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동화교육 피해자들, 민족교육 시초로 나아가다

일본 패전 이후 조선어로 말할 자유했으나 현실적 생활 바로 바꾸기 어려워 '비조선인화' 우려

2020-03-29     동양일보
이충호 박사
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Ⅱ 민족교육의 정립

-동화교육의 희생자에서 극복자로

재일조선인에게는 일본의 패전은 압제로부터의 광복과 조선의 독립으로 간주하였다. 어떤 조선인은 8·15의 감상을 이렇게 말하였다.



“방송을 들으면서 감개무량했다. 공습 때에 밤중에 일어나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불안한 기분에 가슴이 뛰었다가는 개운해지며 안도감이 들며, 앞으로 조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했다. 전망은 전혀 할 수 없었고, 무언가 불안감을 느꼈다. 그날 밤 두세 명의 조선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선의 독립을 알았다”



그러나 어른들과는 달리 유아기부터 동화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에게는 광복과 독립을 직관할 만한 능력이 결여되었다.

그 예를 한 가지 들어 보면, 당시 미야자키현의 중학교 3학년이었던 한 재일조선인 소년은 8·15광복의 날, ‘이제 나도 일본인으로 불리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슬프기도 하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집 앞에서 일본이 전쟁에서 패했으니 조선인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고함이 들려 왔다. 그때 나는 그들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하며 진짜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른들은 패전과 동시에 “황국신민이여 안녕”이라고 결별할 수 있다고 해도, 아이들은 바로 이렇게 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았다. 그 차이는 재일조선인의 손에 의해서만 메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독립을 손에 넣고도 새삼 자기 자식들을 다시 볼 때, 어른들의 조선인으로서 민족적 실질을 상실당하고 혹은 손상 당한 모습에 가슴 아파하며,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으로서의 목표 있는 생활을 시작했을 때, 거기에 걸맞은 조선인 교육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이 패전한 그해에 민족교육의 역사도 출발했다.



1. 동화교육을 부정한 사상

●빼앗긴 언어와 역사의 탈환

패전으로 인하여 일본은 국민교육 재출발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혼미를 거듭하고 있을 때, 일찍이 재일조선인은 “망국의 자녀”들에게 조국을 되찾아 줄 교육 활동을 자주적으로 개시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조선인들은 가장 먼저 몰두해야 할 과제로 민족교육을 내세운 것일까? 1945년대의 재일조선인의 증언을 빌어 그 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재일조선인에게 일본의 패전=조선의 광복이란 구체적으로 조선어로 말할 자유의 회복을 의미했다. 조선어로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한 것이다. 광복이란 조선인으로서 살아가는 일상생활을 가능케 한 것이었으므로 재일조선인은 그렇게 되어 않았던 현실 생활을 바꾸는 행동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다. 아이들의 교육은 그러한 가운데서 이것이 특히 중요한 과제였다.

재일조선인 성인들은 광복과 동시에 조선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반면 조선어를 모르는 아이들의 비조선인 화가 우려되었다. 그래서 바로 조선어 회복 활동을 시작해야 했다. 1945년 9월에 간다 조선 YMCA의 한국어 강습회, 10월에는 도츠카(戶塚) 한글학원 등이 바로 문을 열었다. 당시 조선인이 사는 곳에서는 예를 들면, 세토나이카(瀨戶內海)이의 이에시마(家島)에서도 그러했지만, 일본 전국 각지에서 아아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는 활동이 자발적으로 시도되었다. 여기에서는 귀국할 수 있다는 조건까지 주어졌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모국어를 익힌 후에 귀국하고 싶다는 것이 당시 재일조선인에게 공통으로 절실한 희망이었다.

이러한 국어 강습회 형식의 교육 활동이 재일조선인들에게 일제히 분출되었던 것은 일본의 패전 직후 상황의 커다란 특징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쉽게 귀국할 수는 없는 조건이 생겨난 것도 있고, 또 그 차원에 그치지 않고, 1946년 4월부터는 조선의 역사·지리·이과 등을 모국어로 가르치는 학교 형태로 발전시켜 민족교육의 제도까지 구상·실현해 나가게 되었다.

재일조선인연맹(약칭: 조련)이 교육의 지도를 맡았는데, 그 지도하에서 교육제도와 내용의 통일성이 보장되었다. 이렇게 해서 1946년 봄에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재일조선인이 광복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장 한스럽게 생각한 것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자기 아이들이 한국어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귀국하여 한국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된 현실은 한국어를 빼앗긴 것이 자기 아이들을 한국에서 살아가기에는 매우 중대한 저해 요인이 되었다. 이것이 본질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재일조선인이 한국인 되기 위해서는 한국어부터 회복해야 한다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매우 절박한 현실적인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우선 국어 강습회라는 형태로 실천하게 되었다.

일본이 패전한 직후 최초로 제출한 민족교육을 옹호하는 공식 호소문은 재일조선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하고 있다.



“(광복과 함께) 탄압과 차별과 모멸의 눈길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다! 단지 그것만을 바라며 과감히 생활기반을 내던지고 감옥과도 같은 일본에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길을 서둘렀다. 그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전부가 자녀들을 일본학교에서 퇴학시켰다. 그리고 서당과 같은 작은 학교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한국어, 우리들의 문자와 말을 가르쳤다. 실로 안달하며 귀국을 서두르는 학부모의 최대 고민은 벙어리나 다름없는 우리의 말을 모르는 이 아이들의 일이었다”



‘우리 국어를 모르는 아이들’의 고통은 부모 이상으로 그들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일본 패전 직후, 어떤 집회에서 한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호소했다.



“제가 입고 있는 이 옷을 보면, 어느 누가 조선인이라고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저는 이처럼 일본어는 생각나는 대로 표현할 수 있지만, 한국어는 전혀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을 사랑하는 저의 마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에 돌아 가 시골 할머니에게 인사를 올릴 때 무엇이라고 말하면 좋을까요? 한국의 딸로서 고향 사람들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딸이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저의 사랑하는 동생에게 이처럼 비참한 마음을 갖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이렇게 해서 일본의 패전 직후에 재일조선인이라는 사실의 해방감과 조선인의 실질을 빼앗겼다는 사실에서 오는 쓰라림의 모순이 언어 문제로 집약되는 형태로 분출되어, 민족교육 창조의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동시에 이것에 의해 동화교육 즉 조선인을 비 민족이 되는 시도의 핵심이 실로 한국어 박탈에 있었다는 것을 일본 정부 당국은 명확히 하였다. 동화교육의 희생자들에게는 제일 먼저 말을 되돌려달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말을 되돌려 받은 아이들을 조선인으로 키우고 싶다는 점에서 모든 재일조선인의 바람은 같았다. 그것은 반세기에 걸쳐 조선인임을 무시 받아 왔던 식민지 피지배의 체험에서 나온 것인 만큼,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흔들림 없는 이들의 욕구였다. 빼앗긴 역사를 되찾아 한 사람 한 사람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는 강한 의욕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아이들이 조선인으로서 교육받을 수 있는가 어떤가는 과거와 같은 식민지적 인간이 될 것인지 아니면, 독립된 한 사람의 조선인으로서의 내용과 자격을 갖출 수 있는지의 분기점이 되었다”(교육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라는 시각 위에 서 있었다.

나아가 “아이들에게 조선인으로 교육받게 하는 일은 삼십 수년간에 걸쳐 말살당해 온 민족 고유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고, 아이들이 모국어와 모국의 역사를 배움으로써 빼앗긴 권리를 부모의 몫까지도 아울러 회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동화 체험의 비판적 극복이라는 의식이 아이들을 조선인으로 기르고 싶다는 바램을 낳고, 민족교육 창조의 대중적 토양을 만들어 냈다.



이와 같은 역사에 뿌리 박은 염원은 주변 환경이 ‘귀국’에서 ‘일본 재류’라는 상황으로 갑자기 변화되자 민족혼을 빼앗긴 아이들을 조선인으로 변화시키는 교육에 한층 더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교육 역할에 대한 착상은 거기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원래 언어·역사·문화를 되찾는 유용한 방법은 교육 시설을 만들어 집중적·집단으로 교육을 추진하는 것이지만, 재일조선인의 경우에는 그처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필요성에 그칠 수는 없었다. 본국에서는 광복과 동시에 일본어 사용을 폐지하고 조선어를 되찾고, 조선인으로서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인 생활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조선인으로서의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에게는 이와 같은 사회와 교육의 동질성이 결여되었고, 민족사회가 갖는 고유한 교육력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조선인으로 변화되도록 했기 때문에 그 수단으로서 교육에 의지하는 정도가 더욱 강하였다.

따라서 그만큼 교육에 거는 기대도 컸다. 여기서 조선인학교 창설의 필연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자신이 처한 사회환경과는 성격을 달리 교육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 교육의 성과를 제한하고 교육 운영에 곤란 한 조건이 가해진 제약이 내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아이들을 조선인으로 키우고 싶다는 바램을 더욱 깊이 충족시키고자 할 때, 그것이 바로 국어 강습회의 차원을 넘어서서 조선인 학교의 창설로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가 1946년 4월 이후의 단계였다.

그렇게 되자 당연히 교육의 체계·내용·방법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 교육 편성 중에서 내용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민족 교과’였다. 이 교과를 축으로 해서 조선인으로 변화시키는 교육이 운영되도록 구성되었다.

‘민족 교과’는 조선인으로 기른다는 과제에 직접 답하는 교과인데, 이를 위해서라도 동화교육을 만들어 낸 현실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이를 극복하는 사상과 실천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꾸어 말해, 그 요구를 직감적으로 부르짖은 최초의 시기를 넘어 이제는 동화교육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의 틀을 구성하는 시기로 옮겨갔다고 할 수 있다.



●동화교육의 고발과 비판

일본 국내에서 전후 재일조선인이 가장 먼저 동화교육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그 극복에 나섰다. 희생자였던 재일조선인으로서는 필연적이었지만, 이는 오랫동안 고립된 채 진행되어 왔다. 일본의 학문과 국민이 그것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깨달은 것은 훨씬 후였다. 그것도 재일조선인이 민족교육의 옹호를 호소할 때마다 행해진 거듭된 노력으로 일본 측이 조금씩 깨달아 가는 식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같은 호소문 중 하나를 통하여 민족교육이 발족할 즈음 동화교육에 대한 마이너스의 유산·현실이 어떻게 지적되고 있는지 음미해 보고자 한다.

동화교육의 부정적 요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 ‘조선어와 말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민족어 안에는 그 민족의 역사와 생활이 보존되어 있다. 조선인이 조선어를 모른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고상하고 복잡한 감정이나 기분을 모른다는 그것과 같다” 즉, ‘정신적 장애인’ ‘정신적 무국적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역으로 말하면 조선 말을 풍부하고 정확하게 체득하도록 하는 일은 조선 민족의 역사와 문화, 생활, 감정, 전통이나 민족적인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일이고 “정신적인 장애인의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정상적인 인간으로서의 발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민족 교과의 중핵에 모국어 교육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둘째, 역사와 지리 등을 통해 “민족적 열등감과 비굴 감, 노예근성을 이식하기 위한 교육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조선에 대해 ‘황폐하여 가치가 없는 반도 주민은 문화가 낮고 게으른 자’, 그리고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민족’으로 배웠고, 따라서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주입되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조선 민족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서, 그 생활과 문화에 대한 교육’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이에 조선 역사와 조선지리도 민족 교과의 하나로서 중시되었다.

셋째, 동화교육에서는 결핍 혹은 부정된 “조국과 세계의 현상과 정세 속에서 조선 민족의 일원으로서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고 인식시키”는 교과도 별도로 둘 필요가 있었다. 이 교과에서는 ‘일본 사회를 배우고’, ‘오늘날 조선의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정세를 배우며’, ‘세계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이것을 사회과도 민족 교과의 한 부분에 설정하였다.

이처럼 동화교육에 대한 비판 속에서 민족 교과가 구성되고 민족교육의 축이 마련되었고, 그 목표는 ‘민족적 자각을 높이는 것’으로 집약되었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에 모든 민족적 자각을 빼앗기고, 누구든지 외국 것은 좋고 자기 민족이 가진 것은 보잘것없다는 식으로 교육받은 잘못된 영향을 제거하고, 평등한 입장에 서고자 하는 것”일 뿐이었다. ‘지배자인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길러졌던’ 것을 바로 잡아 ‘조선인으로서 쓸모있는 인간을 길러내고’, ‘인간적 성장을 보장’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민족교육을 자각하게 되면, “민족적 차이와 특수성을 무시한 채 조선 학생을 일본 학생과 같은 교실에 넣어 같은 내용으로 교육하고 차별 없는 ‘평등한’ 교육한다는 것은 진정한 평등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가를 알 수 있으며, 전전뿐만 아니라 전후에도 계속되는 ‘구별하지 않는 교육’체제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분명 “조선인 가정에서는 모모타로(桃郞: 도깨비를 쳐 없앴다는 일본동화의 주인공)도 없고, 가쿠야히메[‘타게도리모노가타리竹取 物ㅁ語’라는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주인공] 도 없다. 조선 소녀에게는 금실로 무늬를 넣어 짠 비단[金襴緞子]을 두른다는 문구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은 아동들을 조선인으로 키우려는 바램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동화교육에 대한 고발과 비판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사상적 골격을 갖춘 교육이었기 때문에 바로 재일조선인 스스로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학교에서 잘못된 거짓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재일조선인의 교육 실정」). 이렇게 일본 제국주의의 교육에 대한 비판 정신이 약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