이 양산되고 있다. ‘요린이’는 요리에 서툰 초보자라는 뜻으로, ‘주린이’는 주식 초보자, ‘토린이’는 토익입문자를 말하며, ‘부린이’는 부동산 초보자, ‘골린이’는 골프 입문자를 말한다는 것.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신조어 ‘〇린이’는 미성숙하거나 실력이 낮은 초보자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은 이 달, 마침내 국가인권위원회는 ‘요린이’ ‘주린이’, ‘토린이’ 등의 신조어를 아동을 차별하는 단어로 판단해 공공기관에서 사용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린이’라는 표현이 “아동이 권리의 주체이자 특별한 보호와 존중을 받아야 하는 독립적 인격체가 아니라,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인식에 기반한 것”으로 “아동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권위는 홍보와 교육 등의 방안을 마련하라는 의견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표명했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는 방송과 인터넷 등에서 사용되지 않도록 점검을 강화할 것을 요청했다.

어리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거나 하대하지 말고, 어른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사랑하자는 뜻으로 제정된 낱말 ‘어린이’, 그리고 ‘어린이날’.

방정환 선생이 아동을 존중하는 의미로 만든 ‘어린이’라는 용어를 장난하듯 신조어로 바꾸어 말하는 것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게 되므로, 더 늦기 전에 바로 잡아야하는 것이 맞다. ‘어린이’는 영원하고, ‘요린이’ ‘주린이’는 사라져야할 단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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