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탁 박사 충북문인협회 창립 주역

척박한 시대 향토문화 터닦기… 문화운동 반세기

2010-02-22     동양일보

57년‘문화인협회’역사적 출범
행정관·문인·교수 ‘다재다능’

 

◆오세탁(吳世卓)박사는 …
△1930년 5월 16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55에서 출생(고향은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518) △서울 중앙고보. 서울대 법대. 단국대 대학원 졸업(법학박사) △일본 도쿄대 연구교수 △53~61년 청주여중, 청주여고, 청주고 교사 △57년 1월 충북문화인협회 상임위원 △62년 2월 한국문협충북지부 겸 충북문인협회 창립 △65년 충북도 법무관. 사회과장 △74년 ‘충북문학’창간호 발간 △75년 충북예총회장 △76~95년 충북대 교수 △82년 충북예술상 수상 △저서 ‘오늘의 정좌표’ 등 시집 4권. ‘문화재보호법원론’등 전공서 5권 △청주시 흥덕구 사창동 101동 1002호 ☏☎043-264-6700).


충북은 이 나라 국토의 중심이다.
그래서일까.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이 나라 개화기에 굳게 닫혀있던 조선의 문을 열게 한 신문명의 걸출한 선각자들 중 충북출신이 두드러지게 많아 인물로도 ‘역시 충청도는 한국의 중심’이라 할 만 하다. 그 중 문학의 경우 더욱 돋보이는 이름들이 있다.  소설가 홍명희(1888~1968·괴산),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희곡작가인 조명희(1894~1938·진천), 시인이자 화가인 권구현(1898~1938.영동), 시인 정지용(1902~?·옥천), 평론가 김기진(1903~1985.청원), 소설가 이무영(1908~1960·음성), 시인 이흡(1908~?·충주), 시인 조벽암(1908-1985·진천), 시인 박재륜(1910~2001·충주), 시인 정호승(1916~?·충주), 아동문학가 권태응(1918~1951·충주), 시인 오장환(1918~1951·보은), 소설가 홍구범(1923~?·충주), 시인 신동문(1927~1993·청원)선생 등은 근대에서 해방공간-전후(戰後)에 이르는 동안 한국문단을 밝힌 불멸의 별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록되는 충북출신 문인들이 해방과 더불어, 50~53년 한국전쟁기간을 지나면서 이런 저런 까닭으로 대부분 충북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자리의 문화풍토 또한 폐허였다. 전쟁이 남긴 가난과 비통함이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무(慰撫)치 못할 때 문학과 예술의 씨앗이 발아(發芽)하기 시작했다.

 50년대 중반 이후 청주의 지식인들이 자주 모이던 곳은 청주시내 한 복판에 있던 다방 ‘오페라’(현 청주우체국 앞)나 ‘리버티’. 문학인 뿐 아니라 미술. 음악 등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가끔씩 만나 예술문화에 대한 서로의 목마름을 축이다가 자연발생적으로 ‘예술인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57년에 접어들자 이 같은 욕구는 윤곽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민병산(문학평론)씨 집과 오페라다방에서 머리를 맞대던 문학·예술인들은 드디어 1월 24일 ‘충북문화인협회’를 발족, ‘예술인 단체’로 역사적인 출범을 한다. 현 충북문인협회는 53년 전 이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오세탁’이라는 청주시내 중·고교에서 문예지도 교사를 하던 한 문학인이 있었다.

 충북문인협회 반세기의 한 획을 그어야 할 이쯤에서, 한 실증자(實證者)를 찾는다면 단연 그가 첫 손에 꼽힌다. 한때는 정당인이요, 행정관이기도 했고, 법학 교수이자, 시인인 오세탁(80)박사를 만난 건 2월 첫 주말이었다.

-올 해로 팔순(八旬)이 되시지요? 차 운전하고 오신 것이나 혈색을 뵙기에는 ‘80노인’이 아니라 아직도 60·70대에 머물러 있으신 듯합니다.
“우리나이로는 81세입니다. 아직은 염려할만한 병은 없습니다. 즐겁고 바쁘게 살아서 그런가 봅니다.”

-자료를 보다가 지금의 ‘충북문인협회’의 뿌리라 할 ‘충북문화인협회’가 창립된 때가 1957년 1월 24일, 2월 25일, 2월 27일로 제각각 돼 있어 혼란스럽더군요. 1957년엔 이의가 없으니 햇수로는 53년이 된 것은 확실한데, 생일날이 문제여서요.
“오랜만에 옛날 문협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됐습니다. 이제 서서히 잊혀져 가는 역사인데…”

-출범 당시 정황을 기억나시는 대로 더듬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때 ‘충북문화인협회’라는 이름의 결정엔 진통이 있었어요. 우리 문인들은 ‘충북문학예술협회’라고 하려고 했는데, 미술계와 음악계 쪽에서 반대해서 할 수 없이 ‘충북문화인협회’로 했습니다. 우리(문인들)는 ‘문학분과’였지요. 그때 발기인이 20여명입니다.”

-출범 일자가 정확히 언제인가요.
“1957년 1월 24일이 맞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스크랩의 충북신보 기사에서 확인됩니다. 아마도 몇 군데서 오기(誤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때 함께 창립에 정열을 쏟았던 분들이 문학인 중 이설우(시인) 홍원길(소설가) 신동문(시인) 민병산(문학평론) 최병준(수필가) 최창희(소설가)씨 등이 이미 돌아 가셨고, 지금 생존해 있는 분들은 선생님이나 박재용(동화작가), 송주헌(소설가)씨 등 몇 분 안 되시지요?
“그래요. 당시엔 신춘문예 등으로 당선이나 입선한 사람들이 등장해 청주의 문단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고 있을 때였지요. 앞서 말한 사람들 외에도 의사이자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전예근씨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됐지요. 그때 충북신보(후에 충청일보로 제호를 변경했음)가 창간돼 작품발표를 하고, 유봉업씨가 ‘주성문화사’를 만들어 ‘직업여성’이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작품들을 실어 주어서 글 쓰는 이들에겐 가뭄에 단비 격이 됐지요.

-어느 기록에 의하면, 57년 1월 6일 ‘충북문학예술협회’(가칭)가 발기인회를, 10일엔 조선식당에서 준비위원 총회를 가졌다고 돼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때 나와 민병산, 이설우, 신동문, 홍원길 등이 주축이 돼 24명이 멤버였습니다. 그리고 1월 24일 청주공보관(현 상당공원 자리)에서 ‘충북문화인협회’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당시 충북문화협회 결성총회 관련 기사에 따르면, 24일 오전 11시부터 행사가 진행됐으며 정문교 도 사회국장과 노의중 도의회의장을 비롯해 홍원길 청주시장, 송재근 청주시의회 의장 등 지역 인사들과 회원 60명이 참석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날 행사의 사회는 박재용씨가, 경과보고는 준비위원장을 맡은 이설우씨가 했으며 임시 집행부 의장단으로는 나(문학)와 안승각(미술) 송경호(평론)씨를 선정했지요. 그리고 이날 정식명칭을 ‘충북문화인협회’로 결정 발표했지요.”

-알겠습니다. 이 충북문화인협회는 문학·미술·음악·평론·연극 등 5개 분과로 이뤄져 있었더군요. 기억나시는 분과별 주요멤버가 있으신지요.
“문학분과는 앞서 말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실제 협회발족을 준비한 주체들이지요. 미술분과엔 안승각. 윤형근. 정창섭, 음악분과엔 이상덕. 김유식. 이상두, 연극엔 김근수 등이 기억나고, 평론분과는 민병산. 송경호씨 등이 기억납니다.”

-당시의 ‘문학분과’가 지금의 ‘충북문인협회’가 된 것이겠군요. 그런데 57년 1월의 충북문화인협회 출범 이전에 ‘향우문학회’가 발족돼 있었지요?
“그렇지요. ‘향우문학회’가 생긴 것은 협회발족 2년 전인 55년이었지요. 그 1년 후인 56년에 고등학교 문학서클인 ‘푸른문’이 생겼지요. 이같은 동호인 모임이 연달아 발족되면서 향토문단에 새로운 가능성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 했지요.”

-문학분과 위원장은 누가 맡았었는지요.
“이설우씨가 잠깐 맡았다가 민병산씨로 넘어 갔어요. 서류상으로는 민병산씨지요.”

- 문화인협회가 ‘충북예총’(충북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신이지요?
“단계적으로 말하면, 충북문화인협회가 59년도의 ‘한국문총(한국문화인총연합회)충북지부’가 됐지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문학분과’는 ‘충북문학인협회’가 됐지요. ‘분과위원회’가 ‘협회’로 독립, 격상된 것이고, 그 이후로 ‘한국예총충북지부’로 명칭이 바뀐 것 이지요. 오늘의 ‘예총’이지요. 난 문학인협회가 되면서 부회장을 맡게 됐지요.”

-청주에 시화전이나, 문학의 밤 등이 선을 보인 것이 그 무렵이던가요?
“59년도에 첫 ‘충북예술제’행사가 개최되었지요. 그 전 해인 58년 9월에 공보관에서 첫‘문학의 밤’을 열었는데 시민들의 관심이 뜨거웠어요. 59년 1회 충북예술제 때는 리버티 다방에서 첫 시화전을 했는데, 그때 정창섭씨와 윤형근씨가 그림을 맡아서 해 줬지요. 50년 전의 일이네요.”

-세월로 따지면 반세기가 흘렀지만, 그 당시 청주에서 고등학교 미술교사였던 정창섭. 윤형근 두 화백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화단을 지키는 대들보들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62년에  ‘한국문인협회충북지부’겸 ‘충북문인협회’로 명칭이 바뀌었고 초대 회장을 맡으셨지요.?
“그렇습니다. 이때부터 명실공히 충북문인협회가 되었습니다.”

-요즘 충북문단이나, 문협이나 문화전반에 대한 조언을 한 가지만 하신다면…
“지금의 충북문인협회는 각 지역문인협회의 연합단체 성격이고, 청주문인협회는 청주지역 문인들만의 단체고… 그러면 각 지역에 있는 중견이나 원로문인들이 지역을 뛰어 넘어서 만날 수 있는 단체는 없다는 말이 됩니다. 동인이나 지역별 문인 단체를 통틀어서, 문협이니, 민족작가회를 망라해서 어떤 연합적이고도 문인들의 권익을 위할 수 있는 힘 있는 문인단체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은 마치 ‘의기투합된 같은 지역’ 사람들만 모여 있는듯해요. 오히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있었던 옛날의 문인단체보다 약화된 듯 보여요. 새로운 방안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일부 문인들이 ‘무슨 계(契)모임 같아졌다’는 우려도 있더군요. 문인단체는 동인회와는 다른 것을 알아야할 텐데… 문협 관련해서는  대략 알겠습니다. 그런데, 문협 초창기 때의 특별한 기억은…
“그 때 문협이거나 예총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서로를 잘 아는 사이들이어서 허심탄회하고 격의 없이 지냈어요. 어떤 행사를 한다면 대부분 우리 집에서 모임을 가졌었지요. 백일장 심사도, 예술제 행사를 위한 모임도.… 우리 집이 청주공고 앞(청주시 영동)에 있을 때인데 수시로 모이고, 모이면 술·밥 먹어야 되고…회의 끝엔 마작도 하고…우리 집사람(김정애·77)이 고생 많이 했지요(웃음)”

-사모님을 옛날에 뵈었는데 아주 예쁘셨던 기억이 남아요. 지금도 서예를 하시는지요?
“(흐뭇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남들도 그런 말(예쁘다는)을 하지요. 서예는 한 10년 했는지, 도전(道展)에서 특선도 한 적이 있어요.”

-제가 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이 40년 가까이 됩니다. 문화담당 기자였을 때부터, 함께 문협 관련 일도 했고, 비교적 하시는 일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만, 요즘 더욱 궁금한 것이 청각기능이 예전보다도 훨씬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보청기 성능이 좋아져서인가요?
“보청기의 성능도 예전보다는 나아 졌지요. 크기도 작아지고, 성능도 좋아지고…그런데 난 아주 비싼 것을 쓰지 않는데도 썩 잘 들려요. 보청기를 오래 사용해야 그렇게 된다나 봐요. 요즘은 아무 불편이 없어요. 잠잘 때 만 빼 놓으니까 남들은 잘 모를 거예요.”

-언제 청각을 잃으셨는지요.
“서울 제동국민학교를 나왔는데, 졸업할 때 쯤 보약을 먹은 것이 좀 지나쳤대요. 그래서 오래전부터 보청기를 썼는데 근래 들어서는 세세한 소리도 잘 들어요.”

-고향은 괴산군 청안읍내인데 출생지와 학력이 모두 서울이신 까닭은…”
“조부님이 청안서 꽤 부자셨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서울로 학교를 가셨다가 일본 릿교대(立敎大)유학중 돌아가셨어요. 내가 3살 때라 아버지 얼굴도 기억못해요. 그래서 서울서 나고 초·중·고·대학을 다 서울서 나왔고, 직장을 고향이 있는 충북에서 잡았지요.”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또 있습니다. 교사로, 도청 행정관으로 재직하시다가 전혀 길이 다른 정당 생활을 하신 일인데요. 혹 정치에 꿈을 가지셨던 것 인가요?
“내가 어디에 내놓는 이력사항에 되도록 적지 않는 사항입니다. 사실은, 도청 사회과장으로 있을 때인데 당시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의 육인수 의원께서 도당 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나를 찍어서 도지구당 일을 맡기면 좋겠다고 도지사에게 말했다는 거예요. 고민을 많이 했으나 거절할 입장도 아니어서 ‘파견근무’처럼 생각하고 당에 들어갔지요. 74년도지요”

-어떤 직함을 받으셨는지요.
“민주공화당 충북도지구당의 선전부장과 조직부장을 맡았었습니다.”

-체질에 맞으시던가요?
“열심히는 했습니다. 그때, 문인협회라거나 충북의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가졌었지요. 1년 반쯤 있다가 그만 뒀지요.”

-그 다음에 충북대 교수로 임용 되셨지요? 혹 정치적인 배려는 없었는지요.
“주위의 도움은 있었겠지만, 이를 ‘정치적인 배려’로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76년부터 95년까지 20년 가까이 충북대 교수를 하시는 동안 공부를 많이 하셨더군요. 80년엔 일본 도쿄대학 법학부 연구교수로, 83년엔 단국대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으셨지요. 충북대에서도 사회과학대와 법과대학장도 역임 하셨으니 총장 빼곤 다 해 보셨네요. 충북예총 회장(75년)도 하셨고, 언론중재위원이나 충북도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도 하시는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지셨는데… 이 같은 이력들이 문화운동에는 다소 도움이 됐겠으나 시인으로 작품 활동을 하시는 데는 오히려 걸림돌은 되지 않았는지요.
“다양한 경험들이 많을수록 좋기는 한데, 나의 경우는 그것들을 작품으로 육화(肉化)시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가령, 방정환 선생 같은 경우가 어린이 운동에 주력하다 정작 본인의 작품 활동엔 미흡하여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운 작가가 아니었나 싶은데, 혹시 향토 문화운동에 에너지를 소진하여 작품의 양과 질에 소홀했다는 후회는 없으신지요.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 지역 문화운동에 누군가는 팔을 걷고 나서야 하는데 어차피 내가 이 길에 들어섰으니 어쩌겠어요. 남은 생애라도 문예진흥사업에 더 열심히 많은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그는 오래전부터 유네스코 연맹 고문 등을 맡아 현재까지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청주엔 내외분만 계신가요?
“17년 전에 간암으로 잃은 큰아들(석창·55년생)밑으로 큰딸(성미·54)이 부경대 교수인 남편 따라 부산서 살고, 작은 딸(정선·51)은 남편이 건국대 교수여서 서울에 살아요. 차남(석용·47)은 원주에서 지에스 슈퍼를 하는데 잘들 살고 있어요. 집사람은 복지관에서 노인들 춤과 일본어도 가르치고 유치원 봉사활동도 하는 등 보람 있게 노후를 보내고 있어요.”

-젊은 시절, 척박한 향토문화의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셨던 노고가 이제는 각종 꽃들이 어우러지는 화단이 됐지만, 많은 이들이 발길을 멈추고 감탄을 하기에는 미흡한 게 많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며 뒤로 물러나시지 않고, 후진들이 온고지신(溫故知新)할 수 있도록 편달(鞭撻)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남은 생애를 열심히 살겠습니다.”

          ▶대담·글/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기록/오상우·사진/임동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