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식민주의 사상이 미친 재일외국인 교육의 실태

2020-02-16     동양일보

[동양일보]●전후 일본 사회의 전전(戰前)적인 체질

‘김희로 사건’은 일본인 자신의 문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나 자신이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이라는 사실, 그 때문에 일본인 안에서 정신적인 족쇄를 차고 고통에 찬 길을 걸어야 했다. 부모도 형제도 걸어 온 이 길의 문제”를 일본인이 자기의 문제로서 어느 정도나 받아들이고 심사숙고하는가에 따라 이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과 정도가 정해진다. 또한 바로 여기에 김희로가 일본인에게 던진 문제의 사상적 핵심이 있다.

이를 위한 소재는 김희로의 손에 의해 ‘김희로 공판대책위원회’의 원조를 받아 제출되었다. 하나는 ‘급장이‧울보‧응석받이 재일조선인의 내력(三省堂書房)’이고, 다른 하나는 ‘김희로의 법정 진술’(김희로 공판대책위원회, 三一書房)인데, 후자는 9시간 반에 걸친 그의 시즈오카 지방재판에서의 의견 진술을 모두 재록한 것이다.

모두가 그의 인간 형성사에 입각하여 재일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의 실태를 이야기하고 있고, 민족적 차별의 누적이 그의 사상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결정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될까?, 일본인은 과연 재일조선인을 재판할 자격이 있는가? 그 바통은 일본 측으로 넘겨지고 있다.

그렇다면, 김희로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무엇일까? 김희로가 일본인을 향해 고발한 첫째 문제는 전후의 천황제 국가가 조선인을 억압하는 이중의 폭력 장치를 체계적으로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반 일본 국민도 거기에 협력하는 공범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중의 억압‧폭력 장치란, 물질적‧육체적으로 재일조선인을 차별하고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재일조선인의 민족성을 박탈하고 그의 일본인화를 획책한 경위를 가리킨다. 김희로는 한복차림으로 넝마를 줍는 어머니가 일본 아이들로부터 “야! 이 조센진”이라고 놀림 당하는 모습이 어린 시절부터 뇌리에 박힌 채 마음의 상처를 입으며 인간형성을 시작했다. 소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주위 학생들로부터 조선인이라고 비웃음을 당하고, 잘못은 일본 학생에게 있는데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선생님께 얻어맞았다. 열세 살 때, 절도죄로 기요미즈 경찰서에 잡혀가서는 얼굴이 틀어지고 발이 부어 발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린치를 당했다. 어려서부터 조선인 차별의 중압에 온 몸에 각인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이 패전했을 때는 “전쟁에 패한 것에 분했고, 또 울먹이며 방송하는 천황이 불쌍해서 어쩔 줄 몰랐다”고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는 완전히 일본제국 신민이 되어 있었다. ‘반쪽 일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조선인 억압 구조에 일본 국민의 다수가 자진하여 협력했다. 조선 편견이라는 제국주의 사상의 독소에 물들고, 조선인에 대해서는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행동한 일본 국민의 모습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몸에 배인 억압 민족의 사상과 감성을 김희로는 체험에 입각하여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의 억압 장치와 여기에 함께 가담한 일본 국민의 모습은 패전과 천황제 국가의 해체와 함께 과연 사라진 것이까? 광포의 정도가 옅어졌지만, 억압 장치의 기구와 기능은 지속되고 있다. 김희로는 전후의 체험을 통해서 이를 고발한다.

그는 전후에도 계속 일본인화의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일정한 직업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자주 형무소 신세를 지게 된다. 지바 형무소에 있을 때, 차별을 받는 것은 교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불면증이 걸릴 정도로 학습과 독서에 열중하여 소학교 중퇴의 핸디캡을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가 내게 차별을 약화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에는 기술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도쿄의 고즈케(小菅) 형무소에 있을 때 자동차 정비사 자격증을 땄다. 출소 후, 마침 당시 정비사가 부족하던 때라 어느 정비소에서나 환영을 받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막상 합격증을 보여 주면, 국적이 조선이라는 이유로 어느 곳에서나 거절당했다. 그는 일본 사회의 조선인 차별의 벽이 얼마나 두터운 가를 뼈저리게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범행의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조선 편견으로 가득 찬 경찰관과 마주치게 된다. 기요미즈 시의 노상에서 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싸움이 붙었는데, 한 경찰관이 “니네 조선인들 말이야, 일본에 와서 변변찮은 짓이나 하지마!”라고 내뱉는 것을 들었다. 이에 그는 끈질기게 항의 하였으나, 코웃음을 치며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민족적 모욕감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그런 복선 위에서 야쿠자의 상납금 독촉에 쫓기던 그는 최후의 단계에서 조선인을 극도로 모멸하는 말을 듣고,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

분명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태도는 전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고, 전후는 미성숙한 채로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이는 ‘반쪽 일본인’으로서 생활한 동안 김희로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다.

식민지주의 사상이 이처럼 잔존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를 전후 사상의 흐름에 입각하여 지적한다면, 전쟁책임에 대한 자각은 어느 정도 확산되면서도 식민지 통치의 책임에 대한 자각은 그 뿌리가 약했던 것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전후사상은 타민족 지배가 피지배민족에게 부여하는 파괴적인 영향, 지배민족의 구성원에 미치는 부패적인 영향에 관해 관심을 돌리고 이를 풀어나가는데 약했다. 그 사상의 누락 부분을 김희로는 인간 형성사의 기술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들이 밀었다고도 할 수 있다.



4. 재일조선인 자녀의 교육적 지위:재일외국인 교육과 일본 정부

●외국인 학교의 역사와 성격

전후 일본 땅에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기관이 성립·정착하였다는 사실은 일본의 교육 상황에 나타난 새로운 것이지만, 그것은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이는 1945년 한국의 광복을 토대로 해서 재일조선인이 민족교육의 권리를 실현하는 사업으로 성립된 것인데, 그 움직임 속에서 ‘민족교육’이 국민교육의 공리(公理)이고, 그 공리는 무엇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없는 진리임을 증명하였다.

재일조선인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 사실에 대해, 일본 근대교육사가 취해 온 동화주의 교육은 파산을 선언하고, 아울러 일본의 교육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새로운 교육적 관계를 창조할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새로운 교육적 관계의 창조란, 간단명료하게 말해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에 사는 모든 외국인은 자기 자녀를 자국의 말과 문화로 교육시키고 싶어 하며, 또한 그럴만한 권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이를 외국인학교의 설립이라는 것으로 표현해 왔는데, 그 사실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을 외국 공민으로 간주하고, 그 교육 사업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교육적 관계의 창조이다.

그러나 전후의 교육정책은 이 새로운 관계의 창조를 부정하고, 조선인 학교의 억압과 재일조선인 자녀의 동화라는, 말하자면 전전(戰前)의 식민지 교육정책의 패턴을 답습하였다. 이는 재일조선인의 교육에 대한 정부의 전후 책임을 물어야 할 사실이다. 이것은 다른 외국인 학교와 조선인 학교를 비교하는 시점을 도입할 때 한층 선명해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의 외국인 학교의 발자취를 돌아 볼 때 메이지 유신과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현존하는 외국인 학교 중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것은 요코하마에 있는 프랑스계 산모르학교(1872년 6월)이다. 개국에 의해 외교관이나 상사원 등의 입국이 시작되고 그 재류가 증가 되었다. 그에 따라 동행한 그들 자녀에게 자국 교육을 계속시키고, 또 귀국 후 학업에 지장이 없게 하고자 하는 배려로서 외국인 학교가 만들어 진 것이다.

이 밖에 요코하마 중화학교(1894년 창립), 산타마리아 스쿨(1902년 창립, 스페인), 성심(聖心) 인터내셔널(1909년 창립, 미․프) 등의 외국인 학교도 있다. 메이지 시대에는 도쿄, 요코하마, 고베 등을 중심으로 구미계 외국인학교가 선교사의 손에 의해 발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아시아인 유학생이라는 형태로 일본의 중․ 고등 교육을 받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재일조선인의 경우는 앞에서(제1부) 살펴본 바와 같이 외국인으로 인정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 신민으로서 일본의 학교체제 속에 포함되었다. 사설학원 정도였다. 그것조차도 발각되면 바로 폐쇄 당할 정도였다.

1945년의 패전은 이 외국인 학교의 성격을 완전히 꾸어 놓았다. 제2의 개국이라고 하는 시기에 외국인 학교는 종류로나 수적으로 현격하게 불어났다. 그 수도 200개에 가까웠고(정확한 통계는 조사가 없어 파악할 수가 없다.), 나라별 숫자도 조선인 학교 150개 학교를 비롯하여 아메리칸 스쿨(약 20여 개 학교), 중화학교 등, 그 외에도 프랑스, 독일, 캐나다, 영국, 스페인의 여러 외국인 학교를 열거할 수 있다.

특히 조선인 학교의 신설과 아메리칸 스쿨의 증가가 현저한데, 전전에 볼 수 없었던 이러한 현상은 전후 재일외국인 교육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는 일본의 국제관계의 존재 양식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 있는 외국인 학교는 일본과의 관련에서 현재 어떠한 문제를 안고 있을까? 우선 3가지 문제점을 들어보겠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와 외국인학교에 대한 처우 방식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메리칸 스쿨과 조선인 학교를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첫째로, 아메리칸 스쿨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두세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예를 들면 아메리칸 스쿨 인 제펜, 도쿄), 패전 후 일본 각지에 설립된 아메리칸 스쿨은 미 국방성 직할이며, 장소도 미군기지 하에 설치되어 완전히 본국 교육의 연장으로서 운영되고 있다. 현재(1970년대) 16개 교를 헤아리는 아메리칸 스쿨은 설비, 비용, 관리권 등이 모두 국방성에 속해 있으며, 약 500명의 교사는 신분이 군속이고, 학생(약 2천명)도 미군 관계자의 자녀가 대부분이다.

소위 ‘조계지’ 학교이고, 일본 사회․ 교육과 관계없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안보조약에 의해 일본 국내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하여 아메리칸 스쿨은 미국의 일본 점령과 안보조약에 의해 생겨났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재일미국인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일본 정부의 우대 조치, 자립성 존중 등은 미일 관계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에 비해 재일아시아인(조선인과 중국인) 자녀의 교육은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는 계속 침해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조선인 학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금압적인 태도는 극단적일 정도이며, 그 집약적인 형태로는 모든 재일외국인학교 법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안은 형태상으로는 모든 재일외국인학교를 규제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치적 맥락에서 보면 ‘한일조약’(1965)의 구체화로서 제출되었고, 따라서 진짜 속셈은 재일조선인학교를 단속하는데 있었다. 1965년 봄 이래, 세 차례나 국회에 제안하고, 혹은 제안을 시도하였으나 법률화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던 이 법안은 첫째로 일본의 국익을 재일외국인의 민족교육의 권리 위에 두고, 둘째 모든 외국인학교를 문부성의 통제 하에 두어 결국은 현 정권과 대립하는 교육기관을 가진 외국인학교, 구체적으로 조선인학교와 중화학교의 폐교를 기도했다. 일본 정부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교육정책과 그 방향을 달리하는 것이면 재일외국인의 교육에 까지 간섭하겠다는 자세를 내외에 표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