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39>

일제의 탄압 피해 결국 러시아로 떠나는 포석

2016-05-08     김명기 기자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1928년은 포석이 소련으로 망명한 해이다. 그러니까 포석은 1923년 2월 동양서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희곡집 ‘김영일(金英一)의 사(死)’를 발간하고, 4월 8일 동명 32호에 ‘내 영혼(靈魂)의 한쪽 기행(紀行)’과 ‘아침’으로 문단에 나와 5년 남짓 조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망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포석이 조선 문단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조선 최초의 창작희곡 ‘김영일의 사’를 쓰고, 최초의 조선 순회공연을 다녔다는 것이 포석의 첫번째 문학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포석은 또 1924년 조선 최초의 창작시집 ‘봄잔듸밧 위에’를 춘추각에서 펴냈다. 그것이 두번째 문학적 업적이다.

그리고 프로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되는 소설 ‘낙동강’을 1927년 7월 조선지광 69호에 발표했다. 포석의 ‘낙동강’은 당시 조선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이 그의 세번째 문학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포석이 지닌 역량은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봐도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희곡, 시, 소설, 평론, 동요, 번역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포석의 문단 활동 첫 출발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동우회순회연극단’을 조직해 조선 최초의 순회공연을 벌인 기획자이자 엔터테니어이기도 했다.

 

1928년 8월 21일 서울 마포나루.

중국으로 가는 배에 타려는 사람들로 마포나루는 분주했다. 많은 사람들 틈으로 언뜻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포석 조명희였다.

아직 아침 참이라 햇볕은 그리 따갑지 않았다. 한강으로부터 바람이 제법 불어왔다. 포석은 그 바람에 온전히 자신의 몸을 맡겼다.

‘이제 떠나면 언제나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마음이 찹잡해졌다.

일경(日警)들의 감시망이 점점 옥죄어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던 그였다. 며칠 전에는 일경으로부터 그에게 ‘빅딜’이 전해졌다. 일본에 협조를 한다면 도지사 정도의 감투를 내어줄 요량이라는 것이었다.

차라리 귀를 씻고 싶었다. 도천지수(盜泉之水)(54),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둑의 샘물은 마시지 않을 일이었다. 문득 자신이 쓴 낙동강의 노래가 떠올랐다.

 

이 벌이 열리고 / 이 강물이 흐를 제 / 그 시절부터 / 이 젖 먹고 자라 왔네 / 자라왔네-에-헤-야.//

천년을 산, 만년을 산 / 낙동강! 낙동강! / 하늘가에 간들 / 꿈에나 잊을소냐- / 잊힐소냐-아-하-야.

 

어딜 가나 고등계 형사들의 미행이 잦아졌었다.

그들에게 포석은 ‘미운 털’이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딴에는 고관대작을 미끼로 제국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려 했지만 포석은 요지부동이었다. 민족주의자에 사회주의자의 중심축이었던 포석을 포섭하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라올 터였지만, 선비의 꼿꼿함과 지사적 풍모를 지난 포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미웠다. 한 번 걸리기만 해라, 치도곤을 내줄 거다, 그런 앙심을 당연히 품으면서도, 일경은 어떤 유혹과 회유에도 바위처럼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포석에게 일종의 존경심마저 가졌다.

아무 말 없이 원고를 정리하며 묵묵히 남편을 내조하고 쥐꼬리만하게 들어오는 돈으로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가정 대소사를 챙기던 아내를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이제 열 네살인 중숙(重淑)과 아홉살난 중남(重男), 다섯살인 장남 중락(重洛), 두살밖에 안 된 갓난아기 중윤(重潤). 네 아이를 두고 두고 떠나야 하는 아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그러나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었다. 민족주의자로서 일제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싸워야 하는 투쟁과 사회주의자로서 실현해 내야 할 민중의 해방이 그것이었다.

 

촘촘한 그물망처럼 그를 에워싸고 들어오는 일제의 압박에 온전히 대항할 수 있는 길은 망명 뿐이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롭게 저항운동을 펼쳐나가야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일경의 압박 수위로 보아 시간이 촉박했고, 그들의 감시망은 너무나 촘촘했다. 해서 포석은 사랑하는 가족을 데리고 나오지 못했다. 그 즉시 체포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동지들과 지인들과 문인들에게도 망명 계획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 말이 언제 어디서 새어 나갈 지 모르기 때문. 해서 조선 문인들은 그의 망명 소식을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흉금을 터놓을 수 있었던 이기영과 한설야 조차도 후일 그의 소식을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변복을 하고, 변장을 하고 이제 그는 이 조선을 떠나려는 참이었다.

포석에게 새로운 공간은, 그러나 지금의 행선지 중국이 아니었다. 그에게 언제나 로망으로 남아 있던 곳, 어찌보면 유토피아와도 같은 곳, 러시아였다. 그는 러시아로의 망명로(55)를 마음 속에 그리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절친 김우진도 ‘북행(北行)’을 꿈꾸었었다. 김우진이 꿈꾸었던 곳 역시 러시아였다. 그 꿈을 포석에게 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현해탄 정사’로 삶을 마감했던 우진은 그래서 포석에게 더욱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낙동강의 로사가 꿈꾸었던 북행 또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궁극적으로는 러시아였을 것이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로 가득찬 나포나루가 한 뼘 안의 풍경처럼 작아졌다.

배는 조선땅을 뒤로 하고 서해를 향해 쉼없이 나아갔다. 마포나루가 보이지 않게 되고, 나포나루에 북적이던 조선의 백성들도 보이지 않게 될 즈음, 포석은 나즈막히 읊조렸다.

‘천년을 산, 만년을 산 낙동강! 낙동강! 하늘가에 간들 꿈에나 잊을소냐!’

그것이 낙동강이면 어떻고 한강이면 어떠랴만, 황망히 조국을 두고 떠나는 그의 마음은 너무나 아팠다.

천년을 살았을, 만년을 살았을 낙동강과 한강, 그리고 내 조국 조선. 이 그립고 안타까운 땅을 다시금 밟을 수 있을까, 포석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면서도 낙동강의 성운이 그러했고 로사가 그러했듯, 포석 자신도 언젠가 당당한 마음으로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란 다짐을 했다.

포석이 탄 배는 한강을 지나 서해의 잔물결을 헤치며 북으로, 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54) 도천지수(盜泉之水)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둑의 샘물은 마시지 않는다는 말로,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결코 부정한 짓은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갈불음도천수(渴不飮盜泉水)의 줄임말

‘문선’이라는 책에는 晋(진)나라의 육기(陸機)가 지은 맹호행(猛虎行)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갈불음도천수(渴不飮盜泉水)는 그 모두(冒頭)에 나온다.

아무리 목 말라도 도천의 물은 마시지 않고(渴不飮盜泉水) / 아무리 더워도 악나무 그늘에서는 쉬지 않노라(烈不息惡木陰) / 나쁜 나무엔들 가지가 없겠는냐마는(惡木豈無枝) / 뜻있는 선비는 고심이 많구나(志士多苦心)

도천은 지금도 산동성 사수현에 있는데 설원(說苑)이란 책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공자가 어느날 목이 몹시 말랐으나 그 샘물을 떠먹지 않았고, 또 승모(勝母)라는 마을에는 날이 저물어 도착했지만 머물지 않고 곧장 떠났다. 승모란 자식이 어머니를 이긴다는 뜻이므로 그런 이름이 붙은 마을에서는 하룻밤도 자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晋)나라 오은지(吳隱之)가 지은 탐천(貪泉)이라는 시에 나오는 ‘탐천’은 중국 광주(廣州)에 있다. 그 샘물도 올곧고 뜻있는 사람들이 마시면 욕심쟁이가 된다고 하여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55) 포석의 러시아 망명루트

포석이 러시아로 망명하게된 루트는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포석이 러시아로 망명을 떠나는 출발점이 한강 마포나루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 배의 행로가 중국의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았고, 포석 또한 자신의 망명 탈출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상 포석의 동선을 추측해 보면 1차 기착지가 중국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마포나루를 떠난 이후 행적이 묘연하다가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이 블라디보스토크였다. 그런데 배로 그곳까지 간 것으로 추정하게 되면 마포나루-한강- 서해안-남해안-동해안을 거쳐 그곳에 도착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그럴 계획이었다면 애초 부산항이나, 오히려 그곳과 더 가까운 원산항에서 출발해야 옳다.

포석의 제자이자 처남댁인 최 예까떼리나의 증언을 보면 포석의 행적과 관련한 ‘열쇠’를 찾을 수 있다.

“조명희가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들어올 때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소련군인들을 보고 어린이처럼 기뻐하며 달려가 그들에게 고려말로 나는 고려사람입니다, 하니 그들은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중국어, 일어, 영어로 말하였으나 그래도 군인들은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군관이 병사들에게 국경초소로 호송하라고 명령하였다. 사흘이 지나 고려인 통역원이 블리디보스토크(해삼)에서 왔을 때 조명희는 자기 저고리잔등을 뜯어 거기서 종이쪽지를 꺼내어 통역원에게 보였다. 거기에는 “이 사람은 고려문사 조명희”라고 써있었다. 그것을 본 통역원은 반갑게 인사하고 해삼으로 데리고 가서 국제원조회에서 새 진회색양복을 내주었다.

그때 후리후리한 키에 맵시가 있던 진회색양복을 입은 조명희를 이 죄수복을 입고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보니 너무 대조적이다. 머리를 빡빡 깎고 죄 없는 죄인이 되신 조명희선생의 모습은 우리의 기억에 아픈 기억으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최 예까떼리나 글, ‘레닌기치’ 게재.

최씨는 포석이 소련으로 들어올 때 ‘국경을 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항으로 들어왔다면 국경을 넘었다고 서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관이 병사들에게 국경초소로 호송하라고 명령’했다는 것도 포석이 육로를 통해 러시아로 들어갔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포석의 첫 기착지는 단둥이나, 다롄, 안산 등지로 추정할 수 있다. 거기에서 포석은 북동쪽에 위치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선양-창춘-하얼빈-무단장, 혹은 선양-지린-무단장 등을 거쳐 소련의 국경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