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포럼 노철개벽 일기 /80대 중반에서 철학하는 나날18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동양일보]10월 30일 수요일
이미자의 ‘노래는 나의 생명’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거의 언제나 함께 듣는 노래가 있다. 일본여성가수 고바야시 사치코의 ‘꿈의 끝에서—자오선의 꿈’이라는 노래다. 이미자의 경우와 똑같이 고바야시 사치코의 경우에도 노랫말이 좋고 노래하는 가수의 음성이 마음에 들고 여성가수만이 자아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고달픈 삶에 지친 얼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매력이 있다.
뜨거운 마음이 하라는 대로
대지를 밟고 바람에 실려
생명의 날개로 산하를 넘네.
자유롭게 창공을 날 듯
꿈을 찾아서 걸어가자
끝없는 황야를 길 없는 길을
인생은 지도 없이 유랑하는 여행길
뜨거운 마음 동반자 삼아
걷다 지치고 길을 헤매면
별밤을 바라보며 너를 생각한다.
머뭇거리고 있으면
내일은 오지 않는다고
변함없는 웃음이 용기를 준다.
양손에 사랑을 쥐고
쉬지 않고 걸어가자
비에도 꺾이지 말고
바람에도지지 말고
운명의 장난에 시험받으면서
언젠가는 너의 별이 되고 싶다.
꿈을 찾아서 걸어가자
끝없는 황야를 길 없는 길을
인생은 지도 없이 유랑하는 여행길
뜨거운 마음 동반자 삼아
츠시로 히카루 작사 스즈키 준 작곡 그리고 미녀가수 고바야시 사치코의 정감 넘치는 목소리, 이 절묘한 조화가 내게 삶의 원동력을 부추겨준다.
일본에서 대학초청강연을 할 때 맨 먼저 그때그때의 주제에 맞는 노래를 들려준 후에 강연에 들어가는데 이 노래는 단골메뉴 중 하나다. 여기서 ‘뜨거운 마음’이란 중국과 일본과 한국을, 그리고 미국과 일본과 한국을, 또 유럽과 일본과 한국을, 그들 ‘사이’에서 ‘함께’‧ ‘더불어’‧‘ 서로서로’ 꿈과 바람과 보람을 잇고 키우고 꽃피게 하려는 시민주도의 철학대화운동에 전력투구하는 열정을 대변해주는 노랫말이다.
그때는 주로 일본에서 여러 분야의 뜻을 같이하는 학자, 언론인, 시민운동지도자, 활동가들과 함께 공공하는 철학을 새롭게 산출해내려고 안간힘을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대중가요가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영어와 중국어 그리고 한국어 번역은 마련되어 있었고 그래서 비록 일본에 있는 대학에서의 강연이었지만 워낙 중국과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아직 일본어에 숙달하지 못한 학생들도 적지 않게 있어서 노래는 고바야시 사치코의 음성으로 듣고 노랫말의 뜻은 번역된 것들을 통해서 이해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이지만 가끔 중국에서나 한국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그때 그곳의 유학생들 가운데는 이 노래를 기억하고 나의 강연에서 받은 감회를 말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내 강연이 인연이 되어서 일본대중가요의 좋은 점도 알게 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동아시아의 젊은이들 사이에 상호이해가 이렇게 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10월 31일 목요일
이른 아침 걷기 때(오전 6시 30분)에는 주위가 아직 컴컴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손자 믿음이와 학교까지 함께 가려고 밖에 나갔을 때(오전 8시 17분) 사방이 황회색의 연기 같은 공기로 꽉 찬 상태여서 정말 깜짝 놀랐다. 나야 어떻게든 견디어 보겠지만 아직 어린 믿음이의 건강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당장에 효과적인 대책이 마련될 수 없는 현실에 불만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된다.
얼마 전(2019년 3월 22일) 동양일보 유영선 상임이사가 쓴 글 가운데 인용되었던 강익중씨의 ‘미세먼지’라는 시가 그때보다 오늘 아침 더 절실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산 넘어 물 건너
여기까지 왔는데
오자마자 푸대접해서
일단 미안하다
다음생애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면
기분좋게 만나보자
마스크를 벗고
창문도 활짝 열고
하품도 맘껏 하고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참, 궁금한 것 한 가지
근데 정말 너는 누구냐?
내가 어릴 땐 없었는데
눈이 침침
목이 칼칼
여기저기 콜록콜록
부탁이다
눈이 맑은 사람들은 피해가라
웃는 사람들은 건들지 마라
그렇다. 85년 살아온 내게도 아주 낯선 불청객이다. 가까스로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면서, 어린 꿈나무들에게 살기 어려운 환경을 그대로 넘겨줄 수는 없는데, 우리 어른들이 무슨 일을 해서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간구해야할 최긴급과제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집에 돌아와 내 방안에 앉아서 속을 태우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우선 이 아침에 내 가슴이 바늘로 찔리는 듯한 아픔의 절규를 남겨 놓고 싶었다.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일본에서 살 때는 들은 바 없는데
오랜만에 돌아온 어머니나라는
먼지지옥이 되어버려서
몸상하고
맘 아프고
넋 쓰리고
얼 저리고
숨 막혀서
어린 꽃나무들의 숨결 삶결이 걱정된다.
이러고도 어른들이 떳떳할 수 있을까?
이대로는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 수 없지 않은가?
오오, 깨어있는 시민들이시여, 우리손자들
우리손녀들이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탈 없이 자랄 수 있도록 한번 우리 힘으로
천지개벽을 해내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11월 1일 금요일
오전 6시 17분 택시로 청주국제공항 도착. 7시에 제주항공(7C 3172) 청주발 오전 8시 10분발 오사카 칸사이 오후 2시 20분에 도착. 대충 한달치 먹거리 마련. 이제부터 일본생활 본격 가동이다.
그 동안 많이 쌓인 우편물 정리, 집안은 지난번 아내가 꼼꼼히 살펴보고 정리해 놓아서 신경 쓰고 손볼 일이 거의 없다.
NHK-TV 저녁 뉴스를 보고, 전후 최악상태의 한일관계에 대한 차분한 보도‧ 토론‧ 논평을 듣고, 특히 이낙연 총리가 와세다대학 학생들과 가진 대화에 대한 아주 호의적인 견해들이 펼쳐졌다.
일본에서는 문재인에 대해서보다 이낙영에 대해서 더 큰 기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다음 대권경쟁에서 제1위를 차지하고 있고, 일본에 대해서 잘 아는 드문 한국인 정치가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혹여 여러 가지 현실 문제 때문에 한일관계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고, 해결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 폐해가 다음 세대까지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기성세대가 최선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조였다.
11월 2일 토요일
오전 3시 55분 기상.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로 입가심, 4시 10분 소변, 4시 17분 소금물 양치, 4시 20분 온수(60도)+레몬즙 큰 컵 하나, 4시 30분 배변.
오전 4시 40분 NHK 명곡앨범 상쾌한 눈뜸 몇 곡과 오스트래리아 방송공사 제작 음반 ‘새벽(Dawn)’을 들으면서 읽을거리를 고름. 한국에서는 가족들이 잠들어 있고, 방음장치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새벽에 음악 듣기가 쉽지 않다. 이번에는 혼자 왔기 때문에 모처럼 마음껏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보다 아침 밝음이 빠른 것 같다. 한국 청주에서는 오전 6시 30분이 되어야 밖에 나가기가 좋았는데, 일본 오사카에서는 6시 5분에 나가도 되겠다.
집에서 미쿠니다리까지 50m, 미쿠니다리에서 내가 매일 걸어가는 곳이 700m. 그래서 왕복하면 1.5km. 계획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늘 아침 표지판을 자세히 보고나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난 세월 거의 매일 이른 아침에 나의 철학하는 산책, 산책하는 철학은 1.5km 거리의 왕복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새로운 깨달음이다.
11월 3일 일요일
오전 11시 30분, 김태정 한국외국어대학 명예교수와 김석철 교토대학 비상임강사 부자가 와서, 내가 준비한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환담을 했다. 모두 일본에 있으면서도 오늘의 한국의 현실에 대한 우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
한국에서는 정치적 이념 대립의 문제가 경제적, 사회적 제반문제에 대단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비해서, 일본에서는 영어교육의 질적 향상과 평가문제라는 각도에서 민영화 방안을 놓고 극심한 대립이 커다란 쟁점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교육문제 평론가의 의견은 교육, 특히 영어교육을 국가주도로 시행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고, 실제로 영어를 상용어로 하고 있는 나라들—싱가포르나 홍콩 등—에서는 전적으로 민간 주도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존재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해서 자기실력—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의 균형 잡힌 구사능력—의 함양과 향상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왜 일본에서만은 정부주도 또는 정부간여를 고집하는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주도로 하면 특히 평가의 공정성 확보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일본에서는 영어가 이렇게도 중요한 관심사인 것이다.
11월 4일 월요일
쓰쓰이야스타카(筒井康隆)의 최신작 <노인의 미학>(신조사, 2019)을 읽어보았다. 1934년 오사카 출신, 작가‧ 배우. 나는 그저 동갑인 일본인 남자가 같은 노년기를 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끼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출판사 편집부의 조사에 따르면 <노년의 미학>이라는 책제(冊題)는 일본에서는 처음이라는 것이다. 특히 나이든 남자의 미학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늙은이의 추태를 보이지 않고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한편 2006년 11월에 91세로 서거한 사이토시게타(齊藤茂太)씨가 86세에 썼고 2015년 8월 19일에 주식회사 PHP연구소에서 출간한 <나이 듦은 즐거워>라는 책도 함께 읽었다. 사이토씨의 노년철학은 ‘건강하고 밝고 즐겁고 품위 있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그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거기에 ‘아름답게’가 더해진다면 완벽한 ‘나이 듦’의 삶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도 이제 85세를 넘어 86세가 되기 직전에 있어서, 일본인 두 사람의 노인철학에 공감하는 바가 있어서, 오늘의 독서는 보람이 있었다.
11월 6일 수요일
오후 1시 37분, 신오사카 출발 히카리 470, 3시 37분 시즈오카 도착. 야마모토교시 미래공창신문사 사장과 하라다켄이치 전 지성관대학 학장과 동행하다.
지난 11월 3일에 있었던 핫도리씨의 기조강연에 관해서, 그 모임에 직접 참가했던 두 분의 의견을 경청하고 나서, 나는 그분의 연설원고를 야마모토씨로부터 전해 받고 읽어본 소감을 말했다.
솔직히 두 분은 별로 느낀 바가 없던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았다. 하나는 포스트 진실(post truth)의 시대를 마지하고 있는 시대상황 속에서 ‘세대를 넘어 이어가는 마코토=진실’이라는 교토포럼의 주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라는 문제의식이다.
둘째로, 결국 모든 것은 거래(deal)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세계—특히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미국우선의 국제 전략과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오늘의 일본에서—교토포럼이 강조해온 ‘활사개공’(活私開公=나=개개인의 생명가치=인간으로서 살아 있다는 사실자체의 가치와 의미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에서, 지역사회‧ 국가‧ 세계를 새롭게 열어 감: 김태창의 공공하는 철학의 핵심)의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핫도리씨도 내가 부르짖었던 철학명제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