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포럼 / 한·일 국제학술회의 발제-일본인의 사생관 Ⅲ

—남성적 사생관에서 여성적 사생관으로 전환이 바람직?—

2018-08-05     박장미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현대 일본 사회는 죽음을 금기시하고 늙음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다. 핵가족화가 진행된 결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과 노쇠를 가까이에서 체험하는 기회도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노인이 자기 집이 아니라 병원과 노인시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적어졌다는 것, 현실감이 희박한 사별(死別) 체험이 현대 일본인에게 생의 존엄성과 죽음에 대한 상상력을 더욱 희박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의료과학계 대학에서, 2014년부터 일반교양강의인 ‘철학과 사생관’을 맡고 있다. 오늘날 글로벌화된 세계, 초장수(超長壽)사회에 요구되는 사생관은 죽음이라는 존재 소멸을 ‘체념’으로 받아들이는 일본 고래의 자기완결적인, 말하자면 남성적인 사생관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명을 애지중지하고, 다른 ‘생명’과의 만남을 소중히 하면서, 삶과 죽음을 공유하는 여성적인 사생관이 아닐까?



1. 죽음이라는 ‘이별’

일본인의 ‘죽음’에는 이 세상의 무상함, 덧없음을 상징하는 것으로서의 죽음은 있어도, 서양과 달리 죽음을 절망과 공포로 보고 ‘나쁜 것’으로 여기는 생각은 없다.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수강 학생의 대부분이 공감하는 것이 죽음을 ‘이별’로 보는 생각이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를 여윈 경험을 가진 학생일수록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일본의 작별인사인 ‘사요나라(안녕히 가/ 계십시오)’, ‘사라바(잘 있어라)’는 ‘그렇다면/ 그럼’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러면 다시 봐요./ 그럼 이만 간다.’라는 이미 지난 일에 대한 결별이자 새로운 것/ 세계에로 이행(移行)‧ 출발을 나타낸다. 죽음이란 친한 사라들, 낯익은 세계, 모든 ‘관계’와의 궁극적‧ 결정적인 ‘안녕/ 잘 있어라.’이다. 죽음을 이별로 보는 것은 대부분의 학생에게도 아주 친근감이 있는 것 같아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2. ‘체념’으로서의 죽음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지방(東北地方)을 엄습한 거대 지진(동일본대지진)은 엄청난 해일을 일으키고, 2만 명을 넘는 사상자․ 실종자를 냈다. 지진 직후에 현지에서 취재한 세계의 언론 매체가 특히 주목한 것은 재난을 당한 일본인들이 자주 말한 것이 ‘시카다가 나이(어쩔 수 없다)’ 혹은 ‘쇼가 나이(할 수 없다)’ ‘가망(참고 견디자)’이라는 일본어였다. 재해 다음날에 프랑스의 ‘르몽드’는 Shikadaga nai라는 제목으로 보도하고 해설했다. 미국신문 ‘타임’도 Shioga nai라는 기사를 냈다. ‘시카다가 나이’ 혹은 ‘쇼가 나이’를 일본인 특유의 ‘체념’을 표현한 말로 이해한 것이다.

일본은 옛날부터 자연재해대국이었다. 매년 일본열도를 습격하는 태풍, 지진, 해일, 산사태, 호우와 홍수, 거기서 생기는 다수의 사망자들.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자연의 무정함과 거대한 폭력, 자연필연의 운행에 의해 일어나는 불가피한 ‘죽음’—일본인은 그것을 ‘쇼가 나이’, ‘시카다가 나이’라고 하면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3. 불사(不死)의 고양이 죽음 ‘100만 번 산 고양이’

‘사생관’ 강의에서 소개하고 해설한 사생관에 관한 책들 중에서, 간호학부와 약학부 여학생들이 큰 관심을 보인 것이 사노요코(佐野陽子, 1948-2010)가 지은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였다. 1977년에 출판된 이래로 200만 부 이상 판매된 롱셀러로 사생관에 관한 학술논문에도 언급된 책이다.

100만 번 죽고 100만 번 다시 태어나면서 결코 사멸(死滅)되지 않는 불사(不死)의 고양이 이야기이다. 그 고양이가 난생 처음 사랑한 암고양이의 죽음에 통곡한 끝에 조용히 죽어갔다. 마지막 장면은 고양이의 집을 둘러싼 광막한 초원에 풀꽃 피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대자연 속에 고요히 돌아가는 ‘죽음’, 이것이 바로 일본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사생관을 말해주고 있다. 여학생들이 특히 이 그림책에 큰 공감을 나타내는 것은 자연회귀라는 일본적인 정감에서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깊은 공명, 그것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는 깊은 비애(悲哀)—바로 여기에 생명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공감한 것이었다.



4. ‘모두 덧없는 물거품’

나는 죽음을 두 번 가까이에서 겪은 적이 있다. 그 체험 이래 마음 깊숙이 담겨진 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유행한 노래 ‘메이지 일대녀(明治一代女)’의 가사(歌詞) 한 구절이었다. ‘원망 안 해요, 이 세상의 일은. 불꽃놀이와도 같은 목숨. …… 모두 덧없는 물거품이니까.’ 이와 같은 나의 사생관은 죽음을 ‘체념’으로 이해하는 일본적 사생관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는 하나, 너무나 남성적인 사생관이라고 해서 여학생들에게는 평이 좋지 않았다.



5. 난치병 소녀의 죽음 ‘1리터의 눈물’

‘100만 번 산 고양이’와 함께 강의에서 여학생들이 크게 반응한 것이 난치병과 투병하다 죽은 소녀의 일기(日記)인 기토아야(木藤亞也)의 ‘1리터의 눈물(1986)’이다. 2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로, 영화가 되고 이어서 인기 TV드라마(2005, 2007)가 되면서, 삽입곡 ‘가루눈(粉雪)’도 크게 히트하였다. 이 책은 이미 고인이 된 나의 친구가 취재․ 기획․ 편집해서 세상에 내놨던 것이었다.

저자는 15세에 온몸의 운동기능이 상실되는 난치병 척추소뇌변성증(脊椎小腦變性症)의 발병으로 25년의 생애를 마치었다. 일기는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 있니? 나의 삶의 보람은 도대체 무엇일까? 살아 있는 것이 좋니?’와 같은 물음으로 가득 차 있다. 손잡이를 잡고도 설 수가 없는 저자는 화장실까지도 기어서 갔다. 뒤에 인기척이 있다. 멈추어서 뒤돌아봤다.

그러자 같은 모습으로 기어오던 어머니가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바닥에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말이다. 이것을 보고 억누르던 감정이 한꺼번에 솟아오르고 소리 높여 울었다. 저자는 일기 마지막에 ‘고-마-워-요.’라고 적고 세상을 떠났다.

책의 내용을 소개하다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 있니?’라는 저자의 절규 앞에 여러분은 어떤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6. 시대가 요구하는 사생관

어떤 여학생은 ‘생명의 가치는 단지 수명의 길고 짧음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아야씨(저자)는 젊은 나이에 생을 가감했지만, 자상한 어머니의 넘치는 애정 속에서 살았다.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하는 바로 그것만으로도 어머니와 주위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고-마-워-요’라는 감사의 말은 그녀가 불행 속에서 죽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평했다. 간호학부의 여학생도 ‘이 모녀와 같은 생명의 깊은 결부를 단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람도 결코 적지 않다. 아야씨와 어머니 사이에서 굳게 맺어진 사랑, 병에 지지 않는 강한 정신력, 이것은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죽은 후에도 오래도록 산다. 아야씨는 그것을 증명했다.’라고 썼다.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살다가 죽어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입장을 말하는 답안이 특히 여학생에게서 많았다.

개개의 존재 소멸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일본 고래의 산뜻하고 남성적인 사생관을 나 자신은 좋게 생각한다. 그러나 젊은 여학생의 대부분은 산뜻한 ‘체념’의 경지나 ‘모두 덧없는 물거품’이라는 식의 자기연민에 탐닉하는 남자들보다 훨씬 현대적인 사생관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사람들을 분단과 고립으로 몰아가는 현대세계의 글로벌리즘 안에서 요구되는 사생관은 자기 혼자서 완결되는 남성적인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를 대전제로 하면서, 다른 ‘생명’과의 만남과 그 활동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삶이자 죽음이라는 자각에서 나오는 여성적인 사생관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21세기의 일본인과 일본사회에는 여성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 바람직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