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가 낳은 ‘공공철학’의 석학 김태창 박사를 만나다

여든 둘 나이에도 ‘꿈’을 이야기 하다

2015-10-11     조아라 기자

(조아라 동양일보 기자) 꿈 사냥꾼, 꿈을 좇는 사나이, 꿈을 연모하는 나그네… 일본 대학생들이 지어준 별명을 그는 훈장처럼 소중하게 지니고 다닌다. 희망으로 한껏 푸르러야 할 청춘들이 자신들을 ‘오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 집 마련 등 다섯 가지를 포기한 2030세대)’, ‘장미족(장기 미취업자)’이라 자조적으로 일컬으며 하릴없이 바스라지고 있는 시대에 여든이 넘은 그는 서슴없이 ‘꿈’을 말하고 있었다.

김태창(82·사진) 전 일본 장래세대종합연구소장이 최근 고향 청주를 찾았다. 부산 강연 차 잠시 한국을 방문한 길이었다.

충북대 교수를 지냈지만 한국 보다 일본에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 그는 최근 공공철학공동연구소장, 수복서원장으로 25년간 맡아온 중책에서 자진 퇴임하고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함께 공공철학하는 모임 대표와 미래 공창신문 공동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구를 돌며 사람들과 만나 치열한 철학적 담론을 나누고 전 세계를 무대로 공공철학을 강연해온 바람 같은 사람. 그로부터 우리의 다음을 이어갈 장래세대와 현재 세대가 함께 ‘공공 하는 철학’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2일 라마다플라자 청주호텔에서 이루어졌다.

● 세계 57개국 돌며 300여회 포럼

- 한국에는 언제 어떤 일로 귀국하셨나요.

“지난 9월 22일 한국에 왔습니다. 부산에 있는 국립해양대 국제대학 부설 인문학강좌(학장 김태만 박사 주관)에서 강연을 마치고 다른 곳에 좀 들러서 청주에는 24일에 왔어요. 와보니 부모님 산소 관리도 해야겠고 청주에 남겨둔 집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몇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아직 돌아갈 날짜는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 청주에 오랜만에 오니 어떠신가요.

“이전에도 청주에 온 적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충북대에서 개최된 국제학술 세미나나 고 이상훈씨의 초대를 받아 경제포럼에서 강연하고 바로 돌아갔기 때문에 청주시내와 그 주변을 돌아본 것은 실로 25년 만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옛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눈에 비친 청주는 세계의 어느 도시와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현대도시의 풍모를 갖추어가고 있습니다.”

- 청주에서 충북대 교수로 재직하시던 중 갑자기 일본으로 가셨는데요.

“정년이 12~13년 정도 남았을 무렵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싶은 생각이 불현 듯 생겼습니다.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조부께서 가르쳐주셨던 입이불거(立而不居·어느 정도 이루었으면 거기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는다)의 정신을 실천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충북대 교수로 있을 때도 실질적으로는 반 이상을 외국에서 보냈었죠. 그러다 1989년 완전히 일본으로 옮겨서 아주 밑바닥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로 새 삶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 당시의 충북대에서는 꿈을 키울 수 없다는 실존적 고뇌에 시달렸었거든요.”

 

30여년 간 충북대에 재직했던 김 소장은 충북대 행정대학원장으로 있던 1989년 돌연 일본으로 떠났다.

도일(渡日)은 그가 본격적으로 공공철학에 대해 사유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충북대에서 행정학과와 정치외교학과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지만 항상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행정 철학, 정치철학, 국제관계 철학 등의 전공과목을 신설하고 가르쳤다.

- 처음부터 일본에 오래 머무를 계획이었나요.

“아닙니다. 애초에는 1~2년 정도 해외 연수를 하고 돌아온다는 생각이었는데 함께 일을 하자는 사람이 많이 생겼어요. 그 중 한 분이 동경대 법학부 교수로 후일 동경대 총장으로 선출된 사사끼 타케시씨 입니다. 동경대는 일본에서는 학문적 중심이며 세계적으로도 권위와 명성이 인정되는 대학 중의 대학입니다. 특히 법학부는 각계각층의 엘리트들을 키워낸 인재양성의 동력원입니다. 그곳에서 일본 연구를 계속하는 동안에 뜻밖에도 훌륭한 사람들과의 좋은 인연이 생기게 되었고 그 분들과의 공동작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일본에서 일하게 된 거지요.”

- 일본에 머무시는 동안 57개국에서 300여회가 넘는 포럼을 개최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25년 동안 매달 한 번씩 교토포럼을 개최해 왔습니다. 거기서 논의된 내용이 동경대 출판회를 통해서 30권의 책으로 나오기도 했고요. 주로 공공철학에 관한 내용입니다. 공공철학이란 새로운 철학인데 일반적인 철학과는 달라요. 사회과학, 인문과학,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종합학문이지요. 교토포럼에는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유명한 교수나 전문가, 시민단체 지도자. 기업 경영인 등 다양한 사람이 참가했고 개최 장소도 일본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이루어졌어요. 사사시 타케시 전 총장의 학계에서의 영향력과 권위, 야자키 카쓰히코라는 기업(주식회사 페리시모, 통신판매기업) 경영인의 재정적인 지원과 탁월한 조직 경영의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리고 각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20여명의 학자들이 창설멤버가 되었고 그 분들이 공공철학 대화운동이라는데 뜻을 같이 했으며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포럼을 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일본에는 학맥도, 인맥도 없었는데 이분들이 나서서 좋은 사람을 모으고 깨끗한 돈도 모아줘 한 달에 한 번씩 단절없이 계속 개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매달 포럼을 개최하시려면 비용도 상당할 듯 한데요.

“100개 기업이 조금씩 돈을 내 절반을 채우면 나머지 절반은 야자키 카쓰히코 대표의 회사에서 보탰습니다. 그 회사는 유엔에서도 그 공익성을 인정받은 바 있습니다. 그나마 일본 안에서만 했으면 돈이 덜 들었을 텐데 지금껏 지구를 세 바퀴 돌았으니까요. 저 자신이 예산 집행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액수를 잘 모르지만 대략 일본 내에서 할 때는 대체로 1회당 약 300만 엔 정도 들었고, 외국에 나가면 시기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진국에서는 공동 개최의 형식을 취해 예상보다는 돈이 덜 들었고 개발도상국에서는 전적으로 부담해야 해 오히려 많이 든다고 합니다. 엔화가 강했을 때는 환율 조건이 좋아 부담감이 덜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20여 곳에서 했는데 당시 물가가 저렴했기 때문에 예상 보다 훨씬 돈이 덜 들었어요. 한국에서는 서울대, 이화여대, 영남대에서 한 번씩 개최했고 그 후에는 주로 한국의 해당 분야 전문가들을 일본으로 초청해서 다른 나라의 학자들과 대화를 갖도록 했습니다.”

- 포럼은 주로 어떤 내용을 주제로 하나요.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 공공성에 관한 논의를 하는데 나라마다, 문화권 마다 다릅니다. 공공성을 여러 분야, 여러 각도에서 심층 논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재 세대의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새로 태어날 장래 세대와의 올바른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세 번째는 국가와 국민의 지나친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국경과 인종과 종교의 테두리를 넘어 모두가 함께 더불어 서로 행복해지는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나요?

“포럼은 3박 4일 동안 여비, 체재비 및 식사비를 모두 부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루에 세 사람씩 발표합니다. 각각 20분 발표에 1차 토론 60분이 이어져요. 그리고 이 세 사람이 발표한 것을 갖고 오후에 종합 토론을 90분씩 3번 합니다. 30여명의 참석자 전원이 원탁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는 것으로 토론자를 별도로 지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흘 동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꼬박 진검 승부를 합니다. 물론 점심시간은 1시간 마련되어 있고 사이사이에 10분씩 쉬는 시간이 있긴 합니다만. 특히 인선 과정에서 비종교성과 비정치성이 최우선 기준이 된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한국 사람이 주도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종교적, 정치적으로 수상한 모임이 아닌가하는 의혹을 사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금전적으로나 조직관련적으로 일체의 문제점을 사전 차단했던 것입니다.”

● ‘공공하는’ 철학

-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요?

“공공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최근에 많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서양의 것을 빌려다 쓰는 단계에서 끝나고 우리의 현실적 필요에 대한 의미있는 대응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서양에서 수입하고 서양의 학설이나 문헌을 번역해서 그것을 해설하고 거기에 자기 견해를 보태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저도 한동안 그랬었어요. 25년 간 공공철학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하는 동안 처음 10년의 논의를 통해서 이루어진 공통인식에 의하면 공공성이란 첫째. 국가관련성, 둘째 국민전체의 공통관심사, 셋째 국민 전체의 공통인식사항이라는 이념적 규범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공성이 아닌 공성(公性)이라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그런 논의들이 우리의 현실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게 됐어요. 좀 더 가까이 동아시아의 역사나 현실에서 재고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5년 정도 중국에서의 공공성의 문제가 어떻게 역사·문화적으로 정리됐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어요. 그리고 중국과 일본, 서양의 공공성에 대한 생각들을 비교하는 데 연구를 집중했지요. 그런데 저는 한국 사람으로서 역시 답답하고 미진한, 뭔가 채워지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0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국의 논의를 끌어다 놓게 됐어요. 그 당시에는 한국에서 공공성을 논의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에서 나온 공공 논의를 외국의 학자들에게 제대로 피력할 수 있는 분이 전무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우리 것을 너무 모른다고 안타까움을 실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과 중국과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이 힘을 합쳐서 우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 등의 문헌을 통해서 한국의 공공논의의 내용과 그 경위를 살펴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의외로 큰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고 밝은 전망이 가시화 되었습니다. 거기서 도출된 핵심적인 내용을 제 나름으로 정리하면 공공성이란 공평함, 공정함, 공명함이며 실천적 개념이라는 점이 그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공성의 철학이 아니라 공공하는 철학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에는 한국적 공공성이 어떻게 서술돼 있나요?

“우선 ‘공공(公共)’이라는 말 자체가 서양이나 중국, 일본의 어떤 문헌이나 기록에서 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에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영어권, 독일어권, 불어권, 아랍어권, 한자문화권을 넘나들면서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터득하게 된 것이 있다면 그 어느 경우에나 ‘공(公)’과 ‘사(私)’의 이분법적 발상이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공(公)’과 ‘공공(公共)’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공(公)’이란 국가와 정부 체제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사(私)’는 개인과 가정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공’은 국가와 개인을 아우르는 관계이고요. ‘공’ 중심의 사회에서 ‘공공’ 중심의 사회로 변화해야 민주화가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공공’이라는 것은 국가와 개인이 동등한 관계입니다. 서로가 상생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은 한없이 높은 것이고 ‘사’는 한없이 낮은 것. ‘공’은 항상 선하고 바람직한 것. ‘사’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바꿔서 ‘공’과 ‘사’ 양쪽이 다 값진 것이고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공공’입니다. 그런 관계가 조선조 500년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착실히 발전돼 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이것이 간언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옳지 못한 일을 할 때 목숨을 걸고 간하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신하는 때로 파직을 당하기도 하지만 때로 임금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새로운 길로 가게 되기도 하는데 이 처절한 과정이 눈물겨울 만큼 감동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체로 세 가지 형태로 납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뒤 김 소장은 종이를 빌려 “말로만 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며 한문을 써 가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 조상들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슬기로운데 우리 후손들이 그 지혜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었는데 25년 간 이 일을 하면서 이렇게 깨끗하게 문헌에 정리돼 있다는데 새삼 놀랐어요. 우선 세 가지만 예를 들면 첫째로 천하고금소공공(天下古今所公共). ‘천하 만민과 동서고금이 공공 하는 바’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기에 어긋나는 일은 삼가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근까지 서양에서 논의되고 일본에서도 빌려다 쓰는 ‘공공이성(公共理性)’ 개념 보다 훨씬 내용이 깊습니다. 서양의 공공성은 주로 공간적 합의가 강하지만 한국의 공공은 시간적, 세대간적 의의가 강조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개념이 일본, 서양 보다 먼저 우리나라 문헌에 나와 있다는 것에 저는 환희를 느꼈어요. 중국, 일본에서 이런 생각을 하기 훨씬 전에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이런 말이 오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렇게 해도 임금이 말을 듣지 않으면 ‘천하공분(天下公憤)’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천하 만민이 함께 분노하는 바입니다’라는 뜻이에요. 이것은 최근에 서양이나 일본에서 한참 논의되는 ‘공공감성(公共感性)’과 통합니다. 우리는 이미 몇 백 년 전에 이런 논의가 오갔던 것인데 중국 문헌을 찾아봐도 이런 내용이 없어요. 셋째로 ‘신인공분(神人公憤)’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데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분히 여기는 바, 어긋나는 일은 하지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최근에 와서야 서양이나 일본에서 주목을 끌기 시작한 ‘공공영성(公共靈性)’이라는 개념과 통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서양, 일본, 중국 보다 앞서 공공을 깊게 논의할 수 있었는데 왜 그것이 안됐는지 안타까워요. 다행히도 중국, 일본의 젊은 학자들이 이에 공감해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새로운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 학자, 언론인, 교육자, 정부입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저항하고 자기네 생각에 맞는 것만 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새로운 길을 열기가 아주 어려워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런 쪽으로 주목하는 사람들이 없었었거든요. 중국, 일본 것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생각하고 우리 것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 공공철학과 관련해 많은 강연을 하고 계신데 공공철학을 쉽게 정의 내려 주신다면?

“공공철학이란 자기와 다른 사람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철학. 공과 사가 공동하는 철학. 공이 사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가 공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백성이 주체가 되어 공과 사를 그 사이로부터 함께, 더불어, 서로서로 상생의 길을 열어 가는 철학입니다. 한마디로 공공철학은 상생하는 철학입니다. 또한 현재 세대와 장래 세대가 함께 더불어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철학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공철학입니다.”

 

● 청주인, 김태창

- 청주 사람으로서 청주가 지닌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청주에서 인생의 초기 3분의 1을 보냈고, 중기 3분의 1은 서양에서 보냈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일본과 중국을 왕래하면서 보냈고 이제 마지막 남은 인생을 한국에 돌아와서 보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 30년 정도 청주에서 사는 동안에 저의 몸 속 깊이 새겨진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공공철학의 3가지 키워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3가지 키워드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대화, 공동, 개신입니다. 먼저 대화하는 철학이란 입장이 다른 사람끼리 만나 의견을 나누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공동하는 철학이란 함께 힘을 합쳐 어떤 새로운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입니다. 대화와 공동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잘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신(開新). 지금까지 없었던 아무도 밟지 않은 새로운 길, 새로운 세계를 연다는 이 개신이라는 어휘에 대해서는 다소 생소했던 모양입니다. 이 말의 뜻에 대해서는 서양, 일본, 중국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면서 어디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바로 충북대가 위치한 청주 ‘개신동’에서 따온 말입니다. 충북대는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 세워졌어요. 당시의 충북도지사가 여기에 대학을 세워 젊은이들이 모여 들어 꿈을 키우고 사랑을 하고 미래를 여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는 뜻을 가지고 대학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행정력을 집중시켜 터전을 닦았어요. 그 대학이 큰 대학이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고 지금은 굉장히 번창한 곳이 됐어요. 저는 이렇게 발전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이거다 싶어 ‘개신’이라는 말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써 왔습니다. 한번은 동경대 교수 한명이 국제기구에 초청을 받아 아프리카 케냐에 가서 세계 농업 관계, 환경 관계 대표자들이 함께하는 회의에 참석했는데 공공철학을 피력할 필요가 생겼다며 개신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메일을 보냈더라고요. 그런 인연으로 그 회의에서도 개신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는 겁니다. 요즘 영어권에서 새롭게 ‘emergence’라는 어휘가 여러 분야에서 쓰이고 일본에서는 ‘창발’이라는 번역어가 쓰이고 있지만 이것도 정확하게 이해하면 개신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처럼 청주가 가진 문화적 재산을 잘 살려서 세계로 자랑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섭섭한 것은 우리 도지사나 시장이나 교육감이나 관련되는 책임자들이 이런데 눈이 안 떠있는 것 같아요. 청주가 가진 좋은 철학과 사상에 관련된 훌륭한 자원이 꽤 있는데 그걸 왜 세계에 알리려는 노력이 없는지 안타깝습니다.”

- 예를 들어 말씀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있지만 우선 3개만 들겠습니다. 개신동의 ‘개신’, 우암산의 ‘우암’, 무심천의 ‘무심’. 저는 세계와 더불어 철학 대화를 계속해 오는 동안에 스스로의 철학하는 자세를 3개의 키워드로 설명해 왔습니다. 첫째는 ‘개신하는 마음자세’. 항상 새로운 차원, 지평, 세계를 열어가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둘째는 우암처럼 조용히, 그러나 요지부동의 신념을 가지고 격랑을 헤쳐가는 마음 자세. 셋째는 어떤 것에도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무심의 마음가짐. 이 3가지가 모두 제가 값지게 여기는 철학적, 사상적 가치입니다. 저의 꿈은 우리나라가 군사적 강대국이 되어 세계를 호령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경제적 부강국이 되어 세계에 다니면서 돈 자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한없이 높고 귀한 학문과 문화의 향기 그윽한 나라와 백성이 되어 존경과 신뢰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자가 그렸던 ‘리인위미(里仁爲美)’의 경지이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청주가 아니겠습니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충북대 캠퍼스를 걸어보았습니다. 숲이며 나무며 건물이 미국이나 유럽의 좋은 대학 캠퍼스에 못지 않게 가꾸어져 있어서 아주 흐뭇했습니다. 대학 평가에서도 A등급을 받았다고 해서 저 자신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학문과 교육의 컨텐츠의 품질 관리가 중요과제가 되겠지요. 진정한 의미의 글로니컬(glonacal) 대학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삶의 현장에 충실하면서도 나라와 겨레의 얼을 잘 살리는 가운데 전지구적, 전인류적 가치 형성에 이바지하는 대학이 되어야지요. 그런 꿈이 충북대 캠퍼스에 가득 차면 아주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화적으로 존경받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존경받는 문화를 가꾸어야 해요.”

- 공공하는 철학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첫째로 나 혼자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남과 함께, 더불어, 서로 행복해지는 길을 찾게 해줍니다. 둘째로 확실성과 현실성만이 아니라 가능성에 도전하게 만듭니다. 요즘 사람들은 삶을 살 때 확실한 것만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다녀 뻥 뚫린 곳, 과거로부터 확실히 있었던 길만을 가려는 것입니다. 현실성도 중요하지만 항상 가능성을 중히 여기고 살자는 것입니다. 제가 올해 82세입니다. 사람이 20대는 미래를 생각하고 30~40대는 현재 밖에 모르고, 50~60대는 과거만 되새기고 살려고 합니다. 그러지 말고 20~30대에서 죽을 때까지 확실성을 소중히 여기면서 현실성을 감안하면서도 가능성에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삶이 싱싱해져요. 1989년 충북대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간다고 했을 때 한 친구가 저보고 “너 바보냐. 좋은 자리. 확실하게 보장된 신분. 현실적 수입이 다 마련돼 있는데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불안한 길을 가려고 하느냐”고 질타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난 그게 싫다. 확실성과 현실성에 안주하는 것이 싫다. 미래의 가능성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어요. 정말 말도 못 하는 고생을 했지만 충북대 교수 자리에 계속 안주했으면 65세 때 싫어도 퇴직을 해야 했겠지만 그때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열었기 때문에 지금도 저의 뜻대로 자유롭게 살고 있잖아요. 제가 나이에 비해 젊게 보이는 것은 좋은 화장품을 쓰거나 운동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항상 꿈을 갖고 있어서죠. 50년 전 미국에 유학 갔을 때 교수 연구실에 갔더니 연구실 앞에 ‘연령에 관계없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자는 늙은 자. 미래를 생각하는 자는 젊은 자다.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려면 들어오고 과거, 현재를 이야기하려면 들어오지 말라’고 써붙여 놓았더군요. 너무 마음에 들어 들어갔더니 교수님이 “너는 미래를 말하기 위해 왔냐”고 묻더군요. 그 교수님은 사실 10분밖에 면회 안 되는 분인데 그 자리에서 저와 2시간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넌 100명 중 한명 있을까 말까 한 미래를 말하기 위해 내 연구실 찾은 귀한 사람이다. 먼 한국에서 와서 나를 찾아준 것도 고맙지만 미래를 말하기 위해 찾아줘 정말 고맙다”고 하면서 금세 친숙하게 되었습니다.”

 

● 미래를 말하는 사람

- 세계미래연구협의회에서도 중요한 일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주로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세계미래연구협의회에서 1990년부터 5~6년 간 국제집행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세계를 다니면서 미래 연구를 권장하고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거기서 발표도 하고 토론도 하고 제안도 하는 것입니다. 1993년경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을 때 우크라이나 국립아카데미에서 초청을 받아 국립 우크라이나 대학에서 강연을 한 적 있어요. 그 때 한 여학생의 질문에 충격을 받았어요. 질문은 이렇습니다. “우리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는 과거 30년 동안 오로지 미래만을 바라보고 살아 왔습니다. 미래가 되면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긴 줄을 섰는데 자기 차례가 오면 빵이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게 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미래를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합니다. 먼데서 오신 선생님께는 실례되는 말이지만 선생님이 말하는 미래란 어떤 것입니까? 과거의 우리 지도자들이 외쳤던 것과 다른 것입니까?” 그래서 저는 “일본에서는 TV에 예쁜 아가씨가 나와 “저는 미래를 말하는 사람이 좋아요”라고 합니다. 미래가 가장 소중한 화두이고요. 그런데 우크라이나에서는 사기꾼, 거짓말쟁이라니 저도 마음이 안 좋습니다. 더 연구하겠습니다”라고 답을 하고 집행위원회에 가서 제의를 했어요. 보다 인간적인 미래를 생각하자고요. 그래서 장래세대 연구를 제안하고 일본에 가서 장래세대 연구를 시작했어요. 장래세대, 즉 이제부터 태어날 세대를 소중히 여기는 연구입니다. 최근 아동학대 등의 문제들은 모두 장래세대에 대한 책임감과 애정이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면 인류가 망해요. 우리만 살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자라 이 나라를 갈고 닦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장래세대에 무관심 할 수 있습니까. 이전에는 아예 장래세대 연구라는 말도 없었어요. 세계를 상대로 우리의 다음 세대 즉 장래세대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자고요. 이 모든 것이 충북대에서 날마다 오가던 개신동 벌판서 키워진 꿈입니다. 개신하는 철학. 새로운 세대를 열어가는 철학이 한국에서 나와 세계와 더불어 함께 열어가는 철학이 되도록 키우고 갈고 닦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일본의 철학으로 유명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몇 군데에서 상 준다는 것도 안 받았어요. 저는 청주에서 터득한 지혜, 충북에서 길러진 마음, 한 나라와 겨레얼, 그리고 세계를 다니면서 체감한 문제의식을 함께 융해시키는 철학을 하기 위해 삶을 엮어 왔습니다. 저 혼자서가 아니라 그때마다 그 자리에서 만난 타자와 함께, 더불어, 서로서로 대화, 공동, 개신하면서 너와 나와 모두의 삶을 더 알차고 풍요롭게 가꾸고 닦는데 온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하는 것이 안타까워요. 한국에서 한국말로 세계와 더불어 공유할 수 있는 철학으로 가꾸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더불어 함께 하는 동학들과의 공창(共創)의 장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청주에서는 찾지 못했던 겁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만날때마다 격려와 충고를 해주신 고마운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청주가 그리웠습니다. 특히 고 이상훈씨와 유성종 전 충북교육감 같은 분들은 제가 주재하는 교토포럼에도 오셔서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 최근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으로 국민들이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멀리서나마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일본도 동일본 대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일본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이때까지는 이성과 감성만 중시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영성을 중시하고 인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지성인들, 지도급 인사들, 시민들 사이에 많이 이야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문제를 남의 일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일로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인간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가. 인간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는데 무슨 뜻이 있는가. 이런 문제들이 이때까지는 3인칭적 문제 의식으로만 대두되었는데 이제부터는 1인칭의 문제의식으로 다루어져야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나 자신의 생과 사라는 구체적인 문제로. 이번에 한국으로 오기 직전에 일본에서 있었던 강연회에서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받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죽으면 바람이 되고 빛이 되고 말(언어)이 될거라고 대답했는데 그것이 솔직한 저 자신의 생사관입니다. 그래서 저의 귀중한 사람들 근처에서 어른거리면서 슬플 때 위안이 되고 실망했을 때 용기가 되고 추울 때 따스한 바람이 되려고 합니다. 개체 생명만 생명이 아니고 우리는 훨씬 더 크고 깊은 우주 생명에 의해 받쳐지는 것입니다. 저는 ‘김태창’이라는 이름과 얼굴과 몸뚱이를 지니고 살다가 기한이 끝나면 우주 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혼의 고향으로의 회귀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비극적인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나그네 길의 출발점입니다. 몸에 얽매인 삶에서 몸으로부터 해방된 새 삶으로, 생명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생사관을 일찍부터 마음에 가지고 살면 삶이 싱싱하고 빛이 납니다. 싱싱한 삶은 건강한 삶이고 빛나는 삶은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싱싱하게 살면 건강하게 사는 것이고 빛나는 삶을 살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과 죽음의 철학 즉 영성의 철학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공공철학은 나와 남이 함께 행복해지는 삶의 길을 열어가는 철학이라고 말씀하시는데 행복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요.

“다른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언제까지나 젊은 세대와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얼과 얼이 상통하는 대화를 계속할 수 있는 삶이 참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살아 왔습니다. 돈 많은 사람과도 사귀어 보았고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곁에도 있어 보았고 명성이 드높은 사람과 함께 일도 해 보았지만 그들이 별로 행복하지 못한 것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명령이 있고 복종이 있지만 진정한 대화가 없었습니다. 허전하고 공허한 삶 같았습니다. 사람이 살아 가는 데는 반드시 참된 대화가 있어야 함께, 더불어, 서로 행복해진다는 것이 저의 체험에서 묻어나온 실존적 영험입니다.”

- 지속된 경기 침체로 인해 청년 실업, 저출산 등의 문제가 양산되면서 삶이 팍팍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그동안 장래 세대에 대한 책임과 배려가 불충분했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미래 설계가 없었다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11번째, 12번째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됐지만 젊은 사람들의 상상력이 쇠퇴하고 있어요. 실망과 절망을 가득 안은 이들이 사회에 대해 부정적이 되고 냉소적인 사상에 물드는 것은 그동안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이 장래세대의 행복에 대한 고찰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현재의 문제만이 아니라 과거 경제 발전 설계에 장래 세대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GNP가 높은 순위에 오른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장 소중한 보배인 10~20대에게는 공감이 안 되는데. 다른 한 편으로는 이제는 시대가 조직의 시대에서 개인의 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조직에 들어가 취직하고 자기 생활을 설계한다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개인의 힘으로 생활 설계를 세운다는 생각으로 독립된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터넷, 스마트폰 등 문명의 이기를 활용해서 개인의 창의력으로 세계와 연결해서 생활자원을 개발하고 유통하고 축적하고 선용해야 되지요. 취직이 아닌 창직입니다. 자기 일을 스스로 열어 가는 것입니다. 과거에 만들어진 곳에 몸을 의탁하는 것은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적어요. 어차피 어려우니 발상을 바꿔 자신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 남에게 의뢰하지 않는 일을 찾는 겁니다.”

- 요즘 청년들은 공무원, 교사 등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자 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이제 공무원, 교사도 지금처럼 안정적이지 않아요. 21세기의 미래는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시대가 됩니다. 모든 것이 유동화, 불안정하게 되고, 불확실하게 됩니다.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거죠. 고체의 사회에서 액체의 사회로 변화하고 더 나아가 기체의 사회로 변할 것입니다. 이 변화는 급속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의뢰하지 않고 혼자 할 수 있는, 마이 웨이 정신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뜻과 바람을 갖고 자기의 길을 펴 나가면서 거기서 갈고 닦은 실력을 갖고 이웃을 돕고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서로서로 진정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삶의 길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에게도 실망, 비애는 있지만 슬기롭게 이겨나갈 수 있을 겁니다. 논어에서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지요. 저는 산도, 물도 아닌 바람을 좋아합니다. 바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도 아니고 어진 사람도 아니며 새로운 길을 찾아 여는 사람입니다. 바람은 형체가 없고 머무는 곳이 없어요. 항상 자유롭지요. 우리 딸이 어렸을 때 “엄마는 언제든지 옆에 있는데 아빠는 없잖아. 아빠는 도대체 뭐야?”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아빠는 바람이야. 바람인데 네가 필요할 때는 너에게 필요한 것을 해줬잖아. 아빠가 바람처럼 세계를 다니며 좋은 옷, 장난감을 많이 사다 줬지 않냐. 학교에 가서 자랑도 했잖아”하고 말했어요. 그 아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도 “아빠는 바람”이라고 합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를 좋아해요. 확실한 것만 좋아하는 겁니다. 물은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지요. 현재를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은 미래를 여는데 주력합니다. 미래는 바람처럼 언제 어디서 홀연히 나타날지 몰라요. 항상 열려있는 것, 그래서 ‘이거다’라고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 그것이 미래입니다. 저는 죽어도 땅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묘도 만들지 말라고 했어요. 살아서 항상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어야 했고, 그래서 땅에 묶여 있었는데 죽어서까지 땅의 속박을 받고 싶지 않아요. 바람이 되어 전 우주로 날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죽으면 화장해 하늘에 뿌려 달라고 했어요. 일본에서 5년 전부터 인기 있는 노래가 있는데 ‘천의 바람을 타고’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 선생님이 늘 바람을 말씀하셨는데 선생님의 사상을 노래로 한 모양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넬라 판타지아’도 자유로운 영혼을 그리고 있어요. 요즘 저도 그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가지고 젊은 사람들에게 호소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지난 6일 충북대에서 이와 같은 내용으로 젊은 세대들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 젊은 시절의 박사님도 취업에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나요?

“저도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직할 자리를 찾지 못해 무척 괴로웠습니다. 한국동란의 직후라서 사회 전체가 가닥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다 할 일자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노는 아픔을 잘 압니다. 할 수 없어 미군부대를 찾아갔습니다. 청주에 와 있던 사령관을 만나 내가 대학을 나왔는데 취직이 안 된다. 혹시 여기서 일할 만한 것이 있겠냐고 물었지요. 전혀 안면도 없던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러면 통역을 할 수 있겠냐고 해서 하겠다고 했지요. 어느 날 약속을 해서 어디론가 갔어요. 일개 사단이 모였는데 무슨 얘기인지 도무지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그래서 기지를 발휘했지요. 대개 미국 사람들이 유머를 잘 하지 않습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제가 솔직히 무슨 말씀인지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저 여러분들이 웃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더니 황당해 하며 웃더라고요. 그러니까 사령관이 지금까지는 아무리 얘기를 해도 자기 유머를 알아듣지 못해 통역이 시원찮다고 생각했는데 저 사람들이 다 웃는 것을 보면 실력이 좋은 것 같다고 하면서 저에게 통역을 시키더군요. 그렇다고 연설이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은 편했고 월급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미군들이 먹는 여러가지 먹거리들을 풍족하게 제공해주어서 실생활에는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청주공고에 계시던 교장선생님이 와서 영어를 가르치라고 해서 갑자기 취직이 됐어요. 그 후에 모교인 청주고로 가게 됐고, 거기서 입시반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서울대에 많이 붙으니 소문이 나서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모아 영어를 가르치게 됐어요. 그러다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에서도 일하게 됐어요. 미국 연방 정부와 한국 정부가 협력을 통해 한국의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취지로 서울과 각 도마다 있는 미국연방정부기관이었어요. 저는 충북파견실에 있었지요. 이곳에서 월급을 많이 받았지만 여기서 일평생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미국 정부의 장학금 시험에 합격이 돼 주한미국경제협조처를 그만두었지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주한미국경제협조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아주 즐거운 생활이었어요. 나의 82년의 인생 중에서 미국에서 보낸 5년이 가장 즐거웠고 해피한 시절로 기억됩니다.”

- 7개 국어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세계 도처에서 일을 하려니 그랬겠지만 저는 학생 때부터 번역을 통해서 읽는 것을 싫어했어요. 원어로 읽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전쟁 중이었는데 당시 서울 국립도서관에 있었던 외국의 귀중한 책들이 나와 싸게 팔렸어요. 그래서 보통 때는 살 수 없는 귀중한 책을 싸게 살 수 있게 되었어요. 평상시 좋아했던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셰익스피어 등의 책을 몇 권씩 무더기로 샀어요. 단테의 ‘신곡’을 원어로 읽고 싶어 이탈리아어도 배우고,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고 싶어 독일어도 배웠어요. 번역본이 시원찮은 이유도 있었지요. 당시 기억력이 아주 좋아 놀랍게도 바로 머리에 들어왔습니다.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는 바람에 치질에 걸리기도 했어요. 7개 국어의 단어들을 적어서 화장실 벽에 붙여 놓고 다 외워야 나오곤 했거든요. 누이동생들이 난리였어요. 젊을 때 공부해둔 것이 나중에 국제 생활할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보통 영어, 불어, 일본어를 제일 많이 쓰고, 독일어,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 등은 책을 읽을 수 있어요. 중국의 문헌은 읽지만 말은 잘 못해요. 중국에서는 동경대의 친구가 소개해준 아주 훌륭한 통역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김 소장은 현재 일본 오사카에서 아내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 하나뿐인 딸은 일본에 가기 전 미국으로 이주하고 거기서 결혼했다. 딸이 마흔이 넘어 낳은 두 살짜리 손자와 영상전화를 하는 것이 요즘 하루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는 “이때까지 누구를 위해 죽는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손자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건강 비결은 항상 꿈을 지니고 사는 것. 그리고 소식하는 것이다. 그는 아침 식사로 간편하고 몸에도 좋다고 하다면서 일회용으로 포장된 낫또를 권하기도 했다.

- 하루 일과를 말씀해 주신다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오전 4시에 일어나요. 책을 1시간 30분 정도 읽고 밖이 환해지면 나가서 40분 정도 산보를 하고 돌아와 목욕을 하고 아침을 먹고 TV를 보고 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그날의 일을 하지요.”

- 포럼 활동 외에 현재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나요?

“강연을 하고 그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친구가 신문에 내주고 있습니다. 그 신문의 이름이 미래공창신문이고 발행인 겸 편집인이 야마모토 쿄시라는 동지입니다. 일본 전국 각지를 다녀요. 요새는 네 시간 이상 시차가 나면 몸에 지장이 오기 때문에 그 이상의 시차가 있는 외국에는 가지 않기로 해서 미국에 있는 손자도 영상전화로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 한국,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국외활동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의 가능성에 도전하자. 둘째는 군사 대국이나 경제 대국을 지향하기 보다는 문화대국을 지향하자. 우리의 문화적인 콘텐츠를 가지고 세계와 승부하자. 경제와 군사는 그것을 뒷받침할 정도로 충분하다. 셋째는 특히 젊은 분들에게 이미 있는 조직에 취직을 해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홀로 서는 생활 설계, 미래 설계를 하는데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지금은 조직의 시대로부터 개인의 시대로 바뀌는 전환기적 상황이고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경쟁이 승패를 가늠하는 시대니까. 사이버 기술 제품이 많지 않습니까. 스마트폰, 아이패드 등 첨단 기기를 한껏 활용해 무한대의 가능성을 가진 속에서 자기 미래 설계를 하고 공유하는 동지를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찾아라. 그러면 국경, 민족, 종교를 넘어 동지가 반드시 어딘가에 있다.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82년을 실제로 살아온 제 자신의 생활 체험을 통해 느낀 일이고. 젊은 세대에게 권하고 싶은 삶의 방식입니다.

- 동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어렵지 않나요?

“물론 어렵지요. 어려움을 이겨내는 담력이 있어야 해요. 근육형의 건강이 아니라 영적인 건강이 있어야 합니다. 제 경우 예를 들면 동경대학에 A라는 교수와 일하고 싶은데 소개 받기가 쉽지 않아 무작정 그 사람이 발표한 논문이나 책을 열심히 읽고 나서 편지를 보내 내가 당신의 책, 논문, 수필, 강연까지 듣고 보고 읽고 생각했다. 꼭 만나서 한 번 얘기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합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왔어요. 당신 같은 사람하고 만나지 않으면 누구와 만나겠냐. 호텔 어디에서 만납시다라고요. 한, 두 시간 이야기를 했더니 “같이 일합시다”하는 겁니다. 이렇게 자신이 방법을 찾아야 해요. 중국에서 강연할 때는 한 학생이 “솔직히 선생님 철학은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남성의 철학이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감이 드는데 여성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하더군요. 그 말에 자극을 받고 궁리하고 있던 중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고 개최했던 포럼의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우연히 동석하게 된 두 사람의 여성학자들이 기꺼이 저의 철학을 여성화 시키는데 협력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서 좋은 철학 대화의 파트너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참 많이 도움을 받았어요. 그리고 한 2년 정도 후에 중국의 여자대학에 가서 강의를 했는데 제 철학에서 여성에 대한 배려가 많이 느껴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동지는 그렇게 찾는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내 앞에 선 것은 82세의 석학이 아닌 열정으로 가득 찬 명랑한 젊은이였다.

원서가 읽고 싶어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외국어 단어를 암기했던 10대의 김태창. 청년 백수 생활을 견디지 못해 무작정 미군 부대를 찾았던 20대의 김태창. 미국과 유럽의 학문을 흡수하고 소화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30대와 40대의 김태창. 지위와 안정, 경제적 여유가 보장된 교수직을 벗어던지고 혈혈단신 일본으로 떠나 새로운 삶을 모색했던 50대의 김태창. 지구 세 바퀴 반을 돌며 전 세계인들과 함께 3박4일의 ‘끝장 토론’을 했던 60대와 70대의 김태창. 바람처럼 자유로운 가운데 늘 도전하고 개신했던 시간들은 그를 생생하게 빛나게 했다. 82세 청년과의 대화는 유쾌했다.

 

김태창 전 일본 장래세대종합연구소장은…

△1934년 청주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정치학 박사. △충북대 교수,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역임 △일본동경대학, (경도)국제일본학연구센터 객원교수, 북구주대학 교수, 구주여자대학 교수 겸 문학부장 역임. △일본 장래세대종합연구소장, 공공철학 공동연구소장, 수복서원 원장 역임. △현 미래공창신문공동편집인, 한중일이 함께 하는 공공 철학모임 대표. △청주시 문화상, 충북도 문화상,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글로벌 장래세대포럼(40회), 공공철학 교토포럼(120회), 재일본외국유학생포럼(30회), 일본 내 유명대학 순회 교토포럼(10회) 등 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