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소설 당선작<류희병-회전목마>

2015-12-21     조아라 기자

회전목마

 청운고시원. 푸른빛을 띤 구름. 이름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구름인 이상 빨강이든 파랑이든 노랑이든 덧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거창한 입신출세의 뜻을 품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군사부일체가 고물상으로 팔려간 지도 한참이 지난 이 시대에, 기껏 훈장노릇이 무슨 높은 벼슬이라고 청운의 꿈을 운운하겠는가. 무보증에 월 15만원, 밥과 김치제공. 푸른빛의 구름이라는, 출세의 의미와는 별개로 어딘가 모르게 탈속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그래서 뭔가 몽롱한 느낌마저 주는 이름에는 걸맞지 않게,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로 그는 이곳을 선택했다.
 오래 머물 곳은 못되었다. 이곳에 머무는 누구도 자신이 이곳에 오래 머물 것이라 믿는 사람은 없었다. 오래 머물지 않으리라는 믿음과 의지만이 이곳에 머물게 하는 힘이었다. 자신의 삶은 고시원 바닥을 전전하는 인생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확신이 그들 모두의 눈빛에서 번뜩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관계란, 서로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는 것일 뿐이었다.
 벽 쪽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옆방 녀석이 또 여자 친구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벽이라고 해봐야 얇은 합판을 잇대어 놓고 그 위에 벽지를 바른 것이 전부였다. 그들의 입맞춤과 몸놀림 하나하나가 전해지는 듯했다. 그래도 딴에는 신경이 쓰였는지 최대한 소리를 자제하려는 듯 했지만 오히려 꾹꾹 억눌러서 짓이겨진 숨소리의 파편에,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보다 더 신경이 거스러졌다. 이런 젠장, 이게 무슨 민폐란 말인가. 여기가 자기들 안방도 아니고.
 고시원에서는 기침을 하거나 방귀를 뀌는 것도 법도가 있었다.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삼가고 슬기롭게 조절해야 했다. 알레르기성 비염을 앓고 있는 자신도 처음에는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다. 재채기가 한 번 터지기 시작하면 적게는 서너 번, 대개는 예닐곱 번, 많게는 열 댓 번 씩 연달아 속사포를 쏘아대는 형국이니 눈치가 안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개발한 방법이 ‘이 악물고 재채기하기’였다. 재채기할 때 입술만 살짝 벌린 채 이를 악물고 재채기를 하게 되면 그 폭발력이 대부분 콧구멍으로 빠져 나가게 된다. 대포 대신 소총을 쏘는 격이었다. 소리는 작아지지만 콧구멍이 얼얼하고 귓구멍이 먹먹한 것을 감수해야 했다.
 옆방에서 전해지는 진동이 점점 강해졌다. 성질 같아서는 주먹으로 벽을 한 번 쾅, 하고 치고 싶었지만, 저밖에 모르는 인간에 대한 분노보다는, 사랑을 나눌 그럴듯한 공간조차 부재한 가난한 청춘남녀의 현실이, 주먹질을 포기하게 했다. 이것도 수양이거니 싶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옆방의 끈적끈적한 진동과 함께 타고난 상상력까지 발휘되자 어느새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랫도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입대하기 전 소주잔을 나누던 어느 날, 예비역 선배가 해준 말이었다. 그래, 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 반듯하게 누워있던 그의 몸은 반원을 그리며 옆방 쪽으로 회전했고 그의 귀는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한 손은 잔뜩 성이 난 아랫도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선영이의 커다란 가슴이 감은 두 눈을 채웠다. 밀가루처럼 뽀얗고 전라도 밥상처럼 푸짐한 가슴이었다.
 선영이를 처음 만난 곳은 창작문학회 동아리방이었다. 동아리방이 썰렁해서 자주 오지 않았는데 이젠 자주 와야겠다고 선영이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똑같이 백석이었다. 찰떡궁합이라고 생각했다. 선영에게 왜 백석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잘 생겼잖아요. 젠장, 개떡궁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전형적인 말상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말대가리라는 놀림을 귓구멍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다. 말상은 집안에서 대물림된 전통미의 구현이자 부친이 물려준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걸 한 마디로 딱 표현하면 ‘숙명’이 되겠다.
 비가 왔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면 막걸리에 파전이 제격이니까. 이런 날은 도서관에 앉아 있어봐야 공부가 되지 않았다. 선영이가 따라 나섰다. 마른안주와 진안주를 두루두루 갖추고 있으나 그래도 역시 파전 맛이 일품인 일미집으로 갔다. 새내기 시절부터 단골집이었다. 비가 오고, 선영이가 있고, 주인아주머니의 푸근한 인심까지 곁들여져 술맛은 달았다. 아주머니의 뜨거운 환대 속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단골에 대한 반가움과 나무람이 뒤섞여 있었다. 과음할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선영이도 분위기에 취해 술이 과했던 탓인지 해닥사그리해 보였다. 술자리를 파하고 일어설 때 선영이가 휘청했다. 연오는 빗줄기를 뚫고 선영이를 집까지 부축해 주었다. 집 앞에서 선영이가 두 손으로 그의 볼을 감쌌다. 
-아이 귀여워. 선배는 정말 귀여워요. 귀여운 망아지 같아.
 백석이 잘 생겨서 좋다며. 난 말상인데.
-선배랑 나랑 네 살 차이에요.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데. 엄청 잘 맞아서.
 선영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그는 입술을 열고 혀를 내밀었다. 빗물에 젖은 선영의 몸에선 갓 쪄낸 찐빵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고 선영의 혀는 팥 앙금처럼 달았다.

 볶음밥을 시켰다. 청운고시원은 3층이었고 바로 아래 2층이 자금성이었다. 아침은 대개 헤실헤실한 고시원 밥과 시어터진 고시원 김치로 때우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은 자금성으로 내려와 볶음밥을 먹었다. 가끔씩은 그렇게 기름이 당겼다. 볶음밥을 우겨넣고는 전철을 타고 노량진으로 갔다. 오전 중에 전공국어 수업을 마치고 컵밥으로 점심을 때우고는 다시 교육학 수업을 들었다. 올해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붙어야 했다. 그래야만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테니까. 어설프게 공부하다가 작년처럼 실패할 수는 없었다. 상반기에는 교과교육론과 문학 위주로 공부를 진행했다. 이제부터는 문법과 교육학에 전력투구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쉽게 이별하면 안 되는 거였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의 무게가 그렇게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달랑 문자 한 통으로 이별을 통보하다니. 서로 격려하며 함께 공부하던, 아껴주며 사랑하던, 그런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작년에는 붙었어야 했다. 그럼 아마도 선영이와의 이별은 없었을 것이다.
 큰샘학원에 도착해서 가방을 교무실에 던져놓고는 창가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밤 10시까지 수업이 빡빡했다. 오늘은 회식까지 예정되어 있어 공부하기는 다 틀렸다. 생활 때문에 그만둘 수는 없고, 전임강사가 아닌 파트강사라면 개인 시간이 좀 나겠지만, 그 정도 벌이로는 아버지 약값도 대기 어려웠다.
 휴대폰이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어머니였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조선시대 같았으면 열녀문을 하사받았을 양반. 한숨이 나왔다. 온몸이 늪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허우적대면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

 그날따라 엄마는 일도 나가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누워만 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하고 일찌감치 미장원으로 달려가 손님 맞을 준비를 하던 엄마였다. 어린아이의 눈치로도 뭔가 낌새가 다르다는 건 느낄 수 있었으나 살짝 가늠이라도 해보기 위해 슬쩍 말을 던졌다.
-엄마, 밥 줘.
-학교 가다가 빵 사먹어.
 엄마는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건네고는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지폐와 책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배는 고팠지만 입맛은 당기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엄마가 저렇게 누워 있는 걸까. 몸이 아픈 것 같지는 않았는데. 느닷없이 드러누운 엄마의 뜻밖의 행동에 생각이 이리저리 가지를 뻗다보니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으나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는 아직도 누워 있었다. 여동생 연지의 입가에 짜장이 듬뿍 발라진 것을 보니 아마도 엄마가 밥 대신 짜장면을 시켜준 모양이었다.
 전화가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연지가 자그마한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아빠야? 나 짜장면 먹었어. 먹고 싶은 거? 바나나.
 통화를 끝낸 연지는 아빠가 바나나를 사 오실 거라며 겅중겅중 뛰었다. 그는 겅중겅중 뛰지 않았다. 동생과는 달리 자신은 어엿한 학생이었으니까.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연지와 함께 대문 앞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일찍 귀가한 주인집 아저씨가 우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바나나를 들고는 약간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어라, 주인아저씨도 바나나를 사왔네. 오늘은 바나나 먹는 날인가 싶어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어둠이 꽤 짙어졌을 때, 술기운에 얼굴이 벌게진 아빠가 기다림에 눈알이 빨개진 아이들 앞에 나타났다. 연지가 물었다.
-아빠, 바나나는?
-바나나는 무슨 바나나?
 연지의 눈에 커다란 실망의 눈물이 매달렸다. 그는 바나나를 들고 들어가던 주인집 아저씨가 떠올랐다. 하나뿐인 딸내미에게 지극정성인 아저씨였다. 그제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주인집과 전화가 혼선되었고, 주인아저씨는 연지를 딸내미로 착각했다는 것을. 하루 종일 누워만 있던 엄마가 아빠에게 달려들었다. 새청맞은 소리를 지르며 눈에는 시퍼런 독기까지 흘렀다. 아빠와 엄마가 싸우는 동안, 연오와 연지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그렁그렁한 서로의 슬픈 눈을 바라보며 소리죽여 훌쩍이고 있었다.
 아빠에게 엄마 말고 다른 여자가 있다고 했다. 공사장 인근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라고 했다. 엄마는 당장 이혼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끝까지 이혼하지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이혼을 하냐는 거였다.
 집에 불이 났다. 아빠는 공사장에, 엄마는 미장원에, 연오는 학교에 있을 때였다. 아직 학교 갈 나이가 아니어서 집에 혼자 있던 연지는 성냥불 장난을 하다가 불을 내고 말았다. 화마는 집과 연지를 모두 삼켜 버렸다. 그때, 아빠는 떠나갔다. 막아설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엄마와 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연오를 남겨둔 채였다. 
 
 대학 후배인 현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머리도 식힐 겸 자신이 일하는 곳에 한 번 놀러오라는 것이었다. 현준은 서울 근교의 한 소도시에 있는 유원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연오는 큰 맘 먹고 짬을 내어 현준을 찾아갔다. 내일 오전에 수강해야 할 수업은 없으니, 저녁에 술 한 잔 마신 후 자고 오더라도 출근시간까지는 학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퇴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이럴 때는 학원강사도 괜찮은 직업이구나 싶었다.
-뭔 바람이 불어서 바쁜 사람한테 자꾸 만나자고 전화질이야.
-형이 미치도록 보고파서 그랬지.
 넉살좋게 받아넘긴 현준은 키득거리며 까투리웃음을 웃었다.
-장사는 잘 되냐?
-잘 되긴 개뿔. 누가 이 촌구석까지 와서 돈 내고 오리배를 타겠어. 사장이 완전 또라이라니까. 그래도 나한테 다 맡겨놓고 나 몰라라 하니까 몸도 마음도 편하긴 해. 직원도 달랑 나밖에 없거든. 이건 알바가 아니라 내가 완전 사장이야. 낮에 일하고 밤에는 쉬니 몸에 무리 안가고, 낮에도 손님이 없어 한가하니 짬짬이 공부할 시간 많고, 붙박이로 있으면서 숙식까지 해결되니 경제적이고, 그러니까 한 마디로 돈과 시간을 다 벌 수 있는 곳이야. 이만한 알바 구하기 힘들지. 어떨 때는 임용고사 때려치우고 여기다 확 뼈를 묻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니까. 참, 그러고 있지 말고 구경이나 하고 있어. 안주 만들던 거 마무리할 테니까.
 연오는 유원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유원지란 이름마저 낯 뜨거운 궁뚱망뚱한 곳이었다. 그냥 호수에 구저분한 오리배 몇 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회전목마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졌고 시뻘건 녹까지 슬어 있어 굴타리먹은 참외나 수박 같았다. 자신을 부르는 현준의 목소리에 연오는 발길을 돌렸다.
-회전목마가 있던데?
-아 그거, 하도 손님이 없으니까 회전목마라도 있으면 좀 나을까 싶어서 사장이 설치했는데 있으나 마나야. 솔직히 나 같으면 돈도 안 되는 이깟 놈의 거 다 때려치우고 차라리 조그만 식당이라도 하겠다. 도대체 사장 속을 모르겠다니까. 그래도 뭐 이유가 있겠지.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회전목마 그거 작동이나 제대로 되는 거냐? 관리가 전혀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래도 돌아가기는 해.  
 그들은 주위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외등 불빛에 의지해 소주를 마셨다. 확실히 서울보다는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술잔을 거듭 비워냈는데도 취하지가 않았다.
-임용고사 준비는 잘 되냐?
-그냥 하는 거지 뭐. 그래도 형은 국어니까 좀 낫지. 역사는 얼마 뽑지도 않고 정말 큰일이야.
 잔을 비워낼수록 병은 쌓여갔다. 술기운에 목소리가 커진데다가 주위의 적막까지 더해져 두 사람의 대화는 총격전처럼 시끌시끌했다. 소주에 흠뻑 젖은 두 사람의 가슴에는 불이 활활 타올랐다. 다 타서 먼저 재가 되어버린 현준이가 모로 쓰러져 군드러졌다. 한 잔 더 하려 했으나 소주병은 다 비어 있었다. 머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휘청하며 화장실에 갔다. 오줌을 시원하게 갈기고는 손을 씻는데, 무심코 거울을 들여다보던 연오는 흠칫 놀랐다. 아버지가 그 속에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를 빼다 박은 자신이 그 속에 있었다. 저놈의 말상. 천형과도 같은 저 대물림. 불쾌감으로 기분이 거스러졌다. 재빨리 그곳을 나섰다. 기분전환을 위해 달빛에 젖은 호수와 오리배를 구경했다. 회전목마가 눈에 들어왔다. 죽어라 달려도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는 회전목마가 자신과 닮았다. 생김새마저도 말상인 자신을 쏙 빼닮았다. 칠이 벗겨진 목마들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이빨을 드러내며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힘들구나. 너희들도 힘들구나. 연오도 가슴 속에서 뭔가 덩어리 같은 것이 솟구치는 듯싶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입을 한껏 벌렸다. 땅바닥에 웅크린 채 토사물을 게워내는 연오의 모습을 목마들이 소리 없이 울부짖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강의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 비 온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교무실 책상서랍에 접이식 우산 하나가 있었다. 비 올 때 쓰고 왔다가 비 그친 후 두고 갔던 우산이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서둘러 우산을 챙겨 가지고 지하철역을 향해 재게 발을 놀렸다. 보아하니 지나가는 비가 아니었다. 빗발이 거세지기 전에 고시원 침대에 몸을 눕히고 싶었다.
 전철 안에는 제법 승객들이 많았다. 피곤했지만 차라리 잘 된 거였다.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가 졸기라도 하면 저번처럼 할증요금까지 내가며 택시를 타야할 지도 몰랐다.
 역사를 빠져 나오니 빗줄기가 아스팔트 위를 마구 두드려 대고 있었다. 바지런히 길을 줄이고 있는데 한 여자가 상가 건물 입구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가끔씩 담배를 사기위해 들르던, 고시원 근처 편의점에 근무하는 여자였다.  아마도 비가 쏟아지기 전에 우산 없이 나섰다가 저리 된 모양이었다. 이미 온 몸이 홈빡 젖어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라 멋쩍기도 해서 그냥 지나칠까 어쩔까 하는데, 눈이 마주쳤다. 그 눈길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불쑥 말을 내뱉었다.
- 우산 같이 쓰실래요?
- 아니요, 괜찮아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편의점 여자가 대답했다. 꼴에 비싼 척은. 발길을 돌리려는데 한기가 든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 부담 갖지 마세요. 집이 이 근처면 제가 집까지 바래다 드리고, 지하철을 타실 거면 역까지만 씌워 드릴게요.
- 그럼, 염치없지만 신세지겠습니다.
 한쪽 어깨가 젖는 것도 무릅쓰고 최대한 여자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지만 그리 크지 않은 우산이라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서로의 몸이 밀착되었다. 달착지근한 살 냄새가 코끝에 스몄다. 앳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앙다문 입술에는 어떤 강단이나 오기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선명한 눈썹 아래의 시원스런 눈매를 또렷한 콧날이 떠받치고 있었다.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아차, 싶었다. 황급히 시선을 떨구었다. 자신 같은 말상이 쳐다보면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뭐 어쩌겠는가. 말상인 게 죄지.
 어라, 이쪽은 고시원으로 가는 길인데. 불과 오십 걸음 쯤 앞에 청운고시원 간판이 보였다. 여자의 집이 이 근처인가 보았다. 멀리 돌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다 왔으니 괜찮다고 여자가 말했다. 자신도 이 길로 가야 하니 상관없다고 연오는 말했다.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할 수 없다는 듯 여자가 걸음을 떼었다. 청운고시원 앞에서 여자가 걸음을 멈췄다.
- 어, 여기 사세요?
- 네.
 여자가 부끄러운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아니 그게, 실은 저도 여기 살거든요.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시 서 있다가 동시에, 웃었다.

 어쩌다 한 두 번은 마주쳤을 텐데 왜 여태 몰랐을까. 하긴 무리도 아니지.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옆방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는 게 고시원이니까. 설사 누군가와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이곳의 불문율이었다. 베풀 수 있는 친절과 배려라면 소음을 최대한 줄이고, 복도에서 맞닥뜨렸을 때 상대방이 편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먼저 벽에 찰싹 등을 붙이고 서 있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이상의 호의와 관심은 민폐고 실례였다. 여자의 얼굴을 기억 못하는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본 듯 만 듯 스쳐지나갔기 때문일 거였다. 본의 아니게 우산으로 맺어진, 어쨌든 인연은 인연이기에, 이제는 본 척 만 척 할 수가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인사를 보내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웃음으로 답했다. 그 눈인사와 눈웃음이 엉그름처럼 갈라진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빗물 같았다.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와 터덜터덜 걸음을 걸어 고시원에 도착했다. 좁다란 복도를 걸어 자신의 방문 앞에 열쇠를 뽑아들고 섰다. 문고리에 비닐봉투가 걸려 있었다. 뭐지. 봉투 안에는 담배 한 갑과 삼각 김밥, 캔 커피 한 개가 들어 있었다. 담배는 자신이 즐겨 피우는 제품이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어떻게 보답을 할까 고민하다가 보잘 것 없는 물건 몇 개 넣었어요. 비 오던 날 베풀어 주신 친절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진이 드림>

 귀엽네. 입꼬리가 살짝 치올라가며 미소가 번졌다. 땅을 적시는 단비처럼, 땀을 식히는 바람처럼, 인연이, 관계가, 반가웠다. 선영이를 잃은 후 처음으로 연오의 가슴은 달뜨고 있었다.

 손바닥을 내밀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아버지가 황소숨을 몰아쉬며 손가락 끝으로 자모를 적어나갔다. ㄷ, ㅗ, ㄴ. 돈! 학원에서 그 정도 돈은 버니까 병원비는 걱정 마시라고 했다. 오랜 투병으로 겅더리된 아버지는 자식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평소에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몰래 자식의 모습을 훔쳐보던 아버지였다. 의외였다. 연오는 그 시선을 감당할 수 없어 고개를 외틀었다. 아버지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다. 이제 어머니가 고생 안하고 편하실 테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 역시 부친이 살아온 인생의 성적표일 거였다.
 다시 돌아온 아버지는 병주머니였다. 당뇨병이 심한 상태였고 합병증으로 신장까지 안 좋아져서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받아야 했다. 비록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진상이라며 손사래를 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받아들였다. 처자식 버려두고 소식 두절한 채 십 수 년을 넘긴 아버지였다. 돈 떨어지고 몸 병들어 애인에게 버림을 받고 나서야 가족을 찾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었던 그는 아버지와 말을 섞지 않았다. 한두 마디씩 말을 걸어오던 아버지도 자식한테서 일절 대꾸가 없자 그저 아들을 구메구메 훔쳐볼 뿐이었다. 그러다 아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는 도망치듯 발길을 돌렸다. 그럴 때면 자신도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마음을 더 단단히 조였다. 병원에 가는 날이 아니면, 아버지는 꼬박꼬박 어머니의 미장원을 들렀다. 일을 거들려는 것은 아니었다. 눈치껏, 어머니가 바쁠 때는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다가 손님이 없어 한산해지면 툭, 말 한마디를 던졌다.
 돈 줘.
 만 원짜리 지폐 한두 장을 얻어 기원에 가서 내기바둑을 두는 것이 아버지의 여가생활이었다.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일을 할 때도 손에서 화투짝을 놓아 본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가위질을 하며 자식을 뒷바라지했던 어머니는, 독한 파마 약에 취해가며 그런 아버지를 뒷수발해야 했다. 미장원은 그렇게 낡아갔고, 어머니는 그렇게 늙어갔다. 어머니가 불쌍할수록, 아버지가 미웠다.
 권세 있는 집안도 아닌데다가 삼일장 중 첫날이라 문상객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정 무렵이어서 더더욱 한산했다. 어머니가 머르레하게 앉아 있는 연오에게 다가왔다.
-더 올 사람도 없는데 상주도 한 잔 하고 눈 좀 붙여야지.
 연오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상머리에 앉았다. 어머니가 소주병을 비틀어 한 잔 따라주고는 돼지고기 편육과 새우젓, 육개장을 내왔다. 어머니의 얼굴은 무척이나 늙어 보였다. 아버지에게 고마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나마 이 정도에서 어머니를 놓아 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난고난 하면서도 질기디 질긴 게 사람 목숨이지만은, 사실 난 이번에 네 아버지 세상 뜰 줄 알았다. 죽기 삼일 전인가 사일 전인가 꿈을 꿨는데, 그 양반이 사진기를 들고는 나 사진 찍어 준다고 자꾸 웃으라고 하더라. 그래 내가 가만히 서서 웃고 있는데, 아 글쎄 죽은 연지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섰지 뭐냐.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애를 왜 죽었다고 생각했을까 싶어서 막 이름을 부르려는데 잠이 깨버렸다. 깨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아무리 애비 노릇 못한 인간이지만 연지가 그래도 지 애비라고 저승길 가는 거 마중 나온 거로구나 싶더라. 그래 내 이 인간 갈 날이 얼마 안 남은 줄 알았지. 그래도 네 아버지 양심은 쬐금 있었던 게지. 꿈속일망정 가기 전에 사진을 다 찍어주려고 했으니. 나한테 죄지은 거 조금이나마 죄갚음하고 가려고. 안 그러냐.
 덧없는 꿈속에서라도 아버지의 마음 한 자락을 어거지로 찾아보려는 어머니의 모습이, 가여울 정도로 처량했고 화가 날 정도로 답답했다. 말이 엇나갔다.
-그렇게 정 많은 분이 처자식 버렸겠어요.
-다 못나고 불쌍한 사람들이지. 서방 복 없는 나도 불쌍하고, 애비 복도 에미 복도 없는 너도 불쌍하고, 부모 잘못 만난 것도 모자라 명까지 짧았던 연지도 불쌍하고, 못나게 살다가 늘그막에 대접도 못 받은 네 애비도 불쌍하고. 다 불쌍하지. 네 애비가 자기밖에 모르는 위인이고 못난 인생이지만 그래도 애비고 서방인데 가족한테 애틋한 마음이 죽기 전까지 단 한 조각도 없었겠냐. 자식한테는 또 더했겠지. 아흔 아흡 가지 못한 게 있어도 한 가지 잘한 게 있으면 그거 보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살아지는 거야. 가슴 속에 평생 미움을 품고 산다는 건 정말 불행한 일이고 바보 같은 짓이란다. 그러니 관대해져라. 인상만 쓰지 말고 웃고 살아. 용서하고 받아들여. 그게 신상에 좋아. 아버지를 좋아하라는 게 아니라 미워하지 말라는 거야. 그렇게는 할 수 있잖니.
 연오는 어머니가 이야기를 마치고 눈을 붙이기 위해 자리를 뜰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왕배덕배 따지기가 귀찮았을 뿐이었다.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신 담배연기를 한숨을 쉬 듯 길게 내뿜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졸음에 겨워 꾸벅이고 있었다. 
 삼우제까지 마치고 나서야 그는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시험이 한 달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교육학 문제집을 펼쳐서 문제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코메니우스와 관련된 문제를 풀고 있는데, 갑자기 툭, 멀쩡하던 옷의 실밥이 갑자기 터져 나가듯이, 그렇게 툭, 울음이 터져 나왔다. 뜻밖의 눈물에 연오는 어리떨떨했다. 마음이 허영거리기는 했어도 그다지 슬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는 고시원이었다. 방귀를 뀔 때도, 재채기를 할 때도, 여기서는 최대한 옆방을 배려해야 했다. 행여라도 옆방에 들릴세라,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입을 한껏 틀어막고는, 힘겹게 울음을 삼켰다.

 리빙 고시텔. 청운고시원을 탈출하여 정착한 보금자리였다. 영어식 이름을 그럴듯하게 여기는 경박한 풍조를 추종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무보증에 월 30만원, 밥과 김치제공, 개인욕실 완비!! 비용이 좀 들더라도 공동욕실을 사용하는 불편함에서는 해방되고 싶었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했다.
 오늘은 아버지 기일이었다. 시험이 임박했어도 할 도리는 해야 했다. 보던 책과 자료들을 정리하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한숨만 나왔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앞으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청주 한 병을 사들고 집에 들어섰다. 지지고 볶는 기름 냄새가 먼저 자신을 맞이했고, 환하게 웃는 어머니가 뒤이어 자식을 맞이했다. 손의 물기를 닦으며 진이가 다가왔고,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아기가 웃었다.
 진이가 임신 사실을 알려온 것은 임용시험에서 낙방하고 실의에 잠겨 패배감을 곱씹고 있을 즈음이었다. 자신의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사는데 아이라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오는 아이를 지우자고 했지만 진이는 낳자고 우겼다. 공무원 시험은 어찌할 거냐고 하자 출산 후 다시 준비할 거라고 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진이는 고시원 방을 빼고 연락을 끊어 버렸다. 사라진 그녀가 남산만한 배를 부여안고 다시 나타난 것은, 장마가 막 끝난 대지를 뜨거운 땡볕이 부지런히 말리고 있던 무렵이었다. 진이에게는 강력한 우군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자기 씨를 없애자고 했던 놈은 내 새끼가 아니라고, 자기 새끼 나 몰라라 하는 건 지 애비 젊었을 적 판박이라고, 어머니는 목청을 높였다. 돌이킬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했다. 혼인신고만 먼저 하고 결혼식은 나중에 올리기로 했다.
 분향재배 후 모사 그릇에 술을 나누어 붓고 강신재배를 했다. 참신과 초헌이 이어졌고 그 다음은 독축이었다. 축문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유세차 임진 시월 임오삭 십팔일 기해... 아버지가 떠난 것은 연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후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여자와 멀리 떠날 거라고.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관방에 아내와 자식을 두고는 돌아섰다.
 효자 연오 감소고우 현고학생부군... 잰걸음으로 아버지를 따라갔다. 아버지의 소맷부리를 잡아당기며 울먹였다. 아빠 가지마.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잠시 일별하더니 슬며시 팔을 당겨 뺐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 쪽으로 걸어가던 그 뒷모습이 어린 시절의 자신이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세서천역 휘일부림 추원감시 호천망극...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추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핑계거리만 있다면, 그냥 못 이기는 척, 어머니 말씀처럼, 받아들이고 싶었다. 숱한 기억 속에서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오르는 추억을 찾고 싶었다. 미치도록, 떠올리고 싶었다.
 조이청작서수 공신전헌 상향.

 온 가족이 함께 유원지를 찾았다. 모처럼의 나들이에 어머니는 물론 진이까지도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방긋방긋 웃었다. 아직 완전히 여물지는 않았어도, 아기 역시 집안에 대물림되는 말상의 윤곽을 제법 또렷하게 보여주는 듯 했다. 뜻하지 않은 나들이는 현준이 덕분이었다. 유원지를 문 닫게 되었으니 없어지기 전에 가족동반해서 한 번 놀러 오라는 것이었다. 툽상한 외모와는 달리 숭굴숭굴한 마음씨였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모친 때문에 슬며시 자리를 피해 담배를 빼물었다.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사진을 빼보았다. 연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불길은 대부분의 사진을 태워 버렸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과 연지의 얼굴은 확인할 길이 없어 기억 속에서만 가물거렸다. 연오의 어린 시절 모습으로는 지금 이 사진이 유일했다. 아버지의 지갑 속에 끼워진 채였다. 아버지의 옷가지를 매동그려 고물상에 넘길 때, 주머니 속에 있던 지갑을 빼서 서랍에 넣어 두었는데 그때는 미처 지갑 속을 확인하지 못했다. 사진은 한쪽 모서리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사진 속의 어린 연오는 아기였다. 방실거리는 웃음을 마구 피워대고 있었다. 아기를 뒤에서 안고 있는, 자신을 쏙 빼닮은, 자신보다도 어려 보이는, 젊은 아버지는 활짝 웃고 있었다. 회전목마 위에 걸터앉은 아버지와 아기는 행복해 보였다.
 담배를 비벼 끄고는 돌아섰다. 따뜻한 햇살과 부드럽게 감겨오는 바람, 물 냄새와 풀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나온 보람이 있었다. 현준이가 회전목마를 작동시켰다. 목마들이 느럭느럭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마들의 표정은 닮은 듯하면서도 달랐다. 어떤 놈은 깔깔대며 달리고 어떤 놈은 낄낄대며 달리고 어떤 놈은 킥킥대며 달렸다. 하루 종일 달려봐야 제 자리일 뿐이지만 그렇게 웃고 떠들며 달렸다. 어쨌든 달리는 것이 저놈들의 숙명이었다. 어머니도 진이와 함께 목마 위에서 깔깔깔 호호호 웃고 있었다. 어차피 죽기 전까지 우리의 삶은 계속되고, 어떻게든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 삶을 살아내야 한다. 꼼짝없이 뱅글뱅글 돌더라도 기왕이면 방글방글 웃으면서 말이다. 어머니와 진이가 내리자 연오는 아기를 안고 회전목마에 올라탔다. 얼룩말은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을 빼다 박았다. 검정색 말은 까무잡잡한 자신의 모습을 빼쏘았다. 분홍색이 도는 말은 앙증맞은 아기와 빼닮았다. 회전목마가 움직였다. 젊은 아버지가 그랬듯이, 연오는 아기를 뒤에서 꼬옥 껴안았다. 콧날이 시큰해지며 눈가에 물기가 돌았다. 진이가 사진을 찍는다며 연오에게 웃으라고 소리쳤다. 입은 활짝 웃는데 눈은 훌쩍 울었다. 진이가 웃는 것도 제대로 못하냐며 재차 다그쳤다. 연오는 입을 한껏 벌리고 용을 썼다.

하 하 하.
 

■  소설 당선소감

글에 대한 열렬한 욕망이 준 선물

 

당선 소식을 접하고 나서 문득, 어린 시절 가을 운동회 때 이어달리기를 하던 생각이 났다. 바통을 건네받기 위해 출발선에 서는 순간, 에누리 없는 무게로 짓눌러 오는 긴장과 흥분과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연상됐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머리에는 무언가가 맴돌았고 끊임없이 가슴에는 무언가가 차올랐다. 쏟아내야만 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 동안 생활에 치이고 일상에 함몰되어 글쓰기를 중단했지만, 글에 대한 욕망은 무병이나 신병처럼 어김없이 나를 옭아맸다. 그것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였다. 무언가를 글로 쓴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다. 난 무병과도 같은 나의 이 욕망을 사랑한다.
 나보다 더 넓은 시야와 더 깊은 내면과 더 높은 세계를 가진 응모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그들보다 운이 조금 더 좋았던 것 같다. 많은 한계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신 동양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를 드린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 동안 문학과 소설에 대한 설익은 이야기들을 인내심 있게 경청해준 형우, 변함없는 믿음을 보여주었던 윤재를 비롯한 벗들에게도 탁배기 한 잔씩 돌려야겠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실감하려면 며칠은 더 걸릴 것 같다. 글 쓰는 모든 이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삶과 글을 벼려 나가겠다. 지금 내 심장은 마구 쿵쾅거리고 있다. 또 다시, 출발선에 섰다.

 

■  소설 부문 심사평<심사위원 안수길>

척박한 현실 견뎌내는 젊은 세대의 실상 완성도 높게 그려

 

심사자에게 넘어 온 게 33편이었다. 의료계의 이면을 다룬 2편 외에는, 소재나 기교면에서  예년과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우선 단편소설로 웬만큼 틀을 갖췄다고 생각되는 12편을 골라 재독 한 뒤, 부분적으로 흠결이 드러나는 8편을 덜어 냈다.
 남은 4편중에 특별히 눈에 띄는 작품도 없었지만, 확연한 차이를 집어내기도 어려울 만큼 그 수준이 비슷비슷한 상황이어서 선택이 쉽지 않았다.
 폭설 후(김호준: 양산)는 학생인권조례 공포 후, 교단에 폭설처럼 불어 닥친 혼란을 그린 고발성 작품이다. 교활한 학생과 학부모, 소신 없는 교장과 장학사, 그 가운데서 성실한 교사와 학생들이 겪는 고통을 실감 있게 그렸다. 상황설정에 무리가 없고, 사건을 단편화(斷編化)한 특이한 구성이 가독성을 높여 주지만, 주인물인 교사의 지나친 온정주의와 무기력한 대응이, 쇄신이 절실한 교단풍토에 의미 있는 신호를 보내게 될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병원 24시(노은희: 남양주)는 입원환자들이 표출하는 갖가지 행태를 동영상으로 찍듯, 병실 곳곳에 앵글을 맞추면서, 죽음이란 엄혹한 현실과 가까이 접하고 있는 환자들과 그 주변인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를 무리 없이 그려냈다.
1인칭 관찰자를 통해 전달되는 인물들의 개성도 분명하게 윤곽이 잡힐 만큼 묘사도 정확한 편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꼬마의 관계 처리가 지나치게 돌발적인 감이 있다. 결말부분에 반전의 묘미가 필요하다지만 절실성이나 필연성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독자와의 공감대 형성은 어렵다.
 은빛 날, 핏빛 살(오주훈: 서울)은 칼을 다루는 일식집 요리사인 화자와 주변 사물들 사이에 형성되는 긴장관계를 칼날처럼 예리한 문장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화자 주변의 모든 것, 생선 살, 아내, 아내의 내연남, 조폭들과의 경계선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이 독자에게까지 전달될 만큼, 수식을 절약한 축약된 문장은 정확하고 생동적이다.
그러나 독자를 사로잡을만한 팽팽한 긴장감 뒤에, 명확한 주제가 떠오르지 않는다. 새로이 등장한 여자와의 관계에 ‘좋은 출발’이 암시되지만, 그것을 이 작품의 결말로 삼기엔 허전한 감이 있다.
 회전목마(류희병: 서울)는 절망스러운 현실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젊은 세대의 아픔을 침착하고 담담한 필치로 엮어냈다. 화자가 분노나 원망을 토로하는 등 감정의 과장 없이 차분한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다.
막막한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도 소박한 꿈을 위해 서두름 없이 나아가는 인물들의 삶은 궁핍 하다. 그러나 밝은 미래를 전망케 한다. 신인다운 패기나 새로운 기교는 보이지 않지만, 전형적인 단편의 틀을 갖춘, 비교적 완성도 높은 작품이어서, 작자의 안정된 능력을 짐작케 하므로 당선작으로 꼽았다.
 당선자에게 축하와 함께 격려를 보내며, 심사자의 시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예심을 통과한 분들에게도 곧 영광의 기회가 오리라 믿는다. 특히 칼날 같은 예리한 문장력을 택할 것이냐, 작품의 완성도를 택할 것이냐를 놓고, 끝까지 고민하게 한 ‘은빛 날, 핏빛 살’ 작자의 정진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