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구와 고향

최천호 목사 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진 신석구’

2014-02-06     조아라

동양일보는 6일부터 격주 목요일 10면에 충북 청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고 신석구 목사를 조명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진 신석구’를 연재한다. ‘조국의…’를 통해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자신이 진 십자가를 결코 내려놓지 않았던 그의 생애를 돌아본다. 


역사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충절의 고향 충청도에는 일제의 침략으로 잃어버린 조국을 다시 찾으려 자신의 목숨을 바친 위인들이 수없이 많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닌 사건이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에 충북 출신이 6명 있으며, 그중 한 분이 은재(殷哉) 신석구(申錫九) 목사이다. 그는 ‘잃어버린 국민’을 되찾기 위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개신교 감리교회에 소속된 목회자가 되었다.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있을 때, 친구인 오화영 목사로부터 3.1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 받고 ‘목사가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기독교인으로 신조가 다른 천도교, 불교인과 연합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고민으로 쉽게 결심을 내리지 못하다가 새벽기도 중 “수천 년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빼앗긴 것도 큰 죄인데 이제 찾을 기회가 와서 참여하지 않으면 더 큰 죄가 아닌가?”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결단을 내리고 맨 마지막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소극적이고 비겁하게도 보일 수 있다. 종교적 신념 때문에 우리 민족의 최고 가치인 ‘민족의 독립’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신석구 목사에게는 진정 중대한 문제였다. 목사로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과 기독교인이 신념과 교리가 다른 천도교인과 연대활동을 벌이는 문제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3.1운동 참여는 종교적인 결단이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정치운동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 저항운동이었다. “아직은 시기상조다”라는 주위의 만류가 있었음에도 그는 “나는 독립을 거두러 가는 것이 아니고 심으러 간다”면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며 ‘죽기 위해’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하기에 그는 일제 경찰의 신문이나 재판과정에서 흔들림이 없는 올곧은 자세를 보여 주었고 2년 8개월 투옥기간 중에도 감옥을 천당처럼 여기며 감격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신석구 목사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청주군 산내이상면(지금의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 속칭 ‘갯골’로 불리는 개동(介洞)마을이었다. 갯골은 지금도 버스가 들어가지 않는 산골이다. 그의 먼 조상은 강원도 춘천과 충청도 공주, 경기도 고양, 포천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 판의금부사를 지낸 4대조(신사운)의 무덤이 괴산에, 3대조(신불)의 무덤이 진천에 있고, 할아버지(신광소) 무덤부터 개동에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고려 말과 조선 초기 경기도를 중심으로 살던 조상들이 조선 중기 이후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와 18세기 중반에 충청도로 들어왔고, 그의 할아버지 때 비로소 갯골에 정착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석구 목사의 가문은 고려와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명문에 속하는 평산(平山) 신(申)씨이다. 신석구 목사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 살림에 열 살 되던 해부터 나무를 베고 물고기를 낚아 부모를 모시며 부모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드리는 ‘무조건적인 효’를 실천한 분이었다. 특히 열세 살 때 병들어 누운 어머니가 늦가을에 복숭아를 먹고 싶다고 하자 곧바로 복숭아나무를 찾아다니며 열매를 구하던 중 가시덩굴 속에 숨겨진 복숭아 나뭇가지에서 열매 두 개를 찾아 갖다 드렸던 일화는 전설 같은 이야기로 집안에 전해 내려왔다. 아버지는 융통성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원리주의자, 원칙론 자로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였다. 당시 선비 집안 아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석구 목사도 이런 아버지와 할아버지 밑에서 8세 되던 해부터 본격적인 한문 공부를 시작하였다. ‘신동’이나 ‘천재’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옳은 사람이 되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며 자라 부자나 출세보다는 ‘의인’ 되는 것을 삶의 좌표로 삼았다.



약력
△57년 충남 당진 출생
△전 청주예일교회 담임목사
△시인, 수필가
△현 기독교대한감리회 충북   
    연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