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30>

“수산이 떠난 자리… 나의 앞길도 허전하구나”

2016-02-28     김명기 기자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김수산(金水山) 군을 회(懷)함

작년 8월 4일에 수산(水山)이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 세상에서는 그의 죽음과 그의 생전(生前) 일에 대하여 멋대로 지껄이고 멋대로 판단(判斷)을 내린다. 더구나 무근(無根)한 사실(事實)을 함부로 과장(誇張)하여 내어 놓는 신문 잡지의 기사란 것은 차마 볼 수가 없을 만하였다.

그런 지도 벌써 죽은 지 1기년(朞年)이나 되었다. 그렇건만 나는 이때껏 그의 일에 대하여 줄곧 침묵(沈默)만 지켜왔었다. 그것은 그가 죽을 그때에도 나의 생각과 감정(感情)이 몹시 착란(錯亂)도 하고 변화(變化)도 잦았으므로 쉽사리 얼른 말하기가 싫었던 까닭이요, 그 뒤에는 때가 지나고 보니 뒤늦게 말하기도 어중되었던 까닭이다.

새삼스러운 말이다마는 그는 왜 죽었나? 나는 그의 죽음이란 일에 이르러서는 말하지 않겠다. 세상 사람 판단 그대로 맡겨두련다. 또는 그의 생전 일에 대하여 세상에서 떠도는 올곧지 않은 풍설(風說)도 일일이 다 변명(辯明)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죽음을 본 나의 감정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놀라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고 슬프고 밉고 하는 갖가지로 갈아들이는 감정이었다. 바로 말이다마는 나는 그의 죽음을 가장 미워하던 사람의 하나였었다. 그러나 때가 지나고 느낌이 가셔진 이 때에는 다만 남아 있는 것이란 공리감(功利感)으로부터 나오는 아까운 생각 뿐이다.

나는 그의 죽음을 무슨 시적(詩的)으로 철학적(哲學的)으로 공상적(空想的)으로 생각하기는 싫다. 나는 산 사람이요 현실인(現實人)이다. 그의 죽음을 오늘날 있어서는 공리감(功利感)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일 이외에는 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 죽었노!… 망한 것….”

나는 지금도 수산이가 생각날 때마다 혼자이면 욕(辱)을 하여 부친다. 그렇다, 나는 그의 사람을 잃어버림을 원통해 한다. 그의 죽음의 일을 말하지 않겠다. 잃어버린 그의 사람을 말하겠다.

“수산은 인간(人間)으로서 진실(眞實)하였다. 그 진실은 가까이 하는 사람의 거짓을 없앨 만하였다. 수산은 나의 둘도없이 신뢰(信賴)하던 벗이었다. 그 신뢰는 평생(平生)을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하던 수산이 죽은 지도 이미 오래이다. 그의 꼭 다문 입, 그윽이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또 다시 눈에 떠오르는구나. 수산! 그대의 앞길은 영원(永遠)히 비었다. 나의 걸음도 허전허전하구나!”

이것은 그가 죽은 지 얼마 뒤에 추도회(追悼會)에 내가 써서 보낸 글발이었다.

나는 그의 인간적(人間的) 신의(信義)로써 그를 믿었고 그의 놀랄만한 정력(精力)을 믿었고 예삿사람으로 하지 못하는 그의 과단(果斷)을 믿었었다. 내가 함부로 그를 추어대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과연(果然) 사람으로서 굳센 편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내가 소위 조선의 문단인이란 것들에게 사람으로서 낙망을 가진 때에 수산을 생각하고 이런 말을 혼자 하였다.

“잡동사니들의 문단인. 그러나 오직 수산만은 참된 물건일 것이다. 두고 보라. 앞으로 이 참된 물건이 하나 나올 때가 있을 터이니….”

그러나 이 미지의 인(人), 미래의 인인 수산이 그 기대를 어기고 말았다. 미래를 영영 감추고 말았다.

어느 친구의 말마따나 “수산이 앞으로 사오 년, 오륙 년만 더 살았던들 상당한 업적과 수확을 문단에 또는 사회에 끼쳐놓을 것을….” 하고 나도 한탄한다. 그러나 그는 이 사오 년, 오륙 년이란 것도 더 살기 싫던지 죽음의 길을 바삐하고 말았다.

내가 지금 앉아 하는 이 말이 무엇에 닿으랴. 모두가 시덥지 않은 말이다. 사라진 꿈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지나간 날의 일을 되풀이하여 생각해 보련다.

벌써 8년이나 되었나 보다. 내가 처음으로 동경(東京)을 갔을 때이다. 군은 그때 와세다(早大) 영문과 (英文科) 재학중(在學中)이었다.

그해 여름에 와세다대 그라운드 옆 장백료(長白寮) 일실(一室)에서 군을 처음 만났었다. 내가 군을 처음 본 인상은 ‘몹시 침착(沈着)한 사람, 단단한 사람, 심각한 곳이 있는 사람, 책임성이 많은 사람’, 그러므로 이쪽에서 여간 데면데면한 소리를 하여서는 아니 되겠다는 경계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첫 자리에서 남에게 믿음성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같은 문예(文藝)의 길의 동반자(同伴者), 아니 동반자라는 것보다도 그때 나는 그를 나에게는 접장격(接長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뒤에는 피차(彼此)에 문예 동호의 도(徒)로서 상종이 잦아졌다. 나는 습작(習作)의 시구(詩句)나 글 같은 것을 쓰면 으레 쫓아가서 그의 비평 아래에 찬(讚)과 폄(貶) 받기를 즐거워하였다. 그는 나에게 앞길을 가다듬는 말을 가끔 하여준다. 나도 삼가 듣는다. 나는 또 가다가 마음의 괴로움이 있을 때에는 또한 달려가 가슴을 풀어 헤쳐서 이야기 한다. 그는 무슨 책임이나 진 듯이 사려(思慮) 깊은 태도로 나의 말을 들으며 나의 길을 힘써서 생각하고 말하여 준다. 나는 이때부터 ‘평생을 신뢰할 만한 친구 하나를 얻었다. 이 다음에 가서 사상(思想)과 행동(行動)에 극단의 배치가 없는 한도에는…’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여름의 일이다. 동우회극단(同友會劇團)이 조선으로 순회극을 하러 왔었다. 그때 군은 무대 감독이라는 책임을 가졌다. 한 달 이상이나 동고(同苦)를 하며 다녔다. 그때에도 나에게는 수 십 명이나 되는 단원이라는 잡동사니패들 가운데 오직 군 만은 착실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 때에 본 어느 순간적 인상도 나에게는 늘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그때 통영에서 마산으로 밤배를 타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거의 다 샐 때가 되어 갑판 위로 올라가자니까 마침 군도 어디서 툭 튀어나온다. 가지록 잠자리에서 나오는 모양이다. (누구나 다 가지록 잠 깬 얼굴은 천연스럽지만) 그때 바다 아침을 배경으로 한 군의 보숭보숭한 얼굴 까막까막하는 검은 눈동자, 나에게 주는 인상은 얼른 ‘이 순진하고도 참한 귀여운 아기!’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는 혼자 빙그레 웃으며 그를 맞았었다.

그 뒤에 우리들 문학청년 가운데에는 한 그룹이 생겼다. 여러 사람이었지만 그 가운데에도 군과 나와 또 남준우(南駿祐)군(남군도 벌써 죽은 지 여러 달이다. 이 남군은 나의 죽마고우요, 재화(財華)의 벗이요, 또는 우정(友情)으로써 초련(初戀)의 심리를 일으키던 벗이었다. 나는 잃어버린 이 두 친구를 생각할 때 나 자신을 돌아다 보고 무던히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탄 한다)과 세 사람의 상종이 잦았다. 모이면 남군과 김군과는 흔히 담론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말하자면 남군은 재화의 사람이요, 김군은 사려(思慮)의 사람이다. 전자는 펄펄날리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 전자는 초현실적이라면 후자는 어디까지든지 현실적이었다. 이 두사람의 성격의 차이, 사상의 차이로부터 나오는 반박치배(反駁馳背)되는 언론(言論), 나는 이 좋은 두 벗이 다투고 떠들고 하는 양을 우두커니 앉아 보고 있을 때에 재미스럽고 유쾌하기란 것은 짝이 없었다.

그 뒤에 나는 먼저 조선으로 왔었다. 군은 다니던 학교를 마칠 양으로 한두 해 동안 더 그 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 한두 해 동안은 서신도 잦지 못하였다. 군은 학교를 마치고 와서 집에서 치산(治産)하고 있더란 말을 풍편(風便)에 들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일시적 방편인가? 혹은 영구인가?’ 하는 의심이 나면서도 어떤 기대를 저버리는 듯싶어 분한 생각이 펄썩 났었다. 나는 곧 붓을 들어 심히 꾸짖고 욕하는 언사로 편지를 써서 부쳤다. 군의 답장은 곧 왔다. 나의 편지를 보고 울었다고…. 자기는 처음으로 친구 하나를 이 세상에서 발견하였다고…. 나도 그제부터는 잃어버릴 뻔한 친구 하나를 다시 얻은 듯싶었다.

 

군이 책상으로부터 가정에 파묻혀 있을 동안에 군의 마음의 고통은 여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군은 자기란 것을 또는 자기의 처지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반성이 많은 사람이다. 그럴수록에 그의 생각과 그의 가정의 사정과의 모순과 충돌이 격렬하였던 모양이다. 군은 군의 말마따나 ‘마음의 고통이 대단할 때에는 내 살을 내가 씹고 싶어’라고 할 만큼 괴로웠던 모양이다. 군은 이만큼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다. 인종(忍從)과 반항(反抗) 우연만한 일에는 모두가 다 인종이다. 그렇다. 군은 마지막에는 반항하고 일어섰다. 이것이 강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

작년 5월 그믐께인가 보다. 군이 갑자기 서울로 온다는 편지가 오고 뒤미처 전보가 왔다. 나는 이른 아침에 정거장으로 나아가 군을 만나서 어느 여관으로 같이 들어갔다. 이 때에 나는 비로소 군이 출가한 것을 알고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였다. 그것은 군이 반드시 이런 때가 올 것을 나 혼자 속으로 기대하였던 바이다. 그때에 군은 이때껏 자기가 마음 먹어오던 일(이때껏 줄곧 연구하여 오던 극예술(劇藝術)에 대한 포부와 또는 기타 경제력 같은 것을 아울러 집주(集注)시켜 조선에 극운동을 일으키자던 것)을 버리고 먼저 자기의 생활을 고통 속으로부터 건져내어 놓자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러시아 같은 데로 나가서 이때껏 하여 오던 마음에 맞지않던 자기의 생활을 바로 잡기도 하고 또는 하여 오던 방면의 연구도 더 하여볼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렸다. 재산이란 것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그가 그때에 바로 북행(北行)을 하였을 것이지만 길 소개 기타 사정 관계로 말미암아 먼저 몇 달 동안은 동경 같은 데 가서 어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 해 9월 안으로는 북행을 할 작정이었다. 그러던 터에 꿈에나 생각하였으랴, 8월 5일 한나절이 기울 때 그가 죽었다는 기별이 나의 귀에 와 울렸다.

그런 지도 벌써 1기년(朞年)이 되었다. 지난 8월 4일은 그가 죽던 1기년의 마지막 날. 그 날도 벌써 한달이나 지나쳤다. 이 다음에는 그 날이 와도 그 날조차 잊어질 때가 많겠지.

마지막으로 추도문이나 한 번 더 외워보자.

“수산은 인간(人間)으로서 진실(眞實)하였다. 그 진실은 가까이 하는 사람의 거짓을 없앨 만하였다. 수산은 나의 둘도없이 신뢰(信賴)하던 벗이었다. 그 신뢰는 평생(平生)을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하던 수산이 죽은 지도 이미 오래이다. 그의 꼭 다문 입, 그윽이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또 다시 눈에 떠오르는구나. 수산! 그대의 앞길은 영원(永遠)히 비었다. 나의 걸음도 허전허전하구나!”

1927년 8월 27일.

- 조명희, ‘김수산(金水山) 군을 회(懷)함’, 1927년 9월 1일, 조선지광 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