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주문을 외자, 조·여·청·망·치·단

노창선(시인·한국교통대 교수)

2013-09-23     동양일보


음영경(서양화가) 작, ‘seeing’


가을엔 주문을 외자, 조·여·청·망·치·단
노창선(시인·한국교통대 교수)


1. 조  ·세상은 떠들썩하다!).

2. 여(旅·나그네 되어).
먼 길을 떠나고 싶다. 가을 울타리에는 연서처럼 붉은 단풍나무 잎사귀 한 장 꽂혀있는 곳. 거기가 내 고향일 것이다. 그 슬픈 울타리를 따라 가다보면 하늘빛처럼 푸른 강물이 하얀 비늘을 일으켜 세우며 우는 곳. 넓은 강변에는 바람 따라 갈대가 서로 몸을 비비며 쓰러질 듯 흔들리는 곳. 내 고향 어귀에서 나는 세상을 잊고 싶다.

3. 청(聽·듣다)
강물 소리, 갈대 소리는 한동안 내 덧난 곳을 쓰다듬어줄 것이다. 어린 날 할머니의 약손처럼 그렇게 치유를 얻고 싶다. 밤이 되어 풀벌레가 귓가에 시끄럽게 울어대면 나는 다시 환생하고 싶어질 것이다. 어쩌면 둥근 보름달이 어둔 앞산의 실루엣 위로 한가로이 떠오르면 동네 개들이 일제히 울어대도 좋다. 그러면 먼 곳의 강물 울음소리는 납작 엎드려 안으로 안으로 더욱 깊어질 것이다.

4. 망(忘·잊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그 소리들이 내 귓가에 머물러 있는 한, 이젠 세상이 몹시 가벼워질 테고 나는 헐거워진 가방을 메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끄떡없다. 가을바람이 드세어진다 해도 나는 이제 다시 옷깃을 여밀 수 있을 것이다.

5. 치(恥·부끄럽구나)
돌이켜보면 시장의 언저리에서 서성이던 날들이 부끄럽다. 집착하고 연민하던 마음도 훌훌 벗어던져 버리고 작은 오솔길을 걸으며 가을이 저무는 냄새를 맡고 싶다. 부끄러운 마음을 가리고 붉게 익은 감나무 아래 서서 조락의 겸손을 배우고 싶다.

6. 단(丹·붉은 나무 한그루로 서 있고 싶다) 
내 사랑하는 이들 오솔길을 지나 마른 갈대 잎들 서걱이는 강변으로 걸어오면 나는 붉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되어 문 앞에서 기다릴 것이다. 들마루 끝에 마주 앉아서 걸어오면서 만난 바람의 이야기, 들꽃들의 이야기, 꽃향기의 이야기, 뒤따라오면서 울어주던 산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들마저 떠나가면 노을 아래 빈 가지로 남아 주문처럼 외고 싶다.     · 旅ㆍ聽ㆍ 忘ㆍ 恥ㆍ  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