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일본학교 입학이냐, 조선학교의 사립 인가냐

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2020-06-14     동양일보
이충호 박사

 

[동양일보]●전후 교육정책에서 일본인과 재일조선인(2)

그렇다면 1948년 봄에 이르는 동안 일본 정부는 조선인학교에 대해서 어떠한 정책을 취한 것일까?

미점령군의 재일조선인 정책이 아직 모호했던 기간에는 일본 정부도 또한 어떤 주체적인 방침을 세울 수가 없었다. 재일조선인의 요구와 점령군의 허가로 당시 유휴 상태에 있었던 교사(校舍)를 오사카와 효고현 등에서 약간 대여한 것을 제외하고, 조선인학교에 대해 일본 정부는 극히 방관적이고 오히려 비협력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에게 대여한 몇 개 안 되는 교사도 1948년 봄에는 강권 적으로 반환하게 했다. 그 냉담한 자세에 대해서 ‘재일조선인 교육의 실상’은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다.



우리가 자재의 배급이나 아동의 급식, 교과서 용지 등의 문제로 문부성을 방문하면, 언제나 말을 다른 데로 돌리고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재를 만족스럽게 배급해 준 적도 없고, 한 푼의 보조금을 내준 적도 없었다. 그리고 진주군의 배급물자는 하나도 나눠주지 않았다. 또 일본의 공립중학교나 사립중학교에 우리 아이들이 지원하더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입학시켜 주지 않았다.



이러한 무방 책·비협력 자세는 1946년 11월에 점령군의 지령(재일조선인은 일본의 법령에 따른다)을 받고, 동화교육의 방향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1947년 4월에 학교교육국장 통달(雜學 123號)을 발하고, ‘현재 일본에 재류하고 있는 조선인은 일본법령에 복종해야 한다. 따라서 일단 조선 아동에 대해서도 일본인 아동과 마찬가지로 취학시킬 의무가 있고, 또 실제로 일본인과 다르게 불이익을 받는 취급을 해서 안 되다’고 기록하였다.

재일조선인 자녀들도 일본의 교육법령을 적용받기 때문에 일본인 학교에 취학할 의무도 당연히 생긴다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전쟁 전의 동화교육제도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단 합리화의 논거가 천황제에서 점령군으로 변경되었을 뿐이고,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권력주의적인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또 이 통달은 ‘교육기본법’의 시행과 동시에 발해졌다. 전후 교육의 출발점에서 일본 국민에 대한 ‘민주화’와 재일조선인에 대한 반동화가 병행한 것이다. 이 점은 전후 교육의 성격을 생각할 때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어쨌든 여기에서 싹튼 취학의 문제는 이후 점령기의 재일조선인 교육정책의 근본 방침으로서 강행되지만, 이 점에서는 아직 정책 의도를 표시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 통달 후반부에서 조선인학교를 각종학교로써 공인하는 방침을 제시하였다.

즉 “한편 취학의무를 강제하는 것이 곤란할 경우가 있을 수 있으므로, 사정을 참작하여 적절한 조치가 요망된다”고 말하고, 그 적절한 조치의 하나로서 “조선인이 그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소학교 또는 상급학교, 혹은 각종학교를 신설할 경우, 부현(府縣)은 이를 허가해도 상관이 없다”는 방침을 명시했다.

도쿄도(東京都) 교육국도 이를 받아들여 1947년 10월에 ‘조선인 소·중학교, 신제고교(新制高校)에 대해서 각종학교로서의 설립을 인가한다’는 의향을 표시했다.

이것은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를 일본 정부가 사실상 용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46~1947년 시기에 세계는 반파시즘 세력이 일정한 힘을 갖고 재일조선인에 대해 ‘해방 국민’의 성격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여지가 남아 있었고, 거기에다가 실제로 조선인학교의 창설을 위한 대중 활동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도 재일조선인 교육의 민족적 독자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방침은 1년도 채 못 갔지만, 그래도 이처럼 일본의 중앙정부가 재일조선인 교육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특기할 만하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취학의무의 등장

그런데 1947년 후반기부터 1948년에 걸쳐 사태는 동화교육 정책의 부활을 향해 급선회하였다. 1947년 10월의 점령군 지령(조선인학교는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른다)과 같은 취지의 1947년 12월 각의 결정을 거쳐 1948년 1월에 문부성 학교교육국장 통달 ‘조선인학교 설립의 취급에 대해서’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 통달은 전년도 통달의 뒷부분을 취소하고 앞부분의 전면화를 꾀한 것이었다. 즉,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고 일본인 학교에 취학시킬 의무를 강요했다.

앞에서 간략히 소개한 바와 같이 1947년부터 1948년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인민 투쟁에 크게 발전하고 많은 재일조선인도 한반도의 통일·해방투쟁과 보조를 맞춰 나갔다.

미국은 침략정책을 다시 수립하여 이를 강행하기 위해서도 그 후방기지인 일본을 견고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 대책의 일환으로서 일본 내의 조선인학교를 ‘정치학교’라고 비난하여 억압하는 방침을 내세웠다.

동시에 한반도가 ‘공산화’된다면 일본도 ‘공산화’된다는 일본 지배층의 전통적인 대외감각도 되살아났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식의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조선이 공산화될 경우 어떻게 될까? 일본은 일본과 공산주의 사이에 놓인 최후의 방어벽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산주의자의 일본 침투는 거의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경제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일본은 서로 유리한 거래를 할 수 있는 중요한 대상을 잃어버리게 된다. 옛말에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이 있듯이, 극동에서 점하는 현재의 위치에서 본다면 일본·중국은 이빨(齒), 조선은 입술(盾)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는 국민을 침략 지지 쪽으로 향하게 하는 전통적인 선전 논리이기도 한데, 그러한 논리에서도 ‘적화’에 ‘내응(內應)’하는 재일조선인과 그들의 교육을 억압하는 일본 측의 이유가 성립하였다. 미국·일본의 지배자는 침략과 반공의 정치적인 맥락 속에 조선인학교를 위치 지우고, 이를 치안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1948년의 통달은 이와 같은 정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정책의 수단으로 나왔다.

통달의 주 내용은 재일조선인 자녀에게 일본 교육의 수용을 의무화시킨 것이었다. 즉, 조선인 자녀일지라도 학령에 해당하는 자는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시·정·촌립(市町村立), 또는 사립소학교 또는 중학교에 취학시켜야 한다.

또 사립소학교의 설립은 학교교육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서 도도부현(都道府縣) 감독청(지사)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학령 아동 또는 학령 학생의 교육에 대해 각종학교의 설치는 인정하지 않는다. 사립소학교 및 중학교에 관한 규정을 적용한다. 조선어 등의 교육을 과외로 실시하는 것은 상관없다.

이로써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을 보장하는 유일한 학교 형태였던 각종학교의 자격은 부정되고, 재일조선인에게 일본의 공·사립 소·중학교에 취학하든지, 혹은 조선인학교가 사립학교의 인가를 받든지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윽박지른 것이다.

이 중 사립학교 쪽을 선택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일본어로 된 일본 교과서를 사용해야 하는, 즉 일본인으로서의 교육 내용을 교수해야 했으므로 일본인 학교에 취학하는 것과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사립학교로서 인가해 줄 의사를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일본인과 구별하지 않고 교육한다는 동화교육의 논리가 다시 전면적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통달의 주요 목적은 조련계 조선인학교를 억압하는 데 있었지만, 그 성질상 모든 재일조선인 자녀를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민단계 학교에도 일률적으로 적용되었다.



●민족교육을 억압하는 전후적 논리

1948년 통달은 일본 정부가 전후 최초로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해 가한 공공연한 억압정책이었다. 재일조선인 교육에 관한 한, 정부는 법률이 아니라 문부성 차관 또는 국장의 ‘통달’로 계속 통제를 가하고 있었다(현재도 그렇다). 소위 통달 행정이다.

게다가 이 문제에 대해 각 부현은 문부성에 품의(稟議)를 내고, 그 방침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관료 통제가 관철된다. ‘통달’은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정책 의지의 집약이고, 그 지배의 중심적인 권력 수단이었다.

통달이 이러한 성격을 갖고 있음을 고려하면, 1948년 통달의 본질이 동화교육 정책의 부활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동시에 조선이 광복된 전후의 상황이라 표면상으로는 전쟁 전과는 다른 구실이나 수법을 채용하였다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하나는 ‘민주주의’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민족교육을 억압한 점이다. 1948년 4월 당시 모리토(森戶) 문부대신은 조선인 아동의 일본인 학교 취학 이유에 대해, “이 법(학교교육법·기본교육법)은 평화주의적·민주주의적이기 때문에 국어 문제만 별도로 치면, 이웃 나라 민족이 이 법 아래서 공부하더라도 그렇게 부당할 것은 없으며,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불완전한 교육보다는 바람직하다”라고 말하고 있다(4월 28일 중의원 의사록).

여기에는 인간이 민족적 존재로서 성장하고 교육이 민족교육으로서 먼저 성립하는 것에 대한 무지가 엿보인다. 대신 초 민족적이고 추상적 인간을 끌어내어,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일본인의 교육을 재일조선인에게 강요했다.

이것은 민주주의 교육의 관념적·코스모폴리탄적 이해이며, 그 강요임이 분명하다. 또한, 이것은 정부가 재일조선인 교육의 현실에서 무엇 하나 배우지 않고, 따라서 민주주의 교육이란 민족교육에 안에서만 실현된다는 진실과는 무관한 발상이다.

정부는 교육기본법을 다른 민족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수법을 통해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자주성을 부인한 것이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는 반대로 민족적 이기주의를 우선시켜, 학교교육법(제13조)을 확대하여 해석하여 조선인학교의 폐쇄를 꾀한 것이다. 통달과 동시에 추가 통첩을 내어, 일본인 교사(校舍)를 차용하여 운영하고 있던 조선인학교에 대해 교사를 비워 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인 학생의 교육에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구실이었다.

그 당시 학교교육법 제13조(이하의 번호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할 경우 감독청은 학교폐쇄를 명할 수 있다. 2, 법령의 규정에 따라, 감독청이 내린 명령을 위반했을 때)를 무리하게 적용했다.

이것을 최초로 적용한 고베시의 간부는 그 공로를 자랑삼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립학교의 교사를 그렇게 간단히 나에게 비칠 리가 없었다. 관리자가 나가라고 말했지만, 눌러앉아 수업을 계속한 것은 법령 위반이므로 제13조에 의해 폐쇄한 것이다.… 우리가 하니까 다른 부현도 모두 그렇게 했다. 우리가 모범이 된 것이다. 다른 부현은 먼저 법령 해석을 하고, 앞의 방식에 따라 그렇게 했다”라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조선인학교의 폐쇄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조선인 아이들의 권리를 희생 발판으로 하여 일본 아이들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전쟁 전의 관계가 재현된 것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후에 먼저 교육기본법과 학교교육법이라는 이름 아래 조선인학교 폐쇄→동화교육 정책의 부활이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인에게는 ‘민주주의’적일 수 있는 교육법도, 그것을 다른 민족에게 기계적으로 전면 적용하면 침략교육(신식 민주의 교육)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민족과 교육의 문제에 대한 논리적 인식이 천박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식민지 통치·동화교육의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누락되어 있었다. 동화교육이 수행하는 반교육적인 역할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