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5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10월 17일 목요일
우리 집에서 동쪽으로 5분정도 걸으면 무심천에 이른다. 무심천에 흐르는 갈물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강변도로가 있다. 동쪽에는 주로 자동차가 다니는 자동차도로가 있고 서쪽에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있다. 자전거를 위한 길과 산책로가 선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엄격히 지키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산책로가 내게는 청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명소다. 매일아침-미세먼지나 초미세먼지가 아주 나빠서 외출을 삼가라는 일기예보가 있을 때 제외하고는-오전 6시 30분 전후 나가서 걷는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반성하고 판단하고 상상하고 체념하고….
길가에는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꽃도 있으나 갈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높이가 1-2m 가량, 잎은 가늘고 길어 딱딱한 잔 톱니가 있다. 9월 하순부터 자주 빛을 띤 황갈색의 이삭으로 된 꽃이 피는데 아름답다기보다는 억세다는 느낌을 준다. 어쩌다 저녁때도 가서 걸어보는데 요즘에는 모기가 많아서 신경을 쓰게 되어 걷는 즐거움이 감소된다. 역시 이른 아침이 좋다.
산책로에서 만나게 되는 산책자들은 50대, 60대, 70대 남녀가 태반이다. 어쩌다 10대, 20대의 여성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여성 산책자들이 많고 모두가 열심히 앞만 보고 마치 운동이라도 하듯이 힘주어 걷는다. 아마도 건강을 위해서 걷는 것 같다.
어떤 젊은 사람들은(20대, 30대) 자전거를 타고 신속히 지나간다.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과 입을 가리고 지나간다. 나는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꼭 그래서 이른 아침 걷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 아침의 고요한 정경을 즐기기 위해서다.
사실은 아침보다 새벽을 더 좋아한다. 진흙 같은 어두움이 서서히 밞음으로 변해가는 길고도 짧은 순간‧ 찰나‧ 시점을 응시‧ 음미‧ 관찰하는 것이 더없이 소중한 깨달음을 일으키게 해준다.
80대 중반을 살아가는 나에게 삶이란 기본적으로 새벽이다. 흔히 노년기는 인생의 ‘황혼=저녁=종막’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에 위화감을 느낀다.
나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더 큰 삶으로 돌아가서 아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전환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은 삶이 끝을 맺는 어둠을 지나서 새로운 밝음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설렘의 순간이 새벽이다.
새벽이 아침으로 이어지는 때를 기다렸다가 무심천 강변산책로로 가서 걸으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10월 18일 금요일
KTX로 오전 10시 45분 오송역 출발, 11시 17분 익산역 도착, 야규 마코토 박사와 만나서 원광대학교로 가서 박맹수 총장과 점심을 하면서 대화를 가졌다.
원광대학교가 주최하는 국제노년철학대화모임을 개최한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는 이루어졌고 구체적인 실무에 관해서는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중등특수교육과 박성지 부교수와의 상의를 통해서 대처해 나가도록 하면 어떻겠냐고 해서 다시 몇 가지 세부적인 문제에 대한 협의도 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공통인식에 이르렀다.
(1) 내년 3월 중순에 우선 원광대학교에서 제1회 국제회의를 개최한다. 단 일본 측 참가자들의 형편을 확인 한 후에 일정을 조정 확정한다.
(2) 발제 및 토론은 한일 각각 10명 정도로 하며 관심을 공유하는 학자, 전문가, 시민활동가를 청소년세대와 중장년세대와 노숙년 세대 간의 균형을 이루는 방식으로 선정, 초청한다.
(3) 제1회 국제회의 주제는 ‘세대간 소통과 세대간 공감형성’으로 잠정결정한다.
(4) 원광대학교에서 주최하는 국제회의에 연이어서 일본 쪽에서도 같은 취지의 국제회의를 개최해주기를 기대한다. 지금생각으로는 교토대학에서 오구라 기조 교수를 중심으로 추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내가 일본에 가서 직접 만나서 상의를 해보면 가부간에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다음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협의를 끝내고 KTX로 오후 2시 9분 익산출발 오후 2시 37분 오송 도착. 오후 3시 10분 귀가.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김태만 교수가 전화 와서 딸아이의 혼사가 있다고 알렸다.
나는 일본으로 가기 때문에 결혼식에는 참석 못하지만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연락하고 만나기로 했다. 사윗감이 연극배우라고 한다. 김태만 교수 자신은 여전히 건강히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한편 김태정 한국외국어대학 명예교수는 그동안 위장에 탈이 나서 고생했는데 요즘에는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10월 21일에 일본으로 가서 식구들과 함께 지내다가 12월 23일에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내년 초에 일본에서 큰 하이쿠(俳句)국제회의가 있는데 거기서 발표할 논문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지낸다고도 했다. 김태정 교수 가족들은 그 일본인 처도, 아들 석철이도 모두 하이쿠를 짓고 즐긴다. 석철이는 오구라 교수의 주선으로 교토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의 본래 전공은 일본 고전시(와까(和歌))이고 일본말과 한국말을 완벽히 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 한일 간 학술회의에서 질 높은 통역으로도 능력발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야규 마코토 박사와 함께 한일양국에서 여러모로 공헌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0월 19일 토요일
오늘도 이른 아침 오전 6시 33분, 무심천 강변도보산책로에 가서 1시간 넘게 고요한 아침을 즐기고 돌아왔다. 오전 7시 35분에 귀가. 옥수수식빵 반쪽, 블루치즈, 계란프라이, 생강홍차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손자 믿음이가 잠에서 깨어나 대뜸 무심천에 물고기 잡으러가자고 떼를 쓴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학교에 갈 필요가 없으니 마음 놓고 손자 하자는 대로 함께 무심천에 가서 물고기가 많이 있는 곳을 확인하고, 물고기 잡는 망을 산 뒤에 다시 와서 잡기로 하고, 오늘은 어린이 스쿠터를 실컷 타는 걸로 만족하는 게 좋다는 정도에서 타협을 했다.
30분 정도 보일락 말락 하는 거리까지 갔다 오고, 또 반대쪽으로 갔다 오고 하면서 마음껏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나서 무심천 물 흐르는 곳으로 가서 물고기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송사리가 모여 있는 곳, 크고 작은 붕어나 다른 물고기가 떼지어있는 곳 등을 손자와 함께 확인 해 두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손자의 얼굴에 흐뭇한 표정이 감돌았다. 나도 흐뭇했다. 이제 물고기 잡는 망을 어디서 살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일이 남았다. 손자는 엄마한테 이야기해서 인터넷주문을 하는 게 좋다고 했다. 과연 인터넷시대의 어린이답다. 나는 인터넷주문은 생각도 못했다. 그것을 살 수 있는 가게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만 했으니까.
오전 9시 40분, C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점심을 같이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늘 점심을 함께 해왔던 L교수는 요즘 숨이 가빠서 외출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폐가 악화되는 모양이다. 어서 쾌차해야 되는데. 하기야 우리 나이쯤 되면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 못하니까, 그저 언제나 조심 또 조심하는 것 이외에 별 수가 없지 않는가?
한양대 국문학과의 정민 교수가 저술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김영사, 2011)를 읽기 시작했다. ‘다산, 추사, 초의가 빚은 아름다운 차의 시대’라는 부제가 마음에 들어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생겼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날마다 정한 시간에 ‘커피 브레이크’를 갖게 되는 거의 습관화된 미국인의 생활패턴에서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찾기에 그렇게도 보편화된 것일까라고 의문을 가졌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지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티타임’이라는 말로 일정시간에 휴식을 취하고 커피가 아닌 홍차+스콘으로 그들 나름의 의미 있는 한때를 즐긴다는 것을 보았다. 일본에서 살게 되면서 다양한 차 문화에 접하게 되었다.
각각 그들 나름의 삶을 의미 있게 음미하는 삶의 미학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우리 나름의 차문화가 있었는가? 현재는 있는가?
11월 7~8일 양일간 일본 시즈오까(静岡)현 주최의 ‘장수철학과 비교문명’이라는 한일철학대화모임이 있고, 거기서 내가 세미나와 별도로 '후지산(富士山)과 차 문화와 노년철학'이라는 주제로 기념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막상 우리 고유의 차 문화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가 궁금해졌던 것이다.
신라와 고려 때 흥성했던 우리의 차 문화가 조선조에 들어가면서 거의 없어졌다가,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새롭게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한때 잊혔던 차 문화를 다시 꽃피게 했던 이가 다산 정약용이고, 그 후에 그의 애제자들이 차 문화 부흥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지난번 속리산에서 있었던 한일 노년철학대화모임에서도 한국의 전통적인 다도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한국 차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던 것도 일본 측 참가자들이 일본다도와 한국다도를 함께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11월 회의에서는 한국 측 참가자들이 시즈오까현에서 생산되는 차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10월 20일 일요일
오전 9시 45분, 유성종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몸 상태가 어떤지 물어보았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기력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서 할 수 없이 한의사에게 가서 상의하고 인삼과 녹용이 몸에 안 맞으니까 충분히 고려해서 보약을 지어달래서 복용해 보려 한다는 대답이었다.
얼른 기운을 차리셔야 되는데 걱정이 된다고 말하고서 동양포럼과의 관계설정에 관해서 잠시 상의를 했다.
며칠 전에 김용환 교수에게 2019년 12월 31일 부로 유성종 선생은 동양포럼 운영위원장의 자리에서, 그리고 나는 동양포럼 주간의 자리에서 함께 물러나고 김용환 교수가 주간의 자리를, 그리고 누구든 적절한 사람이 운영위원장의 자리를 맡아서, 동양포럼을 한층 발전시켜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둘이 완전히 떠나버리면 동양일보나 보은군 쪽에서 당황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이때까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에서, 동양포럼 고문으로 있으면서 새로운 운영위원장과 주간을 도와주고, 동양일보나 보은군과의 관계도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는 것이 나이든 사람의 최소한의 도리가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공유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당분간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해 나가자는 데 합의를 했다. 그러고 나서 즉시 김용환 교수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의 뜻을 전했다. 마땅히 그래야 자기들도 안심하고 일해 나갈 수 있다는 응답이었다.
동양포럼도 새 진영과 새로운 문제의식을 필요로 한다. 초고속으로 변화, 발전되어가는 시대상황에 걸맞은 발상과 사유와 실천을 위해서는 새사람의 활력이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다. 그래서 그동안 유성종 선생과 내가 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과 감각과 지향을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감행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10월 22일 화요일
문득 나이든 여성시인 이월순씨의 신앙시집 <왜 나는 그를 사랑하나>(대한출판, 2016)에 실려 있는 ‘황혼에 찾은 행복’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노숙년기를 살아가는 한 여성의 진솔한 행복관(평범한 여성미를 체감 할 수 있는 인생관, 신앙관, 가치관)에 깊은 여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소중했던 젊은 날들을
나는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수많은 여인들이 그렇게 살았듯이
나도 그들 속에서 합류되어
나는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이들 바르게 기르고
지아비순종하며
나는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
그 여인은 행복하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내 가슴속 공허함은 어쩜인가요
나는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수년을 영글어 온 응어리 알갱이들이
점점 박 덩이처럼 커져만 가고
나는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중년시기에
내가슴은 기어코 웅어리 공장되어
눈물로 눈물로 녹아내리나
나는 어느 날 내 영의 깊은 간구를
주님께 애절하게 호소했지요.
시로서 네 마음을 정화시켜보라고
시 한편에 응어리 알갱이 하나
시 두 편에 응어리 알갱이 둘
이렇게 빠져나간 시 인생의 10여년 세월
내 영혼의 맑은 곳에
기쁨과 행복이 넘쳐납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거저 받은 축복
시로서 주님을 찬양하며
보람되게 살렵니다.
오늘의 젊은 남녀들이 공감할 지 위화감을 느낄 지 혹은 특정 종교색이 너무 짙다고 경원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같은 80대를 살아가는 남자로서 우리세대의 여인들은 대체로 ‘그러 그렇게 살았다’는 삶의 모습이 눈앞에 아롱거리고 그러는 가운데서도 시를 읊는 행복이 그녀의 황혼기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것 같아서, 애틋한 정감을 느낄 수 있어 은연중에 나도 시가 주는 행복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