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한신교육사건, 반일·반미의 누명 씌우다

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2020-06-28     동양일보
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동양일보]●재일조선인의 항의운동

1948년 1월의 통달은 각 도도부현에 회람되었고, 그 구체적인 조치를 담은 통첩이 2월에서 3월에 걸쳐 각 시정촌(市町村)에 내려졌다. 각지에서 취해진 거의 공통된 조치는, 한편으로는 재일조선인 자녀에게 취학통지를 내어 공립학교에 수용할 체제를 갖추고, 다른 한편 일본인 교사(校舍)를 차용한 조선인학교에 대해서는 교사를 비워줄 것을 요구하고, 각 조선인학교에 사립학교 인가신청을 요구한 것이었다.

교사를 비우는 것과 사립학교 인가신청 기한은 모두 3월 말까지로 정하고, 이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폐쇄할 방침이었다. 이러한 지시가 시정촌을 매개로 해서 일방적으로 조선인학교에 내려졌다. 민단계 학교들은 큰 저항 없이 이 조치를 받아들였지만, 고생고생하며 대부분의 조선인학교를 설립한 조련에 결집한 사람들은 민족교육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이에 투쟁하였다.

3월부터 4월에 걸쳐 재일조선인은 전국적으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쿄에서는 3월초에 (1) 조선인의 교육은 조선인의 자주성에 맡길 것. (2) 일본 정부는 조선인 교육의 특수성을 이정할 것. (3) 교육비는 일본 정부가 부담할 것의 3개 항목으로 재일조선인의 요구를 정리하였다. 이것은 재일조선인의 최저한의 교육 요구강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3월 말에는 조련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조선인교육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운동의 지도와 교섭을 담당하였다. 대책위원회는 이하의 4개 항목을 제안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진다면, 사립학교 인가를 받을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

즉 내용은 (1) 교육 용어는 조선어로 한다. (2) 교과서는 조선인교재편찬위원회를 두고, 총사령부의 검열을 받은 것을 사용한다. (3) 학교의 경영관리는 학교관리조합에서 행한다. (4) 일본어를 정규과목으로 채용한다는 내용으로, 이는 민족교육을 실질적으로 유지해 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항목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교육기본법·학교교육법의 전면적 적용(일본인과 구별하지 않는 교육)을 주장하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신학기가 임박하게 되면서, 앞의 통첩에 대한 법령 위반을 이유로 각 도도부현에서는 조선인학교에 폐쇄를 명령하였다.

3월31일에는 야마구치 현에서, 4월 8일에는 오카야마 현에서, 10일에는 효고 현에서, 12일에는 오사카 부에서, 20일에는 도쿄 도에서 각각 조선인학교 폐쇄명령이 떨어졌다.

이 강권적인 조치로 사태는 더욱 절박해져, 재일조선인은 대중적인 항의행동을 거듭하며 지사와 단체교섭에 나서고, 온몸을 던져 자신들의 학교를 지켜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야마구치 현에서는 3월 31일, 1만여 명의 조선인이 현청 앞에서 집회를 열고 24시간 동안 교섭을 행하여 폐쇄 연기를 약속받았다.

오카야마 현에서는 폐쇄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조련 위원장이 구속되었지만, 4월 19일 8천여 명의 조선인이 모여 현 당국과 교섭을 벌여 검거자 석방과 폐쇄 연기를 받아 냈다.

도쿄에서도 4월 27일, 16명의 학교 관계자가 학교교육법 89조(제13조의 규정에 의한 폐쇄 명령을 위반한 자는 6개월 이하의 징역 혹은 금고 또는 1만 엔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에 의해 검거되었지만, 학교를 사수하는 투쟁은 계속되었다.

당시 도쿄의 아라카와 구(荒川區) 조련 제1초등학교를 방문한 히라노 요시다로(平野義 太郞)는 방문기에서, 우연히 마주친 학부모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돈을 모아 지은 학교에서 자기 아이들을 조선어로 교육시키는 일이 왜 나쁘단 말인가, 학교를 폐쇄 당하고 게다가 교장까지 구류 당해야 하는 이유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특히 히라노는 학교를 지키려는 아이들의 열의에 가슴이 찡해졌다면서, 조선어로 된 대자보 한두 가지를 번역 소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소년단의 대자보로 “학교를 사수하자! 우리의 생명, 우리의 존재는 우리 국어를 지킴으로써만 의의가 있다!”고 쓰여 있고, 다른 대자보에는 “최후까지 싸우자! 선생님을 지키자! 선생님이 안 계셔도 열심히 공부하자! 조선인의 자주교육! 불법탄압 절대반대! 1948년 4월 20일”이라는 소년단의 맹세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재일조선인 부모나 아이들에게는 1948년 통달은 바로 눈앞에서 학교 폐쇄로 나타났고, 조선인으로서 살아갈 희망과 교육을 압살하는 폭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그러하였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대중운동으로 폭발하였다.



이처럼 재일조선인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 일제히 일어났다. 당시 조련의 슬로건을 보아도 1월 단계에서는 “학교의 통합 정비를 급속히 실현하자!”는 것이었지만(제 13 중앙위), 4월 단계에서는 “조선인 교육의 자주성을 사수하자!”는 식으로 크게 변경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제14 중앙위).

이러한 재일조선인의 움직임에 대해, 일본 정부는 ‘공산주의자의 선동’이라며 논점을 다른 곳으로 돌려 선전하고, 매스컴도 여기에 편승하여 보도하였다. 그 와중에 단지 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민주단체만이 재일조선인의 요구를 지지하고 여기에 동의를 보냈다.

“일본공산당은 ‘조선인의 교육은 일본 교육제도에 따라 행해야 하지만, 용어·교과서·교원 등에 관해서 조선 민족의 특수성을 인정할 것’을 주장하고, 소수민족에 대한 압박에 항의한 현지 당원은 이 방침에 따라 조선인 측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앞에서 언급한 히라노를 포함해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단체는 이론적으로는 재일조선인을 소수민족으로 규정하는 오류를 공통적으로 범하고 있었지만, 한신교육사건에서 공산당원인 고베(神戶) 시의원이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중노동 10년형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실천적으로 공동행동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인은 소수였으므로, 사실상 재일조선인은 조작된 여론의 비난 속에서 혼자 힘으로 전 권력을 상대로 하여 학교를 사수해야 했다.



●한신교육사건(1) : 고베

조선인학교 폐쇄는 미점령군의 정책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이것에 반대하는 것은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미점령군에 반대하는 것이 되었다. 그것을 명확히 드러낸 것이 4월 24일을 정점으로 한 ‘한신(阪神)교육사건’이었다.

이것은 점령 하에서 유일하게 비상사태가 선언될 정도의 대사건으로, 미점령군은 무력을 사용해서까지 조선인학교를 폐쇄하려 하였다.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재일조선인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다시 동화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광복된 국민으로서의 긍지와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이것을 일본 사회에 공시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위 ‘한신교육사건’은 재일조선인들이 자신의 아이들의 교육을 둘러싸고, 미점령군(및 일본 정부)의 정책과 재일조선인의 방향이 서로 대립되고 화해할 수 없는 모순에 차 있음을, 공평한 정신을 가진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곧 알 수 있는 극적인 형태로 드러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고베의 사건을 중심으로 오사카의 사건도 아울러 되짚어 보고자 한다.



한신 사건의 첫 번째 특징은, 미점령군의 강력한 지령 하에 행정 당국이 조선인학교에 탄압을 가한 것이다. 고베에서는 3․4월에 일본인 담당관을 불러 “ 일본의 공립학교를 사용하고 있는 조선인을 퇴거시키라”는 지시를 거듭 내렸다. 당시의 효고 현 교육부장은 10년이 지난 후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고베 시의 기도(木戶: 당시 고베 시 문교국장)씨와 함께 미점령군의 필립과장에게 자주 불려가서 “조선인이 멋대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현재의 일본 경찰력으로서는 도저히 단속할 수가 없으니 곤란하다”며 한사코 그만두려 했으나 용납해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필립이 교육부장실로 찾아와 “어떻게든 조치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사와 당신에게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그 다음 날인가 다시 부르기에 가 보았더니 나, 기도씨, 검사, 예심판사, 경찰부장 대리 등을 모아놓고 충고하는 말이 “단호히 조치하라!”였다.

이러한 압력 하에서 4월10일 효고 현은 조선인학교 폐쇄를 명하고, 이 명령을 받고 고베 시는 다음 11일에 각 조선인학교에 “4월10일 효고 현 지사의 지령에 따라 인가를 받지 못한 학교는 폐쇄하기로 하였으므로 오늘 이후 조선인은 교실 사용을 금한다”는 벽보를 붙였다.

당시의 오테라(小寺) 고베 시장은 교섭차 온 조선인을 향해 “당신들은 시민권이 없는 손님에 불과하니 잠자코 있으라…일본이 마음에 안 들면, 그 대단한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면 될 것 아닌가”라며, 계속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일본인 행정관의 이러한 식민주의적 태도는 점령군의 탄압방침의 폭을 더욱 확대시키고 폭력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한신사건의 두 번째 특징이었다.

이와 같은 탄압적인 학교폐쇄에 대해서 조선인은 (1) 조선인의 교육 자주성을 인정하라. (2) 교사(校舍)의 계속적인 사용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연일 끈질기게 교섭을 거듭했다.

4월 23일 조선인의 염원을 짓밟고, 시 당국은 가처분을 강행했다. 다음 날 24일 분노한 조선인 수천 명이 현청을 에워싸고 지사와 집단교섭을 벌여 학교 페쇄명령을 취소시켰다. 야마구치·오카야마에서도 그러했지만, 수천 명의 조선인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장시간 눌러앉아 교섭을 벌이지 않고서는 이 시대 역행적인 명령을 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한신 사건의 세 번째 특징이다.

4월 24일 지사와의 교섭은 “학교 폐쇄명령을 철회할 것, 조선인학교를 특수학교로서 인정할 것, 위원을 보내 협의 결정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현재의 학교를 인정할 것”이라는 재일조선인 측의 요구를 지사가 문서로 전면 수용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것은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를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후에 재일조선인은 계속되는 어려운 시기에는 이 날을 ‘4․24교육투쟁기념일’로 정해 운동의 버팀대로 삼은 것은 그런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재일조선인이 민족교육의 권리를 지켜 낸 것으로 보인 그 순간, 이것을 눌러 짓밟고자 기도한 진짜 적이 정면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미점령군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방적으로 지사가 내린 폐쇄명령 철회를 무효로 선언함과 동시에 조선인의 일제검거를 강행하였다. 조선인의 배후에 일본공산당이 있다고 판단하고 탄압에 착수한 것이다. <현대 일본의 역사>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 다음 날(25일) 아침 일찍, 돌연 고베 지구 일대에 일본점령군에 의한 최초의 비상사태가 고베 헌병대 사령부의 이름으로 선포되었다. 갑자기 고베 시를 중심으로 해서 도쿄·오사카·고베 일대의 조선인 천여 명(조련 발표로는 1572명, 점령군 발표로는 일본인과 합쳐1176명)이 체포되고, 다음 날 26일 새벽에는 호리카와(堀川) 시의회 의원을 비롯한 공산당원, 각 노동조합 간부 133명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지방적인 조치가 아니었음은, 맥아더 사령관의 왼팔 격인 제8군 사령관 아이캘바카 중장이 일부러 고베로 날아와 이 사건을 직접 지휘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아이켈바카는 26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번 고베·오사카 지구에서 일어난 폭동은 분명 일본공산당의 선동에 의한 것이다”고 단정하였다.



수천 명의 체포자 중 조선인 6명, 일본인(공산당원) 1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각각 중노동 10년 이상의 형에 처해졌다. 이렇게 해서 30일 고베의 조선인학교는 미군의 군화발에 짓밟히고 폐쇄되었다.



●한신 교육사건(2):오사카

같은 시기, 오사카에서도 똑같은 경과를 거쳐 조선인학교의 폐쇄가 기도되었다. 2월에 처음으로 조선인학교 교장들을 오사카 군정부로 불러들여 문부성 통달에 대한 설명회를 열었는데, 이것을 시초로 하여 3월에는 교사를 비우고 인가신청을 하라는 통첩을 냈다.

그리고 4월이 되자 일본인 교사를 차용한 조선인학교 19개교에 대해 폐쇄명령을 내리고 거기에 재학 중인 아동 3천 명을 일본인학교에 수용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오사카의 재일조선인은 이러한 정책을 동화=노예화의 우민화 정책이라며 민족교육의 권리를 사수하는 입장에서 항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고베의 경우에 비해 오사카 쪽이 보다 조직적인 탄압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한신 사건의 진상조사단에 참가한 가지 와타루(鹿地亘는 오사카 부 부지사와의 문답에서 오간 내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즉 “우리가 오사카 부 부지사에게 ‘조선인이 자기 나라 말로 교육하는 것이 왜 부당한 일인가’라고 질문하자, 그는 치안을 위해서 좋지 않다”고 답했고, 이 말을 들은 가지씨는 “일본의 옛 지배계급도 또한 조선인들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데 대해 ‘치안상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역사를 떠올렸다.

또한 한신사건의 원인에 관해 부지사는 “조선인은 법의 존중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패거리들의 힘을 믿고 폭력에 호소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죄는 동화정책을 추진하는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지 씨의 표현을 빌린다면 “조선인의 피에 있다”는 시각이다. 조선인학교 문제를 교육의 원리와 관련된 문제로서가 아니라, 이렇듯 치안 문제로 파악할 경우 여기에서 나올 수 있는 대응책은 경비체제의 강화라는 발상뿐이다.

따라서 그 직접 책임자인 오사카 경찰국장은 “내 생각으로는 이것(민족교육의 사수/인용자)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사실은 일본공산당과 북한공산당이 어떤 나라의 지도를 받고 커다란 정치적 목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상상”하며 탄압체제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