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포럼 / 노년철학 2회 국제회의 한·일 노인상(老人像) 대비 - 새로운 노인상을 찾는다

노년기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의 삶과 사상 - ‘한산시(寒山詩)’에 나타난 공(空)과 늙음- / 데구치 야스오(일본 교토대 교수)

2018-08-26     박장미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노년기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의 삶과 사상 - ‘한산시(寒山詩)’에 나타난 공(空)과 늙음-

데구치 야스오(일본 교토대 교수)



●늙음에 즈음하여

늙는다는 것은 심신이 쇠약해진다는 것이며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늙는다는 것은 오래 산다는 것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괴로운 이별을 많이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으로는 자기보다 젊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예를 들면 아직 어린 아이나 손자의 죽음에 직면해야 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아니 늙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가?

친한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늙음을 다하는 것, 그러한 삶 내지는 늙음의 실마리를 여기서는 전후(戰後)의 교토학파(京都學派)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 1900-1991)의 저작인 ‘한산시(寒山詩)’(1974)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한산(寒山)이란 누구인가

중국 당(唐)나라 시대 불교의 성지인 천태산(天台山)에 한산(寒山)이라는 은자가 있었다. 해진 옷을 입은 모습으로 출신도 정체도 불명의 이 남자, 과연 인간인지조차 알 수 없다. 실제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신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어느 날 친구인 습득(拾得)과 함께 홀연히 사라지고, 그 뒤에는 깊은 산속의 바위 등에 쓰인 수많은 시가 남겨졌다. 세상에서 말하는 ‘한산시(寒山詩)’이다.

물론 실제로 한산이라는 남자가 있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한산시가 언제 어디서 지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한산시’라고 불리는 일련(一連)의 시가 오늘날까지 연면히 전해 내려오고, 투철한 선(禪)의 경지를 표현한 작품으로 역대의 선승들과 사상가들에게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는 사실뿐이다.



●니시타니 게이지(西谷啓治)와 ‘공(空)의 철학’

당시 70세대였던 니시타니 게이지도 또한 한산시의 해석에 착수한 한 사람이다. 교토학파의 창시자인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를 스승으로 모시고 하이데거에게도 직접 배운 니시타니는 독자적인 ‘공(空)의 철학’을 전개했으며, 그 저작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원래 교토학파(京都學派)는 동아시아적인 ‘참된 자기(自己)’관을 현대적으로 전개하려고 한 철학운동이었다. 대승불교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토학파가 말하는 진정한 자기란 개인주의적인 자기관(自己觀)과 대립되는, 세계 전체까지도 덮는 전체론적(全體論的)인 자기임과 동시에, 모든 2항 대립을 초극(超克)한 존재로 개념화시켜 왔다. 이러한 자기관을 이어받으면서 그것에 대해 역설(逆說)과 정념(情念)의 옷을 입혀서 철저하게 실존주의화(實存主義化)시킨 인물이 바로 니시타니였다. 그의 철학의 키워드인 ‘공(空)’의 핵심적 의미는 실존주의화된 동아시아적인 진정한 자기와 다름없다. 그것은 “비존재로서 존재한다.”라거나 “삼라만상과 일체화된 한편으로 결정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식의 모순 내지 긴장감을 내포한 역설적인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만년의 니시타니는 ‘공’을 단지 지적인 개념으로써가 아니라, 감정과 의지에 물들은 심상 이미지로 파악했다. 한자의 ‘공(空)’에는 ‘텅텅 비다’라는 의미와 더불어 ‘천공(天空)’이라는 의미도 있다. 니시타니는 ‘공’의 이 두 가지 의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공’에 “맑게 갠 푸른 하늘”이라는 이미지를 겹치는 것으로, 그에 대해 허무주의가 주장하는 모든 가치의 무근거성(無根據性), 인생의 무의미함, 이 세계의 무자비함을, 체념과 자비로움으로 받아들이기를 다짐하는 ‘화해정의(和解情意)’라는 의미를 함의시키기에 이르렀다. 공으로서의 진정한 자기에는 ‘허무주의를 껴안는’ 성격이 부여된 것이다.



●두 개의 노경:‘활로(闊老)’와 ‘유로(幽老)’

 니시타니는 이와 같은 역설과 정념에 물들은 참된 자기를 핵심으로 하는 공의 철학의 시각에서 한산시의 선의 경지를 읽어냈다. 한산시 안에는 늙음의 경지를 읊은 시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보이는 한산의 노경을 공의 철학으로 풀이하는 시도야말로 ‘한산시’에 있어서의 니시타니의 ‘늙음의 철학’인 것이다.

한마디로 노경이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 나이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또 여기서 나이는 실제 연령보다 체력‧ 기력의 연령이 더 중요하게 될 것이다. 니시타니도 한산시 속에서 두 가지 다른 노경을 찾아냈다. 하나는 “들어가기 시작한 노경에 평안히 하고 즐기는 심경”이라 하고, 또 하나는 “노성(老成)에서 죽음에 이르는 내리막길 단계”에서 “다 마른 것 같은 초탈(超脫)”을 체현(體現)하는 경지라고 한다.

옛날부터 수묵화에서 사용되어 온 ‘멀음’의 표현에는 ‘심원(深遠)’, ‘활원(闊遠)’, ‘유원(幽遠)’과 같은 몇 가지 구별이 있다. 여기서는 첫 번째의 ‘늙음을 활달하게 즐기는 경지’를 활로(闊老)라 하고, 두 번째의 고담(枯淡)의 경지를 다한 심경을 유로(幽老)로 임시로 이름 짓기로 한다.



●한산, 늙음을 즐기다

니시타니가 활로의 경지를 찾아낸 시에서, 한산은 여느 때처럼 자기가 사는 깊은 산속의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춥고 준엄한 풍경을 읊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말하자면 정색한 듯 황량한 자연이기 때문에 오히려 “바람직하다”라고 하면서, 자기에는 여기보다 그리운 곳은 없다고 까지 말한다. 그러고서 자기 몸을 돌이켜보면서 “저절로 너그럽게 늙어가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니시타니는 ‘명랑함’, ‘밝음’, ‘너그러움’과 같은 한산의 기상을 읽어내면서, 거기에 ‘영원히 고요하고 맑은 푸른 천공’의 이미지를 겹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천공’은 바로 후기 니시타니 철학의 화해정의에 의해 채색된 심상(心象) 이미지로써의 ‘공’이다.

이러한 화해정의로써의 ‘공’을 내세움으로써, 니시타니는 이 시에서 자연의 어려움과 무자비함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고 포옹하려고 하는 화해정의 그 자체가 된 한산을 찾아내고 있다. 니시타니가 생각한 화해정의란 더 이상 화해의 대상과 주체와의 구별이 없다. 여기에 있는 것은 객관적도 아니고 주관적도 아닌 (혹은 객관적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이기도 한) 화해정의가 있을 뿐이다. 니시타니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혹은 인명)으로서의 ‘한산’과 산(혹은 산 이름)으로서의 ‘한산’은 일체화되고 그 주변에는 화해라는 분위기만이 감돌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화해정의는 한산 자신의 늙음에도 향한다. 날마다 실감되는 가차 없는 심신의 노쇠, 한산은 그것을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않았고, 물론 노화 예방에 열중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늙음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포옹한다. 말 그대로 “저절로 너그럽게 늙어가라”이다. 다시 말하면 한산은 완전히 늙음에 대한 체념과 자애로움의 정의(情意)가 됨으로써 늙음 그 자체와 동화하고 있다. 여기에는 활짝 열린 마음으로 늙음을 즐기는 한산이 있다. 아니 오히려 활달한 늙음 그 자체가 된 한산이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여기에는 늙음도 한산도 없어지고 단지 화해정의로써의 공만이, 주변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니시타니가 한산시에서 보게 된 활로로서의 노경인 것이다.



●한산, 죽음을 살다

니시타니가 여기서 유로의 경지를 읽어낸 것은 예를 들면 “한산의 길은 도달한 이가 없다(寒山道, 無人到)”라는 말로 시작되는 시는 한산시 중에서도 한 구절이 세 문자로 이루어진 삼언시(三言詩)이다. 이와 같은 삼언시에도 “혼자 스스로 앉는 한 늙은 할배(獨自座, 一老翁)”라는 늙음에 관한 말이 포함되어 있다. 한 구절이 다섯 문자로 이루어진 오언시(五言詩)로 쓰인 다른 한산시에 비해 이러한 삼언시로 사물은 자연스럽고 더욱 간결하고 단순하며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니시타니에 의하면 거기서는 사물은 “골수만 남기고, 가죽과 살을 깎아버린”듯 고담(枯淡)한 정취가 끼어든다. 여기에 니시타니는 ‘죽음의 그림자’를 본다. 아니, 더욱 노골적으로 말하면 ‘시취(屍臭)’를 맡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들 삼언시의 주제는 여전히 한산이 산속에서 지낸 ‘유거(幽居)’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유거’의 ‘그윽할 유(幽)’의 의미가 ‘세상에서 숨은 것’이라는 통상적인 뜻으로부터 ‘유명(幽冥)’으로서의 ‘죽음’의 의미로 변용되어 있다고 니시타니는 말한다.

한산 스스로도 당연히 그 죽음의 그림자인 ‘유’의 기색을 띠게 된다. 그의 육체는 “살이 빠지고 피부는 주름지며 기름기도 없어져서 바싹 마른(枯槁) 상(相)을 나타내며” 또 그 마음도 “날카롭고 재빠르며 활기찬 기운 같은 것이 사라지고” “모호한 아득함(茫洋) 속에” “늙고 망령된 상을 나타내고” 있다. 즉 활짝 열린 마음으로 늙음을 즐긴다고 하는 활로의 경지를 이미 떠나버리고 있다.

이러한 상태를 니시타니는 “죽음의 그림자가 유명(幽冥)의 경계로부터 솟아오르고 그의 주변에 가득 차 있듯” 하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다시 “밝고 조용한 ‘공’ 속에 막 사라져가는 바로 그 순간에 멈춰선 것만 같은” “풍자(風姿)”, 단순한 초탈(超脫)을 넘은 “그 초탈성조차도 완전히 말라버린 것만 같은 초탈”이라고도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은 ‘죽음’을 의미한다.) ‘활로’가 ‘장년부터 노성(老成)에 이르는 오르막의 단계’였다고 한다면, 여기에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노성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내리막의 단계’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내리막의 단계’에 “임운무작, 청정무류(任運無作, 淸淨無類)”라는 “최고의 묘경(妙境)”이 실현되어 있다고 니시타니는 지적한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의미의 노성” “참된 의미의 ‘늙음’의 풍격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과 몸이 모두 극도로 쇠약해지고 장차 죽음을 기다리기만 하는 상태가 되면서도, 그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심경,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유로인 것이다.

이 유로에서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단순하게 말하면 한산은 이제 ‘죽고가고 있다’. 그러나 니시타니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지 ‘한산은 지금 아직 살아 있지만 머지않아 죽는다.’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아직 ‘죽음은 어디까지나 장래의 일로 그것이 장래에 머물고 있는 이상 한산은 역시 살고 있다.’고 하는 생각이 숨어있다. 더 말하면 여기에는 ‘살아 있는 이상, 아직 죽지 않다.’ ‘죽은 이상 이미 살고 있지 않다.’라는 식으로 삶과 죽음을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엄격히 구분하는 사고방식, 즉 삶과 죽음의 2원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가 한산의 주변에 가득 차 있다.”고 할 때, 니시타니는 그 이상의 일, 즉 한산은 ‘죽어가면서 살고 있다.’ 혹은 ‘살면서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유로의 경지에 있는 한산은 바로 죽음을 살고 있고, 죽음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니시타니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노경이자 참된 늙음이라고 갈파한 것이다.

니시타니는 늙음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혹은 멸滅)과 더불어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즉 늙음은 삶과 죽음과는 다른 ‘제3의 범주’인 것이다. 니시타니에 의하면 이 제3의 범주는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삶이기도 하고 죽음이기도 하다. 그러한 것으로 늙음은 ─특히 유로라는 노경의 극치는─ 삶과 죽음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통념을 타파하는 결정적인 반례(反例)라고 니시타니는 생각했었을 것이다. 죽음을 산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의해 삶과 죽음의 2항 대립을 뛰어넘는 것. 이것이 바로 유로라는 경지에 깔린 기조인 것이다.

앞에서 니시타니가 죽음을 “밝고 조용한 ‘공(空)’”에 비유한 것을 보았다. 이 ‘공’이란 “맑게 갠 푸른 하늘”, 즉 화해정의의 상징으로 심상 이미지화된 하늘이다. 유로란 죽음에 대해 정의적(情意的)으로 화해를 이룬 심경이기도 한다. 여기서 죽음은 이미 기피의 대상도 우려의 대상도 아니다. 당연이 죽음의 체험으로서의 늙음도 또한 인생의 피하기 어려운 고민거리로 는 부정적인 각인을 찍힌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늙음과 죽음을 고민거리로 보는 불교의 기본원리(사체四諦의 하나인 고체苦諦)에 대한 명확한 이의제기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불교로부터의 도교적 일탈로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교리적인 비판에 대해서는 한산도 니시타니도 끝까지 안 들은 척할 것이다. 그것이 정통적인 불교가 아니라면 그것도 또한 좋다. 그것이야말로 선의 진면목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크게 웃으면서 어딘가에 모습을 감출 것이다.



●지속적이고 체험 가능한 죽음

이와 같이, 한산시에 입각해서 전개된 니시타니의 늙음의 철학을 살펴보았다. 다음은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말하지 않는 함의를 꺼내고자 한다. 우선 죽음에 대해서이다.

보통 우리는 죽음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순간’으로 보고 있다. 죽음이란 무엇보다도 우리의 육체가 뇌사(腦死)든 심장사(心臟死)든 모든 세포의 죽음이든 그 생물학적 죽음은 순간적인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물학적 죽음을 우리는 결코 체험할 수 없다. 우리의 경험은 순간적인 생물학적 죽음과 함께 끝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을 끝내는 그 순간은 우리의 경험 영역 밖에 있다. 쇼펜하우어도 하이데거도, 메르로=퐁티도 서양의 많은 철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니시타니는 다르다. 한산의 노경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지속적이고 체험 가능한 죽음’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나는 여겨진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유로의 경지에 이른 한산은 죽음을 살고 있었다. 그에게 자기 죽음은 체험이 가능하고 그의 유로의 경지가 계속되는 한 그 죽음도 또한 지속되게 된다. 그러면 언제부터 죽음이 시작되는 것일까? 달리 말하면 사람은 언제부터 유로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일까? 죽음의 체험으로서의 유로에도 명확한 시작의 순간은 없다. 사람은 서서히 늙고 그 늙음이 깊어짐과 더불어 서서히 유로의 심경에 들어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도 역시 서서히, 쥐도 새도 모르게 그 곁에 찾아온다. 그리고 심신이 쇠약해짐에 따라 그의 유로의 경지도, 그리고 유로로서의 죽음 그 자체도 서서히 깊어져간다. 그리고 그 죽음의 깊이는 그 사람의 생물학적 죽음과 더불어 최고조에 이른다. 이것이 니시타니의 늙음의 철학에서 엿보이는 죽음의 방식인 것이다.

이와 같이 순간적이지 않고 또 경험 불가능하지도 않은, 말하자면 그러데이션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생각은 별로 니시타니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우리는 예컨대 선의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