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33>

항일단체 ‘신간회’의 출범엔 포석의 ‘가교역할’이…

2016-03-20     김명기 기자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그 뒤에 나는 먼저 조선으로 왔었다. 군은 다니던 학교를 마칠 양으로 한두 해 동안 더 그 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 한두 해 동안은 서신도 잦지 못하였다. 군은 학교를 마치고 와서 집에서 치산(治産)하고 있더란 말을 풍편(風便)에 들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일시적 방편인가? 혹은 영구인가?’ 하는 의심이 나면서도 어떤 기대를 저버리는 듯싶어 분한 생각이 펄썩 났었다. 나는 곧 붓을 들어 심히 꾸짖고 욕하는 언사로 편지를 써서 부쳤다. 군의 답장은 곧 왔다. 나의 편지를 보고 울었다고…. 자기는 처음으로 친구 하나를 이 세상에서 발견하였다고…. 나도 그제부터는 잃어버릴 뻔한 친구 하나를 다시 얻은 듯싶었다.
조명희, 金水山君을 회함, 1927년 9월 1일, 조선지광 71호

포석은 이때 우진이 가졌을 마음의 고통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우진의 고통이란 윤심덕과의 이루지 못할 사랑과 마음에도 없는 가업 잇기, 그로 인한 문학의 포기, 마음을 두지 못하는 가정생활 등이었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그의 가슴을 짓누르지 않는 것이 없었지만, 특히 윤심덕과의 사랑과 문학의 포기는 김우진 자신의 삶을 모두 내어놓는 것과 같은, 존재의 소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아픔과 번민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안타까워했던 이가 포석이었다.
동경유학 생활을 마치고 1년여 적조했던 기간, 풍편으로 들려온 우진의 삶의 변화는 그래서 포석에게는 많은 괴로움과 분노를 안겨다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진의 편지를 통해 속내를 알게 된 포석은 ‘처음으로 친구 하나를 이 세상에서 발견하였다’며 울어버린 우진을 보고는 ‘잃어버릴 뻔한 친구 하나를 다시 얻은 듯싶었’던 것이다.

포석은 김우진의 그 당시 상황(동경유학을 다녀온 뒤 가정사적 어려움과 윤심덕과의 사랑, 그리고 문학과 괴리된 삶의 어려움) 등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우진이 자기의 처지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고, 반성이 많은 사람이고, 그리하여 그의 생각과 가정간의 모순과 충돌이 격렬했던 것. 그래서 우진은 ‘마음의 고통이 대단할 때에는 내 살을 내가 씹고 싶어’라고 할 만큼 괴로웠던 것. 웬만한 일에는 인종과 반항에서 늘 인종을 택하는, 이렇듯 참을성 많은 우진이 마지막에는 ‘반항하고 나서’ 작년(1926년) 5월 그믐께 자신에게 편지글을 보내 서울에 온다고 통보한 것이다. 그래서 그날의 만남은 더욱 포석에게 기뻤던 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작년 5월 그믐께인가 보다. 군이 갑자기 서울로 온다는 편지가 오고 뒤미처 전보가 왔다. 나는 이른 아침에 정거장으로 나아가 군을 만나서 어느 여관으로 같이 들어갔다. 이 때에 나는 비로소 군이 출가한 것을 알고 속으로 은근히 기뻐하였다. 그것은 군이 반드시 이런 때가 올 것을 나 혼자 속으로 기대하였던 바이다. 그때에 군은 이때껏 자기가 마음 먹어오던 일(이때껏 줄곧 연구하여 오던 극예술(劇藝術)에 대한 포부와 또는 기타 경제력 같은 것을 아울러 집주(集注)시켜 조선에 극운동을 일으키자던 것)을 버리고 먼저 자기의 생활을 고통 속으로부터 건져내어 놓자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러시아 같은 데로 나가서 이때껏 하여 오던 마음에 맞지 않던 자기의 생활을 바로 잡기도 하고 또는 하여 오던 방면의 연구도 더 하여볼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렸다. 재산이란 것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조명희, 金水山君을 회함, 1927년 9월 1일, 조선지광 71호

하고보면 이날의 기쁨은 어쩌면 불행을 암시하는 전조(前兆)였을지도 모른다.
포석과 만난 뒤 두 달 남짓 후인 그해 8월 4일, 김우진은 윤심덕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못다 이룬 사랑을 이루려했으니 말이다.
재산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모든 것을 다 버린 채 러시아 같은 데에 나가서 이때껏 하여 오던 마음에 맞지 않던 생활을 바로잡고자 했었던 우진에게 남은 것은 문학이었다. 문학의 꿈을, 아버지라는 커다란 울타리를 넘어 러시아라는 대국으로 나아가 실현하고자 했던 우진을 보고 포석은 기뻐했었다.
그러나 우진의 심경에 남아있던 깊은 응어리, 포석은 그것을 간과했다. 그건 윤심덕과의 사랑이었다.
우진과 동우회극단 조선 순회공연을 하면서 그로부터 들었던 윤심덕과의 사랑, 그 사랑의 불안하고 두려운 예감이 결국은 현실화되어버린 것이었다.
포석은 마지막 추도문을 쓰며 우진이 떠난 지 1년이 돼서야 그를 보낸다.

그가 그때에 바로 북행(北行)을 하였을 것이지만 길 소개 기타 사정 관계로 말미암아 먼저 몇 달 동안은 동경 같은 데 가서 어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 해 9월 안으로는 북행을 할 작정이었다. 그러던 터에 꿈에나 생각하였으랴, 8월 5일 한나절이 기울 때 그가 죽었다는 기별이 나의 귀에 와 울렸다.
그런 지도 벌써 1기년(朞年)이 되었다. 지난 8월 4일은 그가 죽던 1기년의 마지막 날. 그 날도 벌써 한달이나 지나쳤다. 이 다음에는 그 날이 와도 그 날조차 잊어질 때가 많겠지.
마지막으로 추도문이나 한 번 더 외워보자.
“수산은 인간(人間)으로서 진실(眞實)하였다. 그 진실은 가까이 하는 사람의 거짓을 없앨 만하였다. 수산은 나의 둘도없이 신뢰(信賴)하던 벗이었다. 그 신뢰는 평생(平生)을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하던 수산이 죽은 지도 이미 오래이다. 그의 꼭 다문 입, 그윽이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또 다시 눈에 떠오르는구나. 수산! 그대의 앞길은 영원(永遠)히 비었다. 나의 걸음도 허전허전하구나!”
1927년 8월 27일.
- 조명희, ‘김수산(金水山) 군을 회(懷)함’, 1927년 9월 1일, 조선지광 71호.

1927년 포석의 작품에는 시가 보이지 않는다.
포석은 1926년 2월 1일 문예운동 1호에 ‘농촌의 시’를 발표한 것을 마지막으로 시를 쓰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사상과 믿음을 조선 인민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는 시보다 산문이라는 장르가 더 적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그가 강한 애착을 가졌고 문학적 형상화를 시도하려 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설에서 그 역량을 활발히 펼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포석은 1927년 1월 1일 소설 ‘농촌 사람들’을 현대평론에, ‘새거지’를 조선지광 63호에 발표한다. 또 조선지광 같은 호에 평론 ‘힘의 예술을, 힘의 예술가를’을 싣는다.
3월 1일에는 소설 ‘동지(同志)’를 조선지광 65호에, 같은 호에 수필 ‘생활기록의 단편’을 발표한다.
5월 1일에는 소설 ‘한여름밤 꿈’을 조선지광 67호에, 7월 1일에는 포석에게 있어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소설 ‘낙동강’을 조선지광 69호에 발표하게 된다.
8월 1일 수필 ‘여름밤 뜬 생각’과 9월 1일 수필 ‘조선의 가을’과 ‘김수산군을 회함’을 조선지광 70호와 71호에 연이어 발표한다.

가을!
조선(朝鮮)의 가을!
말 말라.
이 가을 같은 가을이 어디 또 있을까.
가없이 가없이 갠 하늘 그 하늘은 얕푸른 빛으로 물들였네.
동무야, 우리도 이 하늘 밑에 서고 싶구나.
끝없이 뻗친 이 길, 남으로 퍼지고 동으로 퍼지고, 산지사방 퍼지었네.
동무야, 우리도 이 길을 훨훨 걷고 싶구나.
더위의 폭진(暴塵), 장마비의 구속(拘束), 온갖 여름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시절이 가을이다. 더구나 조선의 가을이야 말할 수 있으랴.
그다지 맑고 갠 하늘, 얕푸른 빛으로 물들인 하늘-그다지도 깨끗한 하늘빛을- 나는 다른 데서 보지 못하였노라(내가 말하는 다른 곳이라야 한껏 일본이다마는). 그리고 또 붉은빛 혹은 잿빛으로 된 조선의 흙빛 끝없이 걸어가고 싶은 휘영청거려 뻗친 조선의 길….
우리는 이러한 자연을 가졌다. 이러한 시절을 만났다. 천리라도 만리라도 넉넉히 걸을 듯싶은 저 가을의 훤한 길을 두고 사지(四肢)를 오므리며 좁은 속에서 오비작거리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가을이 왔다. 조선의 가을이 왔다. 인상 깊은 가을이 우리에게로. 영구히 기억 깊을 가을이 우리에게로….
- 조명희, ‘조선의 가을’, 1927년 9월 1일, 조선지광 71호.

사족(蛇足)을 달아 무엇하랴.
그저 포석이 쓴대로, 포석이 느낀대로 느끼면 그만이다.
가없이 갠 하늘, 얕푸른 빛으로 물들어 있는 하늘, 더위의 폭진(暴塵), 장마비의 구속(拘束), 온갖 여름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시절 저 가을하늘을 보며 조선의 잿빛 붉은빛 길을 끝없이 걷고 싶은 포석의 마음을 이해하면 그만이다.
하면서도 그의 마음에 석연찮은 것이 보인다. ‘더위의 폭진(暴塵), 장마비의 구속(拘束), 온갖 여름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시절’, 그 시절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왔으되 오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묶여있는 조선 백성들은 그래서 ‘천리라도 만리라도 넉넉히 걸을 듯싶은 저 가을의 훤한 길을 두고 사지(四肢)를 오므리며 좁은 속에서 오비작거리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던 아픔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하고보면 포석의 서정(抒情)에는 서정 그 자체의 한가로움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 속엔 늘 암울한 조선의 앞날과 핍박에 시달리는 조선의 백성들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년 전 ‘포석 평전’을 구상하면서 두 가지의 질문을 준비하고 김승환 교수(충북대 국어교육학과)를 찾아 갔었다.
첫번째 질문은 포석의 정체성이었고, 두번째 질문은 포석을 접근하는 키워드였다.
포석의 정체성에 대해 김 교수는 ‘민족민중주의 선구자’라 말했다. 그리고 포석을 이해하는 키워드에 대해선 신간회(新幹會)(50)를 제시했다.
김 교수는 두 가지 질문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말했다. 포석이 러시아로 떠나기 전 조선에서의 활동에서 가장 공을 들인 것이 신간회였다는 것이다. 정파와 이념이 다른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을 이끌어낸 데에는 누구보다 포석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포석이 정파와 사상적 속성이 다른 두 부류를 아우르며 신간회를 출범시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일제에 대항하여 투쟁할 단일 체제를 구축해야만 했던 시대적 소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포석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해방을 염원했던 사회주의적 사상에 더해 일제강점하에서 신음하는 조선 백성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민족주의자로서의 신념 또한 강했던 것이다. 그 두 가지의 공유점이 신간회였던 것이고, 그런 까닭에 포석을 민족민중주의의 선구자라 칭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