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치비화(17) / 통치방식의 확립과 1차 예산편성

“소요 후 유언비어 횡행… 그 정도가 심해져 유감”

2018-03-04     동양일보

●하라(原)수상과 조선통치

▷야마가미 “1919년의 조선 시정에 대한 계획은 하라다카시 수상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라고 들었는데, 도대체 하라다카시 수상은 조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미즈노 각하께서는 하라다카시 수상과 매우 친밀하시어 시종 접촉하고 계셨으므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되는데,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미즈노 “하라다카시 수상은 당시 정치가들 중에서 조선을 가장 잘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내가 정무총감의 대명을 받들고 부임하려 했을 때 하라다카시 수상은 ‘조선통치사견(朝鮮統治 私見)’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에게 보여 주시면서 ‘이것을 잘 읽고, 만일 자네 생각도 이와 같다면, 그대로 실행해 주기를 바라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의 하라다카시 수상의 사견에 저는 대체적으로 찬성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것도 있었습니다.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몇 가지 사항을 제외한 대부분은 우리들 시대에 실행에 옮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라다카시 수상의 사견을 지금 단계에서는 발표해도 별지장이 없으리라 생각되므로 기회를 보아 만인에게 공개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총독부 관저 개정안을 발표했을 때 하라다카시 수상께서 발표하셨던 담화의 요령만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조선총독부 관제개정에 즈음하여

총리대신(總理大臣) 하라 다카시(原 敬)

조선병합 후 약 10년, 발전 상황에 따라 제반개혁을 개정하려던 중, 뜻하지 않게 동년 3월 조선 각지에서 소요가 일어나게 됨에 따라 그 개혁안이 결국 오늘날까지 연기되기에 이르렀다.

소요의 전말에 관해서는 지금 새삼스럽게 술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요 후 상례라고 일컬어지는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짐에 따라 합방 전의 과거 사실을 마치 지금 일어난 일처럼 전파하는 자도 있어 본인은 이를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정부도 이 소요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공정을 기할 것인가, 소요 당사자가 관리이든, 일반 민중이든 지위여하를 불문하고, 한 치도 용서할 의사가 없다.

수원사건(수원제암리 사건)과 같은 일은 이미 그 책임 장교를 행정처분한 바 있고, 또한 군법회의에 붙여 현재 심리 중에 있는 바, 이로서 정부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이번 조선총독부 관제를 개혁함에 있어, 조선에 다년간 재임하며 진력을 다한 하세가와 총독 및 야마가다(山縣) 정무총감을 경질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본인 또한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나, 두 사람의 사임에 이어, 그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齋藤) 남작 및 미즈노랜타로씨를 임명하였다. 사이토 남작은 일찍이 해군대신의 요직에 오랫동안 재임한 바 있고, 그 인격·기량 또한 세상 사람들이 익혀 잘 아는 바이다. 미즈노씨 또한 일찍이 국무대신의 요직에 있었을 뿐 아니라, 수십 년간 내무행정을 장악하여 이에 능통한 자로 중외에 그 명성이 높은 인물이다. 나는 이 두 사람이 정부의 취지를 받들어 조선에서 제반개혁을 훌륭히 수행해 낼 것이고 이로서 중외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이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조선은 지리상 일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인종은 물론 풍속, 인정면에서도 일본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곳이다. 때문에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는 동등한 제국신민으로서 정치상 하등의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실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근본적으로 차이를 두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합방 당시의 조칙뿐 아니라, 이번 환발(渙發)의 조칙에서도 성지(聖旨)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 명시된 바 있다. 따라서 현재 조선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는 영구불변의 것이 아니고, 종국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도기적 상황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견지에서 이번 조선의 제반개혁을 단행하려는 바, 장래에는 교육산업 및 관리 임용과 같은 영역에서 점차 일본과의 차이를 없애도록 할 것이고, 지방제도에 있어서도 사정이 허락하는 한, 점차 일본과 똑같은 제도를 실행해 갈 것을 본인은 희망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물론 이 목적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 시기의 빠르고 느림은 제도의 힘에 의존하는 바가 클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인의 자각에 의존하는바 또한 매우 크다는 것은 본인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만인이 잘 아는 바일 것이다.

헌병경찰제도에 대해 중외에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헌병제도는 통감부시대의 일시적 편의에서 나온 제도로 처음부터 영구적 제도로 계속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지방 사정이 도저히 허락지 않는 곳을 제외하고는 이를 폐지하여 경찰관으로 대치하고, 지방장관을 소속시켜 경찰업무 일체를 일본과 똑같이 바꾸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들 개혁을 기초로 한 크고 작은 시설은 새 당국자들이 의도하는 바대로 잘 해 나갈 것으로 믿어 여기서 누누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요컨대 일본과 조선이 함께 제국영토 내에서 어떤 차별을 받아야 할 근본적 이유가 없다면 점차 일본과 똑같은 수준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을 조선에 대한 종국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합방의 취지도 관철될 수 있을 것이고, 조선인의 향상 또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개혁에 즈음하여 본인은 이 취지를 널리 중외에 알림과 동시에 이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대정(大正)8(1919)년 8월 21일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 게재)

 

하라다카시 수상은 또 우리들의 부임에 즈음하여 송별연을 베풀어 크게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 때 하라다카시 수상이 한 인사말의 대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라다카시(原) 수상의 송별사

오늘 사이토·미즈노 두 분이 며칠 후 조선에 부임하므로 갑자기 소연을 베풀게 된 것인데, 더위가 이토록 혹심함에도 불구하고 두 분이 출석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또한 사이온지긴모치후작(西園寺公望 1849-1940, 1906년과 1911년 두 차례에 걸쳐 총리로 내각을 조직했음)도 어젯밤 외지에서 귀착하시어 우연히 함께 임석하실 수 있게 되어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번 조선의 개혁에 대해서는 이미 관제개혁을 발표할 때, 제 소견을 발표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중복하여 언급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원래 정부에서는 조선의 관제에 대해 오래 전부터 개혁을 단행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뜻하지 않은 소요로 인해 이것이 연기되었고, 그 후 다행히 소요가 진정되었기 때문에 전부터 추진하려했던 관제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여러 면에서 조선의 제도?법률 등등은 일본과 비교해 볼 때, 어딘지 모르게 차별 대우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는 단지 실제적 사정에 근거한 것이고 일본과 조선 사이에 차별을 두어야할 하등의 이유가 근본적으로 있을 리 없습니다. 합방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제반 사정을 되돌아보면, 이 내막을 명료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국에 이르러서는 조선도 일본과 똑같은 지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정 여하를 불문하고 지금 즉시 무리하여 조선을 일본과 똑같이 만들어 놓고 이로서 일선동화(日鮮同化)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됩니다, 어디까지나 조선에는 조선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컨대 조선의 교육·산업 및 기타 제반시설이 우리 일본의 시설과 동등한 지경에 도달할 시기가 하루 속히 도래할 것을 우리들은 간절히 희망하고 있으며, 만일 조선이 그와 같은 위치에 이르러 민심이 안정을 얻게 되면, 조선 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도 점차 일본인의 진의를 양해하게 될 것이고, 망동을 일삼는 자 또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의 일단을 되돌아보면 오해에서 생긴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생각건대 앞으로는 점차 이러한 오해를 풀어야 할 것이고, 일본 조선인(內鮮人)의 완전한 융화를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새 당국자들의 솜씨를 신뢰하며, 저는 여러분들이 모든 일을 그때그때의 형편에 잘 맞추어 처리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또한 확신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혹서의 시기인 바, 두 분의 자애(自愛)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1919년 8월 27일 대판매일신문 게재)

 

●통치 방침의 결정

▷미즈노 “하라다카시 수상의 송별사를 뒤로하며 우리들은 1919년 9월 조선에 부임했습니다. 당시 인심은 실로 흉흉했고, 불온한 분위기가 전 조선에 걸쳐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매우 고심했습니다. 사이토 총독은 착임하자마자 관리들에게는 훈시를, 일반 민중들에 대해서는 유고를 발포하여 통치 방침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개략적인 사항만을 제시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을 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았는데, 한일합방은 시기상조였다던가, 앞으로도 조선의 자치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등 정치가와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때문에 조선인들도 귀착점을 정하지 못한 채 헤매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한 분쟁이 곳곳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 엄청난 지장을 초래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이런 때일수록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는 분분한 이론을 하나로 통일하여 조선에 대한 통치 방침을 확립한 후, 통치에 임하지 않으면 너무나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많은 연구를 거듭했고, 그 결과 드디어 조선 통치 방침이라는 것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방침으로서는 첫째, 조선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당시 조선인들은 틈만 있으면 독립을 주창했고, 또한 독립을 표방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세웠고, 미국 하와이에 독립기성단체를 결성한다든가 하여 이들 단체가 조선과 일본에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각종 악선전을 함으로써 조선인의 인심을 동요시키는가하면, 무지한 조선인들로 하여금 앞으로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정부는 조선을 통치하는 방침의 하나로 어떤 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조선의 독립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명확히 선언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다는 것은 1910년 한일합방 당시부터 확립되어 있었던 국책이었음은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 한일합방은 시기상조였다든지 이제 민족자결은 피할 수 없는 명제인 만큼 조선의 경우도 어쩔 수 없이 이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는 논의를 펴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조선독립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조선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조선 자치론이라는 말, 또한 당시 자주 주창되었던 용어였고 학자들이나 정치가들 중에서는 적어도 조선의 독립은 허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치 정도는 허용해 주는 것이 지당하다는 주장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 점 또한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조선자치 또한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선언했습니다. 원래 조선자치론이라는 것이 조선독립론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므로 이 점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결국 조선자치론에서 곧 독립론으로 비약해 나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자치 또한 불가하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느껴 이 방침을 명확히 선언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