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전라·충청권으로 우리 철학의 지형도를 다시 세운다

동양포럼 학술회의 Ⅲ - ‘지방 간 상생철학을 함께 열자’

2016-12-28     동양일보

동양일보 부설 동양포럼운영위원회(위원장 유성종)는 지난 18일 충북예총 따비홀에서 ‘동양포럼 학술회의 Ⅲ’를 개최했다. 이번 포럼에는 동양포럼운영위원회 유성종 위원장(전 꽃동네대 총장)과 김태창 주간을 비롯, 박맹수 원광대 교수, 김용환 충북대 교수, 손흥철 안양대 교수, 최재목 영남대 교수,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야규 마코토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조성환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참석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이화, 기화, 실화라는 세 개의 기둥 위에 새로운 한국철학의 집을 짓는다는 명제 아래 시대와 지역을 넘나드는 철학 대화를 펼쳤다. 이날 전개된 철학대화의 내용을 요약·정리해서 싣는다. <편집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새해를 며칠 앞두고 여러모로 바쁘신 선생님들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된 데는 나름대로의 뜻이 있어서입니다. 새해는 닭의 해입니다. 닭은 새벽을 알리는 새입니다. 새벽은 ‘새밝’-새로 밝힘-이요, ‘새열림’-개벽-이기도 해서 닭의 해에는 우리 철학-문학과 예술과 종교도 아울러서 인문학이라고 해도 좋은데-의 ‘새밝’과 ‘새열림’을 여러분과 함께 실행에 옮기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축적해 오신 연구와 교육의 성과에서 나오는 지혜의 힘을 나누어 주셨으면 해서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너무나 중앙집권화된 철학=인문학을 과감하게 지방분권화하고 분권화된 지방의 철학적 활력을 지방간 상생철학이라는 새틀로 다시 열자는 것입니다. 나라 밖에서는 ‘inter-local canvivial philosophy’라는 이름으로 local knowledge를 inter-local nisdom으로 전환, 승화, 발전시키자고 호소해왔습니다만 이제 여러분과 함께 각 지방, 생활 현장에서 낳고 키워지고 길러진 생명-생활-생업에 관련된 지혜를 지방과 지방의 사이에서 서로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서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서로 화해를 도모하고 그러는 가운데서 서로 일으키고 서로 도움이 되도록 해서 참다운 상생의 효과를 적정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적 영위를 시도해 보자는 것입니다. 세대간 상생의 철학-inter generational convivial philosophy-도 겸전하면서 말입니다. 무슨 일이나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철학=인문학의 ‘새밝’과 ‘새열림’도 몇 단계를 밟아야 되겠지요. 그렇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선 첫 단계로 우리 철학의 지형도를 경상권과 전라권, 충청권(+경기권 +강원권)으로 나누고 거기서 퇴계 이학과 수운 기학과 명제 실학을 세 개의 기둥으로 삼고 새로운 철학=인문학의 집을 세워보자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우리 철학이 저 자신의 개인적 감각으로는 너무 평면적이라고 할까 아니면 선형적=개별사상 철학자 중심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치우쳐서 시대와 상황의 문제 제기에 대한 철학적=인문학적 대응, 응답, 대처의 입체적 구조화가 미흡하지 않았는가라는 우려가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새로운 철학의 생산을 전담하고 지방에서는 충실하게 소비만 해주기를 너무나 후안무치하게 바라고 요구하는 오랜 철학적=인문학적 폐습 때문에 지방주도적인 자생적 대응능력이 극도로 쇠퇴하고 소실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안동과 익산과 청주에서 각각 사정이 허락하는 때에 계속하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우선 청주에서 세 가지 작업가설을 제시해서 거기에 대한 여러분의 고견을 경청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가설은 우리 철학의 지형도를 경상권과 전라권과 충청권(+경기권 +강원권)으로 나누고 그 철학권 사이와 어우름에서 새로운 철학의 구조적 개편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가설은 우리 철학의 새로운 집을 경상권의 퇴계 이학과 전라권의 수운 기학과 충청권의 명재 실학의 세 기둥을 바침목으로 해서 새로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가설은 우리 철학의 터닭이=정지작업은 우리 겨레 고유의 사상적 원류라고 전해져온 ‘접화군생(接化群生-최치원)’이라든가 그것의 연원이라고 일컬어진 ‘재세이화(在世理化-단군설화)’에 나타난 ‘접화’ 또는 ‘이화’를 주축으로 삼고 이루어지는 것이 확실한 토대구축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퇴계 이학의 ‘이화(理化)’와 수운기학의 ‘기화(氣化)’와 명제실학의 ‘실화(實化)’를 포함 삼학하는 접화군생의 철학으로 다듬어 나가는데서 대지와 대들보와 건축물이 새로운 모습으로 건립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오늘날 한국철학에 대한 논의가 많습니다. 대체로 성리학 하시는 분들이 반쯤될 겁니다. 사실 성리학이 들어와 한국철학의 특성 두 가지를 무력화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감성과 신명성=영명성이라는 한국철학의 핵심 특징이 말소된 거지요. 원래 한국철학의 기조에 있었던 ‘사천(하늘섬김)’이나 ‘시천(하느님 모심)’이라는 고유사상의 알맹이가 성리학 때문에 죽어버렸거든요. 다산 정약용 같은 이들이 하늘을 섬기고 두려워한다는 사천사상을 복구시키고자 했지만 고유사상의 특성인 신명성=영명성을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겁니다. 영명성이란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 속에서 실천돼 왔거든요. 그런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최치원의 영명기 아닙니까? 한국철학의 원형을 밑바탕에 깔고 연구해야지 그것을 도외시하고 불교면 불교, 성리학이면 성리학을 따로따로 연구하는데 끝이면 그 원형을 절대로 볼 수 없지요. 보이지 않아요. 19세기 말이 되면 한국적인 신흥종교들이 여럿 나오는데 거기서 제일 앞선 것이 동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사상을 형성하는 큰 줄기가 ‘정역(正易)’입니다. 중국의 ‘주역(周易)’과 다른 한국 나름의 ‘정역’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도(道)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두 가지 측면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궁리진성의 측면인데 성리학이 바로 이 측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죠. 또 하나는 ‘고무지신’이라는 측면이라는 겁니다. 북 치고 거기 맞춰 장단에 춤추고 신명이 나도록 하는 것. 여기에 정감성과 영명성이 나타나는 거죠. 이 두 가지가 합쳐지는데서 접화군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신명나게 만들어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성리학만으로는 사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고무적인 측면, 신명이 나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 급기야는 접신강령=신령과 접해서 신령이 내 몸에 내려오는 경지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역’에는 미래예측도 나옵니다. 미래에는 양과 음의 상호평등이 실현된다는 거지요. 선천시대에서는 양과 음이 심하게 차별되었지만 후천시대에 가서는 완전히 평등이 실현된다는 거였습니다. 예언이 맞아 떨어진 거지요. 여기서 얘기하는 미래 예측이나 미래 예언은 영명성으로 내다보는 것입니다. 영명성을 통해서 보이는 것이죠. 선천이다 후천이다 하는 것이 동학으로 가면 개벽사상으로 발전하지요. 선천 세계는 가고 후천 세계가 도래한다는 겁니다. 개벽이라는 것은 메시아가 와서 개벽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개벽입니다. 자각개벽입니다. 자기가 자기 본성을 깨닫게 되면 바로 거기서 후천개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개벽은 그냥 개벽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고유사상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의 개벽이기도 합니다. 고유사상의 해석의 정점에 최치원 선생이 있습니다. 최치원 선생의 화(化)의 논리, 그것은 무서운 에너지입니다. 유교의 교화=가르쳐 사람을 바꾼다는 강한 힘이 안됩니다. 변화, 변혁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개벽이라는 말은 안 썼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논리는 전부 ‘화(化)’의 논리입니다. 무엇을 위한 ‘화(化)’=변화냐 하면 새로운 탄생을 위한 변화입니다. 김태창 선생께서 아까 말씀하신 ‘새삶’=신생(新生)을 위한 변화입니다. 한국 사상의 특징을 최치원 선생은 ‘생생화화(生生化化)’라고 했습니다. ‘생(生)’자도 중요하지만 ‘화(化)’자도 아주 중요합니다. 왜 전라권에서 동학이 발전하게 되었느냐 하면 전라권에 풍류사상의 씨앗이 많이 뿌려져 있어서 신명혁명의 토양이 비교적 풍요로워서 그래요. 경상권은 성리학이 강해서 어렵지요. 전라권의 사람들은 노래 잘하고 신명나게 잘 놀고 살고 있거든요. 신명성=영명성이 전라권에서 제대로 꽃피운 거지요.”

 

▷박맹수 원광대 교수 “이화·기화·실화라는 세 개의 기둥 위에 새로운 한국철학의 집을 짓자는 김태창 교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면서 저는 수운 기학=동학 쪽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동학의 핵심 경전이 ‘동경대전’인데 20년 전부터 ‘동경대전’을 알기 쉽게 번역해야겠다고 하다 인연이 되어 2009년 동경대전을 완역하면서 세간에 동학이 잘못 알려져 있다는 생각에 교양적 수준으로 동학을 새롭게 알리는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을 간략히 요약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동학에 눈을 뜬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호남땅이 기화의 메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동학도 꽃을 피우고 동학 이후 증산교가 나오고 대종교가 나오고 원불교가 나오고 이 종교들을 꿰뚫는 단어가 개벽이라는 용어더라고요. 동학은 자기폐쇄적인 문화를 전면적으로 개방해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것이 민중 쪽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상층부나 지배층으로부터 초기에는 탄압을 많이 받고 그러다보니 연구 대상이나 탐구가 부족한 부분이 많아 많이 오해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동학에 대한 오해를 풀자는 것입니다. 첫째, 동학은 서학(西學)에 대항하기 위해 성립한 일종의 대항 이데올로기라는 견해입니다. 서학이 지닌 근대성과 보편성을 두루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지닌 제국주의적이며 침략주의적인 성격을 극복함으로써 조선 사람에게 알맞으면서 조선의 역사와 전통에 어울리는 주체적인 사상을 만들고자 했던 민초들의 열화와 같은 소망을 집대성한 사상적 창조의 결과물이 바로 동학입니다. 둘째, 동학은 기존의 유불선(儒佛仙) 삼교 사상에서 장점만을 따온 혼합 사상이지, 그 자체로 독창적인 요소가 별로 없는 사이비 사상이라는 견해입니다. 동학은 기존 사상을 다 포함하면서도 그저 포함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즉 ‘접화군생(接化群生)’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 속에서 포함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동학의 독창적 측면입니다. 셋째, 동학을 단순히 서양의 ‘Religion(종교)’으로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동학은 그저 믿기만 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배우고 실천해 가야 할 도(道)이자 학(學), 즉 도학(道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Religion과 구분해서 이해해야 동학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동학에 대해 선구적으로 역사적 의미나 가치나 세계사적 위상을 조명한 선배 학자가 있었습니다. 범부 김정설 선생입니다. 그런데 우리 학계가 이것을 놓쳤습니다. 그것을 텍스트로 일궈내신 분이 여기 계신 최재목 선생이신데 범부 선생이 최제우론을 쓰셨는데 저는 그 문장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범부 선생이 ‘국풍의 재생이요, 사태의 경이라’ 찬탄한 동학 탄생의 사상적 배경은 어떤 것일까요. 동학은 첫째, 우리의 고유 사상인 풍류도(風流道=國風)를 뿌리로 삼아 성립됐습니다. 풍류도를 후천시대의 개벽 상황에 맞게 재정립해 부활시킨 것입니다. 동학을 낳은 둘째 사상적 원천은, 신라 천년 역사를 지탱해 온 대승불교(大乘佛敎)라 하겠다. 셋째, 동학이 나오게 된 근원에는 수운의 부친 근암공 최옥(1762∼1840)으로 이어져 내려온 퇴계학이라는 학문적 전통이 있습니다. 넷째, 동학 성립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 만한 사상은 서학(西學)입니다. 다섯째, 동학은 또한 민간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하던 샤머니즘은 물론 ‘정감록’ 같은 비기도참(秘記圖讖) 사상도 수용했습니다. 그렇다면 동학 창시자 수운 선생은 과연 어떠한 인물일까요? 선생은 1824년에 경주 양반 최옥에게 재가(再嫁)한 과부 한씨의 소생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과부의 자식은 아무리 재주가 출중해도 문과(文科)에 응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선생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안에서도 따돌림을 당해야 했고, 문중에서도 면박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비록 과부의 자식이긴 했지만 선생은 근암 공의 두터운 사랑과 후광 덕분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 경제적 학문적 후원자였던 아버지 근암공이 1840년(수운의 나이 17세 때)에 사거(死去)하자 수운 선생은 졸지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20세 이후부터는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전국을 방랑하며 삶의 돌파구를 찾고자 절치부심했습니다. 전국을 떠돌면서 조선의 격동하는 현실을 체험하는 가운데 겪은 개인적 고뇌가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1860년 음력 4월 5일에 수운 선생은 경주 용담정에서 이상한 체험을 합니다. 몸이 몹시 떨리고 한기(寒氣)를 느끼는 가운데, 공중에서 무슨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운 선생은 이날 ‘하늘님과 문답을 나누는 내림(천사문답)’ 체험을 통해 무극대도(無極大道), 즉 천도(天道)를 받았습니다. 하늘님은 특히 주문과 영부를 가지고 민중을 가르치면 스스로 장생할 뿐만 아니라, 천하에 널리 덕을 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수운에게 포덕(布德: 포교와 같은 뜻)할 것을 권했습니다. 이에 1861년 6월부터 본격적인 포덕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2~3년 안에 문경에서 경주에 이르는 400리 사이의 민중들 사이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결국 처형당하게 됩니다. ‘동학배척통문’에 흥미로운 글이 나옵니다. “귀천과 등위를 차별하지 않으니 백정과 술장사들이 모이고, 남녀를 차별하지 아니하고 유박을 설치하니 홀아비와 과부들이 모여들고, 돈과 재물을 좋아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도우니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기뻐했다(好財貨而有無相資, 卽貧窮者悅焉)”는 것입니다. 철저한 신분 평등의 공동체, 양성 평등의 공동체,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서로 돕는 생활공동체라는 이 세 가지가 동학이 널리 퍼지게 된 이유가 아니었나 합니다. 그렇다면 동학의 핵심적 메시지는 뭐였을까. 후천개벽. 전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꿨다는 것으로 봅니다. 동학의 핵심 사상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집약돼 있으며, 그중에서도 ‘동경대전’의 일명 ‘동학론(東學論)’으로 불리는 ‘논학문(論學文)’에 잘 집약돼 있습니다. ‘논학문’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제정한 21자 주문(二十一字呪文)에 대해 상세히 해설하고 있는데, 21자 주문은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 주문(十三字呪文)으로 집약되며, 그것은 다시 ‘시천주(侍天主)’ 석 자, 마지막에는 ‘시(侍)’ 한 자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학사상의 핵심은 바로 시(侍) 한 글자, 즉 ‘모심’이란 말에 다 들어 있다고 그것이 다름 아닌 ‘내유신령 외유기화’이므로 수운기학은 기화=영화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성환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 “저는 개벽과 개화의 차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개벽과 개화에 대한 문제의식은 한국철학사를 어떻게 서술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됐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한국인들이 어떤 권위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의 사상을 마음껏 전개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개벽이라는 공통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개벽’이라고 하면 신비주의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개벽은 백성이 주체가 되어 세상을 그 틀에서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보통은 선천개벽에 대해서 후천개벽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최제우 선생 자신은 후천개벽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다시 개벽’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후천개벽은 우주의 운행이 근본적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사상입니다. 반면에 수운 선생이 말했던 것은 ‘자기개벽’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 수양을 해야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후천개벽과는 다른 것이고, 바로 여기에 동학의 ‘학’적인 성격이 들어 있습니다. 아울러 제가 개벽을 강조하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사상사 서술이 너무 비주체적으로 되어 있지 않나라는 문제의식 때문입니다. 개벽과 대비되는 ‘개화’는 일부 지식인이 주체가 되어 서구적 근대화를 이루자는 발상입니다.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가 ‘탈아입구’라는 슬로건 하에 일본의 근대화를 꾀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고, 그것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개화파들도 서구적 근대화를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개화에는 결정적으로 백성=민중의 능동성·주체성·자주성이 빠져 있습니다. 즉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면에 개벽은 민중을 변혁의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저 자신은 개화가 아닌 개벽 쪽에서 한국 인문학의 기본 입장과 방향을 찾고 있습니다. 동학에 이어서 등장한 천도교나 원불교는 개벽을 배타적인 개벽이 아니라 서양 문화를 인정한 상태에서 동시에 진행할 것을 추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일제시대에 전개된 신문화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개벽이 자폐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개화를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솔직한 느낌을 말씀 드리면 아직까지 우리 학계는 개화 중심=서구화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영어로 논문을 써야 하고 그것으로 평가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환경에서는 우리의 생각을 우리말로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어렵지요. 저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하루 속히 우리 철학이 개화의 철학 단계를 넘어서서 개벽의 철학 단계로 가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권의 평가에 좌우되는 현황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영어가 영어권의 평가에 영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어권에 우리 개벽의 철학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도록 고도의 횡단매개력을 지닌 영어를 체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규 마코토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저는 의암 손병희 선생님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공부를 하다 보니 그 분의 인생이 참 파란만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은 동학이 조선 왕조의 탄압을 받는 한 가운데서 교단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일본에 망명하고 6년 쯤 있다가 1909년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그 사이 ‘삼전론’이라는 논문을 씁니다. 삼전(三戰)이란 도전(道戰)·재전(財戰)·언전(言戰)을 말합니다. 손병희 선생은 삼전론에서 강하다는 것은 군사력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손병희 선생이 정리하는 것은 먼저 도덕의 존재입니다. 나라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얻고 사람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조화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재전이라는 것은 타인의 자본을 잘 살리고 백성들을 돈독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원을 단지 쓰는 것만이 아니라 잘 보존하고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원을 다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쓸 수 있도록 하고 현재 세대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까지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언전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로서 통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 상대방의 사정을 이해하고 서로 사귀게 하자는 내용이 언전에 담겨 있습니다. 일본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2차 대전에서 패배하고 지금 70년이 됐는데 군사권을 가질 수 없게 됐습니다. 자위대라는 실질적 병사력은 갖고 있지만 헌법에는 군사권이 없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그런데 아베 수상을 지지하는 보수파는 군사적으로 자유를 얻으려 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며칠 전에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아베 수상 만나고 회담을 했어요. 국방권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거기에 국방영토를 2차 대전 말기에 러시아에 빼앗긴 네 개의 섬이 있는데 그것을 돌려받자는 것이 일본의 외교적 요구인데 푸틴 대통령이 오기 전에는 마치 북방영토가 돌아올 것처럼 얘기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오니 그런 얘기는 전혀 안하고 북방영토에 대한 경제적인 투자를 확충시키자는 얘기로 끝났어요. 그러자 일본 내에서는 나라가 군사적인 힘이 없으니까 그렇게 얘기가 되는구나 하는 분위기가 됐습니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고 미국과 견주는 군사력을 갖춘 나라니까요. 그런데 제가 ‘삼전론’을 읽고 재미있었던 것은 강한 것은 군사력도 아니고 기술력도 아니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부분이죠. 그리고 우리가 세워야 하는 것은 도덕, 자원, 말이라고 말합니다. 손병희 선생이 일본에 망명하고 살았을 때 삼전론을 정리하게 된 것은 이 세 가지가 일본의 약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삼전론은 대부분 일본에 대해서 중요한 과제가 된 것 같습니다.”

 

▷김태창 주간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마는 수운 선생은 동학의 기화의 교리적 토대 구축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최시형 선생은 혹독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포교와 조직 정비를 통해서 인간 변혁과 사회 변혁을 위한 위력 양성과 그 축적 그리고 적절한 때와 곳에서 폭발적으로 그 위력을 실증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면 손병희 선생은 점점 고착화되어가는 대일본제국에 의한 한국강점이라는 현실 속에서 동학 정신의 생활화·실천화·기질화를 통해서 장기적인 국가적·민족적 자주독립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대일본제국 헌법에 규정된 종교의 자유를 돌파구로 삼고 극랄한 사상 탄압을 동학 사상의 종교화=천도교로의 명칭 제정을 감행했고 천도교 대표라는 자격으로 1919년의 3.1운동에 가담했다가 투옥당했으며 거기서 얻은 병환으로 출옥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병사했는데 거기서 저는 동학의 실화라는 측면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고매한 도덕적 감화력도 강력한 신념적 기력도 그것이 일상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생활화·실천화·습성화되지 않으면 장기적인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최영성 교수 “여기서 논의의 방향을 이황 선생 쪽으로 돌려서 퇴계 이황에 대해서 약간의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상사를 전공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은 난국을 풀어가는 지혜가 사상사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고 패턴은 같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공부를 안 한다는 거죠. 학문과 정치가 별개이면 다행인데 조선시대에는 학문과 정치가 같이 갈 수 밖에 없죠. 그런데 학문과 정치가 같이 가면 나중에는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는 거죠. 잘 아시다시피 율곡 선생은 진취적이고 이황 선생은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인조반정 이후에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집권하는데 전혀 반대가 돼요. 율곡 선생의 진취적인 면은 후배에게 전혀 계승이 안돼요. 율곡 선생은 '성'자를 굉장히 중시합니다. 대신 퇴계 선생은 '경'자를 많이 얘기하는데 경은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무서운 결과가 됩니다. 정치적으로 해석되면 어떤 한 가지를 주로 해서 다른 쪽으로 신경을 못 쓰도록 돼 버려요. 반대로 윤증 선생은 실자. 성자를 중요시합니다. 율곡 쪽에서 나오는 것은 정도만 지키는 것이지 나머지는 퇴계쪽에서 바꿔 버려요. 실학은 언제든지 유동적인 것이거든요. 저는 오늘날 실학은 정신적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에도 '체'와 '용'이 있는데, 그것을 보지 않고 완전 실용 쪽만 실학이라고 해서 모든 이론서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실심실학을 꼭 붙여야 혼돈이 안 생긴다고 하니 문제입니다. 저는 퇴계 선생의 경우, 율곡 선생의 성. 한쪽이 경을 중시해서 그렇지 성을 말씀 안한 게 아니거든요. 반복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을 해야 성으로 가고 성을 먼저 얘기하고 방법론으로 경으로 가고 호환하고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건데 나중에 이상한 쪽으로 흐르고 정치적으로 왜곡을 하니 문제가 됩니다. 제가 글을 읽다 보니 우리나라 교육법 1호에 '홍익인간'이 들어 있는데 문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극명히 반대한 사람들이 기독교 사람들인데 결국 나중에는 홍익인간으로 정해지기는 했지만 정치를 하며 자꾸 이용을 하니 문제인데 그런 것은 우리가 잘 가려서 봐야 합니다. 저는 오늘 가장 기초가 되는 퇴계의 연원론에 대해 가볍게 적어 왔습니다. 연원이라고 하면 근원과는 다른데, 퇴계 선생은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거나 하는 연원에 대해 얘기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연보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퇴계 선생이 12살 때 숙부 송재공 이우에게 논어를 배우던 중 하루는 이(理)라는 글자로 송재공에게 묻기를 “모든 일에 있어 옳은 그것이 이(理)입니까?” 하니, 송재공이 기뻐하면서, “네가 벌써 글의 뜻을 알았구나.” 하였다고 합니다. 퇴계 선생이 말하는 ‘이’는 윤리, 도덕적 차원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황의 설은 인간의 본성을 중심으로 이기를 파악하고, 이이의 설은 도리상의 근본 원리를 중심으로 이기를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황의 설은 윤리적 성격이 강하고 이이의 설은 철학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퇴계 선생의 글은 문학성이 높습니다. 퇴계 선생은 문학을 통해 도에 이르렀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이 도연명이고 나중에는 주자의 시에 심취했던 것 같습니다. 18세 때 퇴계 선생이 쓴 시는 참 놀라운 정도입니다. 20세부터 주역에 몰두해서 몸을 상하게 됩니다. 이기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는데 만년에 가서 한껏 꽃을 피운 철학자입니다. 퇴계 선생은 ‘이’자를 굉장히 중시했습니다. ‘고금인(古今人)의 학문과 도술(道術)이 다른 까닭은 단지 이 ‘이’자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자를 알기 어렵다고 한 것은 대략 아는 것을 어렵다고 함이 아니라, 진지묘해(眞知竗解)하여 십분처(十分處)에 이르는 것을 어렵다고 한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리학에서 ‘이’의 논리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리와 기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양자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퇴계의 호발설도 기실은 율곡의 ‘이기지묘’의 철학과 통하는 것입니다. 분개 중심의 퇴계설과 통합적 관점을 강조하는 율곡설은 서로 대립된 것만은 아닙니다. 그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훈구파가 정계는 물론 학계까지 지배했던 퇴계의 시대에는 ‘분별’이 시대적 요구였고, 사림파가 집권한 율곡의 시대에는 ‘통합’이 시대정신이었습니다. 또 역사의 흐름으로 보더라도, 퇴계의 시대 이후에는 율곡과 같은 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이것은 사실상 역사의 필연이었습니다. 퇴계학의 3대 텍스트는 ‘심경’·‘주자대전’·‘성리대전’입니다. ‘심경’은 퇴계 ‘경(敬)’사상의 보고이며 철학적 차원 넘어 종교적 경지까지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자대전’은 중종 38년(1543)에 처음으로 교서관에서 인간, 이전은 ‘성리대전’으로 공부했습니다. 연보를 보면 퇴계 선생이 33살 때 성균관에서 유학하다 여주로 내려가게 됐습니다. 우연히 김안국 선생을 만나고 “비로소 정인군자(正人君子)의 언론을 들었다”고 합니다. 퇴계 선생이 가장 학문적인 영향을 받은 학자를 꼽자면 김안국 선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짚어봤습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천명지성이라고 할 때 그 성에 대해서 성리학의 입장은 아마 천명이 발동하는 역동성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 성에서 “성즉리”라고 했기 때문에 천명이 발동되는 그 지점에서 성품을 찾고 그 성품에서 발동의 능동성을 찾는데 현상계는 그 모습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약간 복잡한 상황입니다. 현상 세계에서는 기발 현상을 접하지 이발 현상을 볼 수 없는데 천명에 대한 성이 하늘의 명령으로 와 닿을 수 있다는 학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황 선생이 이발을 논했을 때는 도덕적 주체성을 살려서 천명에 대항하는 이치를 강구하다 보니 그러한 필요성에 의한 논의가 아니겠는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엄격한 현실적 상황을 정할 때는 항상 한계에 부딪히는데 제가 이 부분을 달에 대한 비유, 흔히 생각해 보면 물결이 일어나 달을 보는 면도 있지만 달 자체가 움직여서 달이 바뀌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이황 선생의 고민은 움직임으로 얘기한 달의 동을 얘기한 측면과 물에 비친 달의 모습으로, 비유적인 설명으로 봤을 때 주체성을 살리기 위한 측면에서 당면한 논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손흥철 안양대 교수 “퇴계 선생이 특히 ‘이’를 강조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덧붙여 말씀드리면 저는 한국 성리학을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로 구분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기(主氣)라고 하려면 성즉리(性卽理)를 부정하고 성즉기(性卽氣)라고 해야 해요. 그래야 주기설(主氣說)이 됩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 성리학자 가운데 ‘성즉기’를 주장한 사람은 없어요. 율곡 선생에 대한 어떤 기록을 봐도 자신을 주기론자라고 하는 표현이 없어요. 퇴계 선생이 율곡과 문답하면서 ”나는 이를 중시했는데 자네는 기를 중심으로 말하였네“라고 한 말에서 퇴계의 후학들은 자신들은 주리론, 율곡학파는 주기론으로 낙인찍은 거지요. 이발의 의미를 굳이 살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성리학에서 이(理)의 원리, 최고선으로서의 이가 드러나야 할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의 능동성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의 실현을 강조하기 위해 이발을 얘기했는데 이기론 상의 설명과는 맞지 않는 거죠. 최고 딜레마죠. 그러니까 율곡 선생 자기가 이의 발현을 주장하고 싶어 하는데 주자(朱子)가 ‘이는 정의(情意) 조작(造作) 계탁(計度)이 없다’고 한 말과 모순이 되니까 이의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윤증은 이를 실심(實心)으로 설명하면서 개인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을 강조했습니다. 한편으로 다산(茶山)은 이 선(善)의 실현을 상제(上帝)를 통해 설명합니다. 곧 더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상제개념을 제시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발’의 의미는 다산이 얘기했듯 윤리적 측면에서 도덕적 선으로서의 이가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발현돼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면 어느 정도 살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재목 영남대 교수 “저의 기본적인 이해는 이렇습니다. 퇴계는 이의 능동성을 이발(理發)과 이동(理動)과 이도(理到) 또는 이자도(理自到)라는 세 개의 측면에서 논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퇴계는 기본적으로 성리학자이므로 그의 이(理)도 기본적으로 도덕적 원리원칙이라는 성격이 강합니다. 그와 같은 전제를 깔고 이발은 주로 인간의 도덕적 주체로서의 위상 설정에 도덕적 이성이 주도적 역할을 한다고 하는 당연한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발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리학은 인간이 주체가 되는 도덕적 세계를 확고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주발생의 궁극적 원리로서의 태극+우주형성적 원리로서의 이(理)를 전제하고 그것의 힘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주 발생=형성의 원초적 원리의 작동으로서의 이동(理動)이라는 측면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도(理到) 특히 이자도(理自到)는 결국 인간의 도덕적 각성=인식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측면인데 이가 스스로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퇴계 이학의 핵심에는 이의 도덕적 인간 변혁·세계 변혁의 원동력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재세이화의 도덕적 실현에의 강한 신념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김태창 주간 “세계를 다니면서 철학대화를 개최해오는 가운데서 우리 사상사에서 세계적인 의미를 가진 분이 몇 분 계신데 우리나라 안에만 가둬 두기는 아깝다는 생각을 했어요. 퇴계의 이발에 대해 지금 하신 여러 말씀에 보태 말씀 드리면 철학 문제에 대한 접근법에 대표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과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크게 따지면 희랍철학과 히브리신학의 차이인데 희랍철학은 이 세상을 인간의 이성으로 바꾼다. 이성이 세계 변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거에요. 그런데 히브리사상은 이성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바뀌느냐면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영을 받은 인간이라야 그것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영의 대립으로 서양사는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영성이 굉장히 강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요는 영성의 힘을 빌려야 바꿀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노인, 장애인, 유아 등을 살피다가 이 분들을 정상적인 인간으로 되돌릴 때 거기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거거든요. 최근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나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사고로 사람들의 인식이 굉장히 달라졌어요. 그래서 더 깊이 영성에까지 도달되는 학문이 필요하다고 해서 사회학도 영성 사회학이 생기고 영성 심리학이 생기고 이에 대한 굉장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요. 그런데 서양철학사를 보면 희랍적인 이성 중심의 철학과 달리 신의 영을 받아서 인간이 영화돼 거기서 생기는 힘으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해서 히브리적인 요소가 강하게 돼요. 그것을 우리나라에 옮겨 놓으면 퇴계 선생은 히랍 철학과 같이 이성을 갖고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거기에 비해 최제우 선생은 이성의 힘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사대부와 고관대작들을 보라 세상이 바뀌겠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의 영을 받고 그 힘을 갖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다산 선생은 이기론을 폐기하고 영육론으로 틀바꿈을 단행했어요. 그 분은 천주교에 조예가 깊었고 형제들이 천주교를 믿고 말년에 가서 고백하기를 영세를 받았다고 돼 있습니다. 성리학으로는 도저히 새로운 시대에 대응 못한다. 영혼론을 받아들여 패러다임을 바꿔 새로운 학문 체계를 세웠다는 관점도 있어요. 전통적인 학문을 중시여기는 분은 생각을 안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한국의 철학사를 세계사의 관점에서 다시 보자는 입장이니. 새로운 관점,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고 한국을 틀바꿈하기 위해서는 이치를 가지고 원리를 가지고 이성의 힘을 갖고 바꿔 보자는 퇴계적 발상을 차용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또 한쪽에서는 도저히 이성만으로는 안 된다. 그것보다 영의 힘, 그것을 기라고 해도 좋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성화돼 이성과 감성을 총체적으로 살릴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수운적 발상이라고 합니다. 이 퇴계적 발상과 수운적 발상이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반복해서 실행됨으로써 일상화·실무화·습관화되어야 실효를 거둘 수 있고 그것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실덕함양의 기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명제적 발상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퇴계적 발상과 수운적 발상과 명제적 발상을 아우르는 철학적 연구가 한국, 동아시아,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가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조선학회장으로 선출된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가 한국 사람은 너무 훌륭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를 지속적으로 내폐=안으로 닫아버리는 경향이 있어 제대로 가치를 발휘하기 어렵다는 말을 했습니다. 서울대에서 10년 간 철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얻은 결론은 한국 철학은 동어반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예로는 ‘원효 사상은 훌륭한 사상이다. 원효 사상은 한국 사상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상은 훌륭한 사상이다’는 식의 틀에서 갇혀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긴긴 세월 동안 이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왜 퇴계는 퇴계 안에서 싸움만 하지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한국을 사랑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에게 조차 그런 인상을 준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과감하게 탈피해 처음에는 어설프고 미흡하고 어긋나는 점이 있다 하더라도 구애 받지 말고 퇴계를 세계에 어떻게 살리고 세계의 사상과 접목시키느냐는 데 중심 과제를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한국 사상은 유불선 세 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들어오고 한국 사상은 아주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거든요 그것을 한쪽에만 집중시키지 말고 서로 아울러서 한국 사회가 진화 발전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 발전에 기여하는 쪽으로 웅대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폐쇄적이고 동어반복적인 철학을 하지 말고 자기와 타자가 진지한 대화를 교환하는 가운데서 차원 전환으로 가는데 이 과정에서 타자와의 공감이 극대화 돼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양명학자, 주자학자가 서로 죽이고 살리는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정도전이 이씨 왕조를 세웠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이 불교를 배척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리학을 정립하기 위해 제일 먼저 칼을 댄 것이 불교를 내치는 것이었지요. 성리학도 중요하지만 불교도 중요한 것이고 유교 이전에 선교도 있었고. 그것이 유교나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의 핵심 사상이었는데, 그런 것을 아울러 세계 철학과 접목이 되면서 세계 철학 발전에 기여하는 학문이 돼야 합니다. 교토포럼을 30년 간 하는 동안 외국 사람들로부터 한국에 무슨 철학이 있느냐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저명한 한국인 학자를 교토포럼에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돌아와 보니 천편일률적으로 동어반복적인 철학만 하고 있어서 여러분과 함께 힘을 합쳐 이것을 돌파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이성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느냐 영성의 힘으로 돌파해야 하느냐 일상적인 생활의 힘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본보기적인 방법으로 바꿔야 하느냐. 이 문제는 어느 하나만으로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퇴계적 발상은 어느 수준까지 간 사람들에게 적합한, 효력 있는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일상적인 생각에서 금방 변화를 하는 것은 영성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천지개벽을 한다는 식으로 틀 바꿈을 할 때는 영성의 힘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에게는 윤증 적인 의미에서의 일상생활의 실천, 실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사회와 국가를 저변부터 바꾸기 위해서는 이의 힘, 영의 힘, 실제적인 실행 즉 이화, 기화, 실화라는 세 가지의 변혁의 원동력을 합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용환 교수 “앞서 여러 선생님들이 수운을 말하고 퇴계를 논한 말씀을 경청한 다음에 저는 명제실학에 관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명재 윤증(1629~1714)은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명분보다 실용을 숭상하고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태도를 일컬어 실심실학으로 말합니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혼란을 치유하고 마음가짐을 올바로 갖추고자 자기성찰과 마음치유를 겸한 존심성찰을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명재의 실심사유는 퇴계 이황이 주자 학설을 계승하여 도심을 사단으로 인심을 칠정으로 대대하여 도심을 천리로 인심을 인욕으로 나눈 것과 구별됩니다. 퇴계 이황이 이기호발에 입각하여 인심도심으로 이원화하였다면, 명재는 율곡의 기발이승일도에 착안하여 도심·인심·인욕의 삼층으로 나누었습니다. 도심은 우주생명의 천성이고, 인심은 개체생명의 육체적 욕구인 데 반해, 인욕은 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해 과불급으로 치닫는 욕심 상태입니다. 명재는 본심으로 일원화 하고, 본심의 주체성을 강조하고자 실심을 내세웠습니다. 명재는 주자와 같이 객관적 대상의 이치를 구하기보다 객관적 대상에서 실심의 도덕적 주체성을 확보하고자 허위·가식을 배격하고, 구체적 현실에서 실공(實功)을 이루며 현실의 난국을 타개하고자 실학을 표방하였습니다. 사람으로서 실심이 없다면 우주생명의 천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자기에게 덕이 미치는 것을 실덕(實德)이라고 한다면 남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실학입니다. 그의 실학세계는 ‘초학획일도’와 ‘제위학지방도’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명재가 제시한 실학은 학구적 지식의 축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몸가짐을 바르게 함입니다. 대상의 의미를 깊이 이해한다면, 몸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바른 몸가짐이 되어 실생활에 충실한 가운데 마음과 몸으로 체득하려고 노력하기에 입지(立志)와 무실(務實)을 함께 중시합니다. 명재에게 무실은 개인수양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일소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우주생명을 주체적으로 자각하고 그것을 완성하려는 개체생명의 노력은 실심을 매개로 실학을 완성하는 결실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명재에게 ‘실(實)’은 천리와 인욕, 공과 사를 이어주고 매개하는 횡단매개의 원리입니다. 명재는 예학으로 계통을 수립하는 분수(分數)의 실천행위와 함께 조화를 도모하는 융합(融合)을 함께 중시함으로써 허례허식에 빠져 인욕에 사로잡힘을 경계하며, 일심이 실하지 않으면 만사가 거짓이며 일심이 실하면 만사가 참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명재에게 있어서, 이기(理氣)는 서로 섞일 수 없고, 그렇다고 서로 나눌 수도 없는 상관연동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일심의 운용에 있어서는 의리의 공(公)과 형기(形氣)의 사(私)로 나뉩니다. 악의 발생에 있어서 명재는 본래 악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욕에 있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명재에게 공심(公心)은 실심으로, 당연히 욕구할 바를 욕구하는 우주생명의 지혜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욕구하면 인욕으로 전락합니다. 명재가 꿈꾸는 이상적 사회는 실심실학에 근본을 두고, 무실로 의로움과 옳음의 우주생명 천리를 이루며 이로움과 그릇됨으로 점철된 인욕을 퇴치하는 사회입니다. 개체생명이 우주생명의 이치를 구현하는 명재의 실심실학에서 인심도심이 공매하는 한사상의 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명재는 공의 의리를 바탕으로 사적 일에 있어 그 효용성을 고려하여 공공실천을 이루고자 하는 무실역행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 하였습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의 학문이 명리를 좇은 것이라면, 선인 윤선거 학문은 내실을 추구한 것이기에 명재학풍은 명리보다 내실 추구의 가학(家學)에 연원을 두었다고 할 것입니다. 명재의 실심실학은 심성도야에서 출발하여 덕성을 함양하고 성현경전에서 실천방향을 모색하여 존심성찰 정성으로 원대한 실학으로 나아갔습니다. 그의 실심실학은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실학파를 태동하는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명재의 실심실학은 개체생명의 실현이자 사회질서의 구현이고, 우주생명의 융화입니다.”

 

▷손흥철 교수 “저는 조선 성리학을 공부하고 한동안 중국에 가서 공부하기도 했는데 숙명적으로 다시 7~8년 전부터 조선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점이 많습니다. 그중 느낀 것은 조선 성리학을 원천적으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송을 통해서 벌어지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 관계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노론, 소론이 갈라지는 가장 구체적인 원인이 저는 인조반정이라고 봅니다. 인조반정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전에 있었던 선조에 있었던 거죠. 조선은 제가 볼 때 임진왜란이 끝나고 망했어야 하는데 망하지 않고 계속된 것이 비극입니다. 선조의 여러 실정이 많이 있죠. 하나만 얘기하면 조선이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이 많은 의병, 민초들의 국가에 대한 희생 보다는 명나라 군사를 끌어 들여 전쟁에서 이기게 했다는 자기의 공이 컸다고 하는 거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역사의 해석이 곧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을 낳게 한 원인이 된 거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 및 후학들 즉 북학파(北人派)를 중심으로 국가의 중요시책을 펼쳤습니다. 이 광해군 정부는 망해가는 명나라와 새롭게 흥기하는 청나라 사이에 매우 실리적인 외교를 진행하였고, 민생을 중시하는 정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인(西人)들은 이러한 광해군과 광해군 정부를 쿠데타로 몰아내면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재조(再造)의 은혜를 베푼 명나라를 섬기지 않고 오랑캐 나라인 청나라를 섬긴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 어머니인 인목대비에게 불효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망하는 명나라 보다는 새롭게 흥기하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신중해야 하는 것은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는 기본입니다. 그리고 왕조시대에 왕위를 두고 경쟁을 하거나 갈등이 있으면, 진 쪽은 반드시 죽게 됩니다. 광해군은 그래도 죽이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신하들의 계속된 청원에 죽일 수밖에 없었지요. 아무튼 서인들은 명분없는 반란을 일으켜 인조(仁祖)를 옹립하고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서인들이 세운 정부의 정체성은 ‘대명의리’을 지키고, 사대부들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대부라 하면 향리에서 그냥 공부를 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사람이 있고 관료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인들은 정권을 잡고 난 후 자신들이 인조반역의 이유로 내세운 ‘대명의리’를 위해 망해가는 명나라에 대해 의리를 지키고, 청나라를 배척하였습니다. 즉 국가의 안위보다는 자기네들의 정치적 정당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거죠. 결과적으로 보면 국익 보다는 개인들의 당파적인 사리를 더 중시했던 거죠. 여기서 그야말로 동서양의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오랫동안 능수능란하게 정치적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송시열입니다. 이 분은 167차례 왕의 부름을 받습니다. 처음 관직에 나간 것이 27세였지만, 국가전반에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42세부터 80세가 넘어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송시열에 대해 반대파도 생기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것이 예송(禮訟)입니다. 본래 예라는 게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했던 관혼상제(冠婚喪祭) 같은 행사에서 필요한 것인데, 조선 중기에 와서는 정치적 도구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죠. 왕과 사대부가 같은 예를 사용해야 하는가 다른 예를 사용할 수 있는가가 조선의 역사에서는 갈라집니다. 대체로 보면 퇴계(退溪)·송시열·노론들은 왕과 사대부는 같은 예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고, 율곡과 남명과 소론들은 왕사부동예(王士不同禮)를 주장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왕도 인간이기 때문에 사대부와 똑같은 예를 사용해서 인간 개인으로서 가정에 충실하느냐, 왕이 되면 그때부터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를 사용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왕조 시대에 가장 중요했던 덕목이 충과 효입니다. 왕사부동례는 왕이 되면 그때부터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 우선주의가 되는 것이고 국가 우선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배제되는 것 같지만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남명·율곡·소론의 계열들은 왕사부동례를 주장하면서 왕권에 대한 존중과 왕의 권능을 강조했던 거죠. 즉 좀 더 나은 왕도정치를 하자는 얘기고, 왕사동래는 왕도 사대부와 똑같은 예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왕을 사대부의 영향권 안에 두고자 하는 것이죠. 그러한 이론적 배경을 깔고 예송이 전개가 되고, 예송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노론, 소론의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윤증과 송시열의 분쟁이죠. 너무 지나치게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이 정적들에 대한 가혹한 대처가 많은 사람의 반발을 일게 했고 이로써 소론 세력이 커지게 됐죠. 소론 세력이 커지면서 노론과 대치를 하게 되고 다시 소론과 남인이 일정 부분 서로 협조 관계가 되죠. 그러면서 결국 인조, 효종, 현종까지만 해도 병자호란 이후 많은 혼란기가 있었기 때문에 왕권이 약했어요. 노론과 소론의 영향이 커서 왕들이 신하들에 대해 발언권이나 힘이 강하지 못했어요. 현종까지는 많이 휘둘렸다고 보죠. 그러나 숙종(肅宗) 때가 되면 국정이 많이 안정이 되고, 숙종도 똑똑했던 거죠. 숙종은 송시열에 대하여 ‘사대부만 알고 왕은 모른다.’고 비판합니다. 결국에는 송시열이 숙종에게 죽게 되는 거죠. 송시열에게 마지막 던진 말이 그거죠. 그러한 과정에서 김용환 선생이 말씀하신 눈여겨 볼 인물이 윤증이라는 것이고 윤증에 보면 실학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원래는 실학하면 다산이라고 하지만 실학이라는 개념에는 정리해야 할 내용이 많습니다. 제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정본(定本)사업을 진행하면서 찾아 봤지만 다산은 ‘실학(實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실학이라는 용어는 한번 생각해 보고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심(實心)이라는 말은 제가 볼 때는 성리학의 기조, 성리학의 체계에서 우리가 말을 하면 당연히 실천을 하고 실행을 하는 것이 전제가 되는 줄 알았는데, 현실에서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실제로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일이 많이 생기는 거죠. 윤증은 여기서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하니 실제로 하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 ‘실심실학’을 강조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실심과 실학의 개념과 의미네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분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증 선생이 실심을 강조한 배경에는 사실 양명학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양명학은 이단(異端)으로 배척받았지만 윤증은 정제두 선생에게 “양명학을 공부할 때 조심해라. 그렇지만 학문을 멈추지 말고 계속하라”고 합니다. 즉 실천을 강조한 양명학을 윤증 자신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에 굉장히 불합리하고 좀 끔찍한 일이 있습니다. 자신과 다른 공부를 하고, 자신과 학문적 입장이 같지 않다고 배제하고 심지어 사문난적(斯門亂賊)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하는 사회,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게 저는 매우 슬픕니다. 자기와 다른 공부한다고 생명의 위협까지 하는 그런 야만적 생각이 현대사회에서는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송시열 선생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또한 시대적 공론(公論)을 실심(實心)의 자세로 임하고 사대부 자신들의 이익보다는 국가와 백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 윤증(尹拯) 선생의 철학을 오늘의 절실한 문제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증의 이러한 철학에 대해 조선 후기 최고의 과학적 실학자인 홍대용(洪大容)이 극찬을 했습니다. 홍대용은 송시열과도 관계가 깊은 노론의 계열의 학자임에도 윤증의 실심실학을 국가의 공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현재 한국의 많은 사회적 악폐(惡弊)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윤증과 홍대용과 같은 학문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창 주간 “지금부터 오늘의 철학대화의 의미있는 성과를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선 한국 유교 전반에 관해서는 물론 한국 고대의 원시사상에 대해서도 해박하신 최영성 교수가 참여해주신 덕택에 우리 철학의 터닦이라는 ‘재세이화’와 ‘접화군생’의 ‘화(化)’의 사상이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새밝힘할 수 있었습니다. ‘화’도 여러 가지 있겠으나 우리 철학의 경우에는 ‘생화(生化)’ 즉 ‘생생화화’라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물리적 변화=물화(物化)도 아니고 화학적 변화=질화(質化)도 아닌 생물·생명적 변화=생화(生化)=활화(活化)라고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살아있는 것까지도 죽이는 사상이 있지만 죽은 것까지도 살게 한다는 것이 주종을 이루는 사상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원불교와 동학사상·철학을 넓고 깊게 연구해 오신 박맹수 교수와 국내외적으로 한국철학의 재구축을 위해서 전력투구해온 조성환 박사, 그리고 한·중·일을 넘나들며 새로운 철학에의 길을 매진해온 야규 마코토 박사의 대화·공동·개신을 통해서 수운기학의 기화의 동태(動態)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연이어 국제적인 시야에서 양명학의 새로운 모습을 밝혀온 최재목 교수의 정치한 퇴계이학의 삼차원인 ‘이발’, ‘이동’, ‘이도’의 설명을 통해서 도덕적 원리를 변혁력으로 하는 도덕적 우주와 인간과 공동체의 틀바꿈의 지평을 열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계적이면서 지방적인 시각으로 철학·사상·윤리의 분야를 개척해온 김용환 교수와 손흥철 교수의 콜라보에 의해서 명제실학의 핵심내용과 당시의 주변정세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정리하고 거기서 ‘실화’를 통한 인간·사회·세계의 변혁 가능성을 갈음할 수 있었습니다.”

<정리/조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