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포럼 / 노년철학 2회 국제회의 - 한일간 노인상 대비 : 새로운 노인상을 찾는다

노년기 성운의 삶과 사상

2018-09-06     박장미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1. 들어가는 말

조선 역사에서 16세기는 피로 물든 시대였다. 네 번에 걸친 사화는 수많은 관료와 지식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뜻있는 지식인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지방에 은거하는 삶을 살도록 한 전환기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가 바로 성운(成運, 1497-1579)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한 성운은 그의 나이 49세이던 1545년에 보은으로 내려와 30년 넘게 자연과 벗하며 노년기를 보낸 재야지식인이었다. 그래서 비록 많은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을지라도, 그의 고매한 인품과 삶의 태도 및 사상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노인철학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은퇴하고 귀촌하는 사람들도 증가하면서 귀촌 이후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16세기 난세에 귀촌하여 존경받는 노년기 삶을 보낸 성운의 삶과 철학은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2. 대곡 성운의 노년기 삶

1497년(연산군 3) 서울에서 태어난 성운은 호가 대곡(大谷)으로, 젊은 시절 세 번에 걸친 사화를 거치면서 성장하였다. 한 때 어머니를 위하여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특히 그의 나이 49세였던 1545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그의 형도 죽음을 당하였다. 이를 목격한 성운은 과감히 서울을 떠나 그의 처가인 보은으로 귀촌하여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노년기를 보냈다.

보은 종곡으로 내려온 성운은 자연을 벗 삼아 시와 거문고로 소일하였다. 그는 시를 통해 산과 들을 노래하고 술잔을 들며 한가로운 시골생활을 즐겼다. ‘홀로 종산에 들어와서, 쓰러져 가는 초막에 누웠노라. 하늘 높은데 고개 굽힐쏘냐, 땅 좁아도 무릎 펼만하네.’ 그의 대표적인 시이다. 성운은 자연과 벗하며 소박한 삶을 살면서도 겸손하고 홀로 자족하면서 전원생활을 만끽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율곡 이이의 평가는 그의 보은 생활을 잘 말해주고 있다.

“성운은 산림에 고요히 살며 어지러운 세상을 사절한지 40여 년이었다. 집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 산수가 좋은 곳이 있어서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한가한 날이면 소를 타고 가서 홀로 앉아 가끔 거문고를 두어 곡 타며 스스로 즐길 뿐이었다. 거문고를 듣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는 오히려 타지 않았다. 착한 것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였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살림살이의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으며 간혹 끼니를 굶는 일이 있어도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율곡전서, 권30).

이와 같이 성운은 보은에 은거한 이후 책과 거문고와 함께 청빈낙도를 즐기면서, 늘 자연을 벗하였다. 특히 성운은 속리산을 매우 좋아 하였다. 우암 송시열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속리산을 사랑하여 나는 듯이 홀로 가서 며칠 만에 돌아오곤 하였다. 속리산 수석 사이를 거닐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술만 거나하게 취하면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곤 하였다. 거문고 소리는 매우 고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성운은 이렇게 자연과 벗하면서 속리산 산사람으로 살았지만, 현실 정치에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필요한 경우 상소문을 올리거나 글을 지어 그의 정치적 견해를 소극적이나마 피력하였고 현실 비판과 개혁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57세이던 1553년에는 큰 가뭄이 들자 그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였고, 수령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시를 통해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과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그의 주된 관심은 은거하면서 자연과 벗하는 은자(隱者)로서의 긍정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성운의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지식인 학자였다. 그 때문에 글과 시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한편, 때로는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강학을 하고 시국을 논하기도 하였다. 그를 찾아 보은까지 찾아온 대표적인 인물은 지리산 산청에 자리잡은 남명 조식(曺植, 1501-1572), 독자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제시하고 황진이와의 일화를 남긴 서경덕,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이지함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16세기에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이 주도하는 주류 성리학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삶을 산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이들은 유일(遺逸), 처사(處士), 일민(逸民), 기사(奇士) 등으로 불리어지는 공통점이 있다.

동주 성제원(成悌元, 1506-1559)은 자청해서 보은현감으로 내려와 성운과 벗하였다. 그는 보은현감으로 있으면서 풍류를 즐기면서도 선정을 베풀었다. 1555년에는 보은 삼년산성 안에 충암 김정을 향사하는 삼년성서원(현 상현서원)을 건립하였다. 이는 충청도 최초의 서원으로 보은, 더 나아가 충청도지역의 성리학이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필연코 서원 건립에 성운이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나,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성운이 그 공을 현감인 성제원에게 넘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은에 충청도 최초로 서원이 건립되고 2년이 지난 즈음, 성운에게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산청에 있던 남명 조식이 찾아온 것이다. 그 해가 성운이 환갑을 맞은 1557년이었으니, 아마도 남명이 지리산에서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온 것은 환갑을 맞은 성운을 축하해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 자리에는 남명 조식 외에 서경덕과 이지함도 함께 있었다. 이 모임은 당대 최고의 산림처사(山林處士)들이 보은에 집결한 것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특히 남명은 어린 시절 서울에서 성운과 이웃해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잠을 잤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남명은 성운의 부탁으로 산청으로 돌아가기 전에 성운의 문인인 최흥림(崔興霖, 1506-1581)의 금적정사에서 여러 생도들을 모아 강론을 한 뒤 되돌아갔다. 최흥림 역시 을사사화 이후 서울을 떠나 가족과 함께 보은 금적산으로 들어온 인물이다. 이때 성운은 이별의 슬픔을 다음과 같은 시로 대신하였다.



금적정사 구름 깊은 곳에

그대를 보내노라니 두 줄기 눈물,

천리이별을 어찌 감당하랴

평생의 시름을 풀지 못하였는데 (중략)

돌아가는 산은 하얀 달을 안았으니

속세의 꿈을 아득히 부치노라



남명과의 이별은 각별하였다. 두 사람 모두 노년기에 접어든 데다, 각각 속리산과 지리산 깊은 산속에 은거한 처지인지라 자주 볼 수 없기에, 평생의 시름을 나누던 두 친구의 이별의 정은 매우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보은현감 성제원은 다음해 8월 15일 가야산 해인사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나, 성운은 가지 못하고 대신 시를 지어 보냈다. 그 시에 ‘만일 종산에서 농사짓는 늙은이를 묻거든, 해가 더할수록 병을 걸고 산다고 알려주게나’ 한 것으로 보아, 성운은 몸이 아파 가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환갑을 맞아 남명 조식과의 회포를 풀고 보은현감 성제원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공주로 귀향한 뒤, 성운의 노년기 삶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젊은 시절 같은 이불을 덮은 남명 조식과 술에 취해 시냇가에 함께 누웠던 동주 성제원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 흐르는 물과 떠돌아다니는 구름만 옛날 같을 뿐이었다. 그들이 떠나간 곳에서 성운은 한결같이 자연과 벗하면서 청풍명월을 노래하고 하루하루의 흥취를 시로 담아내곤 하였다.

세속을 벗어나 한가롭게 살아가는 그에게 가장 큰 유혹은 당시 지식인이면 누구나 꿈꾸는 벼슬살이였다. 정치적인 권력과 부귀영화가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호하게 세속의 욕망을 끊고 자연을 선택하였다.

실제 성운은 보은으로 은거한 이후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번번이 거절하였다. 특히 70세이던 1566년 6월에는 명종 임금이 종친들이 체계적으로 학문을 닦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여 스승을 가려서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이때 보은에 은거해 있던 성운도 남명 조식 등과 함께 적임자로 추천을 받았다. 성운은 서울까지 올라갔으나, 곧 사직하고 보은 종곡으로 귀향하였다. 1573년에도 선조 임금이 두 차례나 불렀어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나이 77세였다. 그럼에도 국왕은 번번이 그에게 약과 음식물, 옷 등을 하사하고 의원을 보내줄 정도로 극진히 돌보아주었다.

이렇게 국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던 성운은 ‘대인작(代人作)’이란 글을 올려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수령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 글에서 성운은 전임 현감을 역임한 성제원이 인(仁)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서원을 건립하여 지역학문을 육성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와 같은 수령을 보은현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성운은 필요한 경우 글을 통해 현실 비판과 정책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삶은 기본적으로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은자로서의 삶에 충실하였고 모범을 보였다. 1579년 83세에 세상을 떠나자, 선조 임금은 제문을 지어 내려보냈을 정도이다.

성운의 삶과 사상은 은자로서 소박하고 낮은 삶이었지만, 그가 떠난 뒤 많은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다. 또한 그의 학맥과 학풍은 보은을 중심으로 성리학이 뿌리내리고 지역문화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성운을 따라 보은으로 귀촌한 최흥림은 스스로 성운의 문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두 아들 역시 성운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호방하고 쾌활한 시풍으로 이름을 날린 임제(林悌, 1549-1587)도 보은으로 내려와 성운으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주자의 해석방법을 비판하고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17세기 가장 혁신적인 학자로 평가받고 있는 윤휴(尹鑴, 1617-1680)도 외가인 보은에서 성장하면서, 성운의 언행록을 읽고 큰 감회를 받았다. 남인 실학파의 기반을 다진 허목(許穆, 1595-1682)의 학맥과 학풍에도 성운이 많은 영향을 미치었다고 한다.

성운이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30년 넘게 학문을 연마하던 곳은 1887년에 후학들이 모현암(慕賢庵)이란 현판을 걸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모현암은 25평 규모의 목조기와집으로, 현재 그의 처가인 경주김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의 묘소 역시 그의 시에서 종종 등장하는 종산의 앞산에 있다(보은읍 성족리, 충북기념물 제71호).



3. 대곡 성운의 인품과 사상

성운은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단아하며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남의 잘못을 보아도 말하지 않았다. 물건을 취하는 데도 의리를 지켜 온 고을 사람이 모두 그를 추앙하였다고 한다. 또한 청렴하고 기개가 있었다.

그는 자연과 벗하면서도 학문을 연마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은 성운이 청풍명월을 즐기면서도 성리학 공부에 마음을 쏟고 의리를 준수하였다고 하면서 성운의 고상한 품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반면에 퇴계 이황은 성운이 노장사상에 기울었다고 하면서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성운 사상의 뿌리는 성리학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도에 뜻을 두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19세기 실학자인 성해응은 조선시대에 학식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재야에 파묻혀 살았던 100인의 지식인을 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