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동화·차별 이중벽 속에 갇힌 ‘조선인들의 꿈’

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2020-10-18     동양일보

[동양일보]●일본인 학교로 분산 전학(2)

일본의 공립학교에 다니는 것은 재일조선인 자녀교육의 지배적인 형태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공립 조선인학교가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는 일본인 학교로 분산 전·입학하는 것이 주된 동향이 되었다.

오사카처럼 분산 전학을 노선으로 설정한 곳에서는 조선인학교 재학자 1만 명과 전부터 일본인 학교에 다니는 1만 명을 합쳐 총 2만 명이 일본인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또 효고현처럼 자주 학교가 관철된 현에서도 과반수 이상인 6800명이 일본인 학교에 다녔다.

나아가 도립학교에서의 집단교육을 인정한 도쿄에서도 학생 총수의 1/3에 해당하는 2천 명 이상이 그 외의 일본인 학교에 다니는 현상이었다. 권력에 의해 조선인 학생이 공립학교에 집중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상황이 수년간 지속하면서(이를 단절시킨 가늠쇠가 된 것은 1955년의 조총련 발족), 서서히 일본인 학교에 취학하는 것이 재일조선인의 교육 생활에서도 강력한 경향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1949년 가을의 조선인학교 폐쇄령은 광복 후 상승일로에 있던 조선인학교 운동을 뒤덮었고, 동화교육체제를 확고히 하는 역할을 수행한 점에서 재일조선인의 전후 교육사에서 분수령을 이루었다.

●동화와 차별의 이중벽

그런데, 이렇게 하여 각지의 일본인 학교에 분산 전·입학한 조선인 학생은 어떠한 경험을 해야 했을까?

허남기는 ‘전 조선초급학교장의 시(1)-바람 속을’에서 1947년 3월에 ‘하지만/오늘부터/ 너희들의 길은/이 학교에 다니며/ 먼 조국의 아이들 가운데로 이어진다’고 노래하였지만, 2년 반 후에는 ‘이날 야마구치의 조선초급학교는 폐쇄되고, 아이들은 다시 일본학교로 인수되었다’고 첨가해 넣은 ‘전 조선초급학교장의 시(5) -1949년 11월 2일’를 읊으며 고별사를 고해야 했다.

도쿄한국학교

일본인 학교로 분산하여 전·입학시킬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 학부모·교사의 애끊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기 위해 그 시를 인용해보기로 한다.

안녕/나의 아이들/안녕/가련한 조선의 꼬마동지들/4년 전 12월/너희들이 처음으로/이 교정에 모였던 때와/변함없는 겨울 풍경 속을/너희는 지금/작은 손을 흔들면서/요시다(吉田)의 소위 ‘훌륭한 학교’/우에다(殖田)의 소위 ‘건전교육’ 속으로/이 ‘폭력단체‘열심 성원의 품에서/인수되어 가는구나/코흘리개 1학년생 조선말로/6학년과 5학년은/6학년과 5학년생 조선말로/선생님! 저희는 /일본학교에 있더라도/열심히 공부해서/훌륭히 싸우겠다고/이 선생님을/격려하고/안녕/나의 아이들/안녕/가련한 조선의 꼬마동지들/너희는/인수되어 가는구나!

안녕/나의 아이들/안녕/4년밖에 모국어를 배울 자유를/갖지 못한 아이들/너희를 조국으로 연결하고/너희를 다시/모국어를 빼앗는 적으로부터 지켜 주겠다고/맹세한 이 선생님은/무엇하나 지켜 주지 못하고/아직 11월인데/일찍이 찾아온 황량한 겨울 속에서/너희의 흔드는 손이/ 길모퉁이를 돌아/다리를 건너고/밭을 가로질러서/작아져 가는 것을/지켜볼 뿐이다.

안녕/나의 아이들/안녕/포로가 되어 떠나는/ 작은 조선의 동지들/이 선생님은 /너희를/일본학교까지 보내지도 못하고/ 이 닫힌 학교의/이 상처투성이의 교문에 선 채/너희를/보낸다.

안녕/안녕/나의 작은 동지들/안녕/안녕/기운차게 싸워다오.

이렇게 해서 끝까지 조선인으로서 살고자 했던 학부모·교사의 염원을 뒤로하고, 자신도 조선인으로 자라고 싶다는 결의를 품고 일본인 학교로 분산 전·입학한 아이들은 그곳에서 조선인임을 가로막는 두터운 벽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교토국제학교

동화와 차별의 이중벽 속에 갇혀 여러 가지 굴절과 좌절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난 오사카의 경우에 대해서 아는 범위 내에서 추찰해 보고자 한다.

1954년 도쿄 조선인 중학교 2학년이었던 한 학생은 오사카에서의 소학교 시절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다. 아직 어렸을 때라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은 모르고, 그저 나를 욕한다고만 생각하였다. 나는 일본 아이들과 싸움을 자주 했다. 소학교 1학년에서 2학년까지는 조선인학교에 다녔는데, 3학년 초에 ’조선인학교가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학교에 가보니, 학교는 멀쩡하게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무너졌다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일본인 학교로 전학했다. 변함없이 일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5학년이 되었을 때 당시까지 살던 오사카를 떠나 도쿄로 상경하여 학교를 옮겼다. 하지만 일본학교에 다니기도 하고 조선학교에 다니기도 하면서 어떤 식으로 공부했는지 머리에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오사카 금강학교

요컨대 일본인 학교에 전·입학한 조선인 학생에게는 조선인 피차별의 문제와 민족교육에서 오는 내부의 혼란이라는 이중적인 문제, 이 두 가지 커다란 비교육적인 체험에서 나타났다.

이 작문은 소학교 중학년의 체험을 기록한 것인데, 당사자에게는 이 두 가지 교육 모순은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이 됨에 따라 더욱 심각해졌다. 특히 조선인 교육체계 가운데서 자란 아이들을 돌연 일본인 교육체계 안으로 옮겨 넣을 때, 두 학교 사이에 존재하는 교육 용어와 학력 구조상의 결정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강행한 것은 완전히 비교육적인 조치였다.

그 피해자는 분명 이러한 조치 때문에 내면에 심각한 모순과 혼란을 일으키게 된 조선인 전·입학생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간의 교육 모순 상황에 대해서 조선인 교사들은 아래와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학생들이 사회시간에 설날 상차림에 등장하는 가가미모치(鏡餠)의 유래를 들으며, 재미있어하는 것은 일본 아이들뿐이다. 조선 풍습에는 그와 같은 설날 가가미모치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아이들은 선거에 관해서 일본인 소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오사카 건국학교.

재일조선인은 선거에 관해 하등의 권리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치는 하나하나가 조선인 아이들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인 학교의 교재에 의하면, 일본은 경찰이나 관청 기구는 민주화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찰관은 친절하게 사회생활의 안녕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일본 아이들은 이해할지 모르나, 조선인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경관은 우리 부모형제의 탄압자이고 생명을 위협하는 정반대의 존재였다,

왜냐하면, 패전 후 모든 직장에서 쫓겨난 조선인은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식량을 내다 팔거나 밀주 양조까지 감행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교육 내용의 실질적인 차이가 초래하는 결과에 대해서도, “이 같은 민족의 차이, 그 민족이 가진 역사의 차이와 일본 지배자들의 차별정책과 탄압정책, 그리고 가정경제 사정의 차이에 의해 조선인 아이들의 일본인 학교생활은 결정적으로 파탄을 초래하였다. 아이들이 인내하며 일본인 학교에 계속 다니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기만하고 비굴해져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자각과 장밋빛 장래에 대한 희망을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우려를 표명하였다.

실제로 공립학교 체제가 강요하는 일본인 교육체계에 대해서, 전·입학한 조선인 학생은 대부분 개개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었으므로 무리해서 ’스스로를 기만하고‘ 적응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선인 전·입학생의 이러한 방식의 대응이 퍼지어 가는 것도 또한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수많은 조선인 전·입학이 일본인 교육체계와 작용에 대해 여러 가지 저항을 시도한 것 또한 사실이고, 당연히 일어나야 할 것이 일어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49년 12월 오사카의 ‘選町소학교’에서는 “조선인 전·입학생이 일본어로 수업을 받지 않겠다며, 떼를 쓰는 바람에 별도로 불러 타일러도 봤지만 그래도 듣지 않았다. 이에 마을과 학교 당국은 협의를 거쳐 이들 100명에 대해 학교교육법 제24조에 의거 등교 정지라는 강제 처분을 취할 것을 통고하고 귀가시켰다. 앞으로도 같은 방침으로 임할 것이다”라는 사태가 일어났고, 신문은 이것을 ‘조선 아동들 소동을 일으키다’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동화교육을 거부하는 적극적인 저항이 나타났고, 이에 대해 학교 측은 11월24일 통달대로 징계처분으로 대응했고, 이를 기준으로 관리자들은 질서를 유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조선인 전·입학생에 대해서는 학교도 또한 문부성의 축소판임이 분명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저항은 곧 억압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수업 내용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데다 차별이라는 요인까지 중첩되면서 오히려 장기결석·미취학·비행화라는 소극적인 반항 방식이 급증하였다.

앞의 ‘교육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에서는 “일단 조선인으로 교육받는 즐거움을 맛본 아이들에게 이러한 사태는 이전보다 훨씬 견뎌내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한 후, 오사카 전·입학생의 경우, ‘40% 정도가 학교에 가지 않고, 부랑아처럼 번화가를 방황하게 되었다. 통계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조선인학교 폐쇄 이후 조선인 소년 범죄가 놀랄 만큼 증가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사실 1950년 7월에 공립분교로서 오사카 西今里 조선인 중학교가 설립된 계기에는 조선인 학부모의 움직임과 조선인 학생을 성가신 골칫거리로 보는 교위 측의 논리와 함께, 미취학 중학생의 존재라는 현실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1950년 7월 17일 ‘학원춘추’지에는 西今里 중학교가 ‘조선인 미취학 아동 206명을 수용’하였음을 보도하고, 아울러 ‘일반 신제중학생(新 制中學生)에 비해 학습 품행이 공히 우수하고, 교원도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또 비행화에 관해서는 일본인 중학교 교사의 다음과 같은 관찰을 소개해 본다.

절도범 한 명이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면, 사정이 있다. 소학교 4학년 때 조선인학교가 해산되었다. 일본소학교로 전학했지만, 글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학교 가기가 고통스러운 일이 되고, 나쁜 짓을 배운다, 또 조선인이라는 자각이 반항적인 행동을 하게 만든다. 일본인에 대한 열등감을 커버하고자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복장을 하려고도 했다. 이런 식으로 아이들 생활의 긴 역사 속에 뿌리 깊이 잠재된 문제가 있었다.

조선인 학교 폐쇄·일본인 학교로의 분산 입학이라는 정책은 이러한 소극적인 반항을 불러일으키면서 조선인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육과 인격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이충호 박사/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