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포럼 한국사회에서 인간 존엄을 찾아서1-1

“다양성의 ‘인정’이 곧 ‘존엄성’의 척도”

2020-12-27     동양일보
원혜영 충북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강사

 

[동양일보]

1950년 6.25 전쟁 후에 한국민족은 삶 자체가 고단하고 극심한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기에,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어두운 터널을 지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냉철하게 말하면 현재 한국은 휴전 중이다. 분단은 한민족의 비극이고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런 극한 상황을 겪었고, 그곳에서 벗어난 것은 얼마 되지 않기에 인권과 존엄성에 대해 담담하게 말하기 어렵다. 한민족은 분단으로 인해 남북으로 나누어지고 서로 다른 체제로 운영되고 있지만, 하나의 민족이란 인식이 강하다. 반면, 북한의 인권문제와 존엄성에 대한 인식은 한국(남한)과 괴리감이 생길 정도로 차이를 보이며 이질적(異質的)이다.

세계인권선언(1948년 12월 10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추축국(樞軸國)들이 저지른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와 같은 비극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수많은 소중한 생명이 참혹하게 죽은 끔찍한 전쟁을 치른 후,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가 함께 지켜야 할 하나의 윤리기준을 세웠다.(나무위키, 세계인권선언문 참조)

전쟁의 극한상황을 겪은 후에 한국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다(제1조)’라는 인권선언문의 가치를 체감하고 존엄성에 대해 배워가는 과정이다.

한민족의 극한상황은 1900년부터 2019년 동안의 ‘그래프로 보는 국가별 기대수명의 변화’라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유튜브는 100년간의 기대수명을 그래프로 나타낸다. 1919년도에 세계 평균수명은 35.7세, 조선(한국)은 27.1세였다.

1950년 6.25 전쟁을 겪었을 때는 세계 평균수명은 45.5세, 대한제국(한국)은 그래프에 나오지도 않았다. 1970년대에 60.9세로 세계 평균수명이 기록될 때, 한국은 겨우 56.6세를 넘었다. 일본이 2000년도에 기대수명에서 81.0세로 세계 2위를 기록할 때, 한국은 여전히 등수 밖에 있었다.

국민의 수명이 안정적으로 담보되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의 ‘존엄성’에 관한 인식은 차이가 있다.

한국사회는 전쟁 후에 국가 재건에 골몰하였다. 존엄성과 인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몽상 속의 이야기이며 사치스러운 담론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가족의 죽음과 생이별은 한민족의 경험이 되었다. ‘생사여탈권’이 존엄성과 맞물려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생존을 위해 국민은 살기에 바빴고, 인간의 자유와 인권, 특히 존엄성을 인식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한민족은 국가가 존재해야만 인간의 존엄과 인권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체감적으로 인식했다.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의 안정과 평화가 개개인의 인권과 존엄성의 보호막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반면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권력 집단의 이기적인 명분 아래 개인 인권과 존엄성이 무시된 사례도 있었다.

한국은 2010년대에 들어와서 80세의 평균 기대수명을 갖게 되었다. 인권과 존엄성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과거를 소급하면서 논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 존엄성에 관련된 논문도 미미했던 2010년 이전과는 다르게 증가했다. 최근 20년 동안에 논의를 활발하게 이어가고 있으며, 학문적으로, 도덕 윤리적으로, 그리고 법의 테두리에서 논의되기 시작한다.


존엄성과 인권에 관련한 단어는 얼마 전까지도 낯설고 생소했다. 하지만 한민족의 과거의 전통은 ‘존엄성’이란 단어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지, 인권이나 인간의 가치에 관련한 소중한 철학적 개념을 소유하고 있었다.

인간에 관련된 무한한 사랑과 배려를 ‘존엄성’이라고 명명한다면, 이미 그 깊은 의미를 공동체에 부여하며 토대로 삼았다. 단군설화에서 보이는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려서 교화한다’라는 재세이화(在世理化)가 그것이다. 9세기의 최치원의 접화군생(接化群生)과 유불도를 포함하고 있는 풍류도사상 안에는 인간을 사랑하고 그들이 누리는 자유를 인정하며 서로 교류하면서 배려하는 문화가 존재해 왔다. 그것들은 ‘존엄성’의 다른 이름이라 생각되며 그런 사상을 오래전부터 체득했다.

불교를 이념으로 삼았던 고려(高麗)시대, 성리학을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朝鮮)시대에도 주류와 비주류의 공동체는 존재했고 인간존중과 가치는 나름대로 인정하고 있었다. 인문학적 사고를 우선하는 사회에서 계층의 차이는 차별로 이어지기보다는 각각의 공동체의 범위를 제한하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특수성으로 자리했지만, 그것은 후대로 갈수록 인권을 유린하고 존엄성을 무시하는 차별적인 것으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고대부터 이어진 ‘기일원론’과 새롭게 제창한 ‘후천개벽’사상, ‘인내천’사상을 통하여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동학이라는 사건을 접하고 나서 하층민의 명분이 엘리트층을 설득시켜, 물질개벽뿐만 아니라 정신의 개벽으로 이어지면서, 인도(印度)사회가 오랜 카스트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과는 다르게, 평등과 배려를 태생, 지위, 나이, 빈부의 전 범위에서 확대하여 확실하게 ‘존엄성’이라는 명분을 담보로 하는 전환적인 패러다임을 열었다.

한민족은 동학의 ‘개벽’사상을 중요하게 인지하고 있지 못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사회변혁의 핵심으로 내세웠던 당시의 사상은 오늘날 근현대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철학적 명분이 성공적으로 사회화된 것이다. 존엄성의 가치를 철학적인 사고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인권의 존중과 차별정신에 저항하는 명분을 가진 개벽사상은 오늘에도 이어졌다. 동학은 단순히 조선후기의 부패한 양반세력에 대한 항거이거나 일제강점기의 독립을 위한 민족종교라는 맥락보다 한 차원 높은 정신이다.

즉 한민족에게 인권의 중요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게 하여 각성시킨 정신이다. 하늘, 사물, 사람에게 각각의 한울(하늘)이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사상은 존엄성을 인간에게만 규정한 것이 아니라 만물로 확대한 가치이다. 동학을 민란으로 치부하기보다는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오래된 인간존중과 존엄에 따른 가치관이 소중한 열매로 맺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학은 ‘존엄성’이라는 명분 아래, 반상(班常), 적서(嫡庶), 여성차별을 주요한 쟁점으로 삼은 사회개혁 운동이다.

1910년 신채호도 아나키즘을 기반하면서도, 민족에서 민중으로, 그리도 국가로 이어지는 운명공동체로 연결하는 지점은 한국사회의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나라에 가치가 있기에 그 백성이 가치가 있다 하지만, 역시 이것을 뒤집어 보면 백성이 가치가 있기에 그 나라의 가치가 있는 법”이므로 “나라의 가치를 높게 올리려는 백성들은 반드시 자기의 가치를 높게 함이 가능할 것”이다.(신채호, ‘나라의 가치’ 대한매일신보, 1910.1.13; 진보성, ‘1920년대 이후 신채호의 근대 운명공동체 모색과 그 의미’, 2020)

신채호의 논리에 따르면 개인이 가진 존엄성이 곧 민족이고 국가와 동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동체로서의 주체인 민중 속에 자유로운 인간개인의 존엄성을 거론한 것이다.

신채호는 1910년 ‘동양 혁명사의 흠결’에서 “동양에서는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인민의 권리와 국가의 이익에 대한 담당을 한두 명의 대표 인물에게 맡기고 종결되었으니, 역사발전은 고사하고 혁명으로 권력을 찬탈한 집단만 융성하게 하고, 인민과 국가에는 아무런 권리와 이익의 확장이 없었던 사실이 안타깝다”라고 토로하고 있다.(신채호, ‘동양 혁명사의 흠결’, 대한매일신보, 1910. 1. 20. 진보성, 위의 책)

혁명의 부정적인 측면을 한민족은 기억해야 한다. 혁명은 반대파의 전복을 요구하지만, 개혁은 상대방을 설득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니 쉽지 않다. 혁명과 개혁의 모든 목적은 개인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내린 결정으로 대의명분을 거스를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은 혁명과 개혁의 목적이자 정당성이다.





또한 한민족이 가진 ‘국가의 권력과 인간의 존엄성의 긴밀한 관계’에 관련하여, 독특하고 중요한 지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회는 그 권력의 축으로 인해 재단되어, 존엄성을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 맥락에 따라 좌우된다.

오랫동안 지지기반을 가진 일명 주류층은 단순히 자신의 이익이나 집단의 성패를 우선하기보다는 그들이 배운 인문학적 지식을 근거로 하여 명분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비주류층에게도 이롭게 하는 시스템적 방안을 마련하려는 숙고가 있기에 타당성을 얻었다.

또한 소외계층의 적극적인 의사표현은 즉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지라도, 후대에 참고하고 보완하려는 노력이 지배계층에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어서, 정책의 배려나 보완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특별하다.

창의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이 한민족의 전통 안에서 종종 일어났으며, 그런 간헐적인 사건이나 사고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회자되고 되짚어 성찰하는 노력이 계승적으로 한민족의 습성에 녹아들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경향성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어왔고 근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이어졌다. 특히 주류와 비주류의 의견들이 정치적 맥락 안에서는 치열하지만, 상호의존적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이 내재한 민족이다.

조그마한 불합리와 불평등은 사회전반에서 공론화된다. 따라서 수정하려는 노력과 속도도 다른 민족에 비해 신속하다.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사회적인 노력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암묵적으로 인정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국가 공동체에 차곡하게 쌓아져 녹아든다. 외부에서 보면 불안하고 위태롭다.

한국사회에서 국가의 권력이 60년 동안 주류층에 의해 오랫동안 잠식하다시피 이루어진 것은, 이익에 대한 적절한 배분과 공정성을 추구하려는 시스템의 구축이 짧은 시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근현대 한국사회에서 정치인들은 권력을 통해 국가공동체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인권과 존엄성도 점차 부각되어 경제성장과 함께 성장했지만, 뒷전에 물러나 있었다.

비록 이러한 사실이 있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비주류계층은 국가재건의 목적을 달성한 주류계층에게 자유와 인권, 그리고 존엄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주류계층이 가진 권력에 대해 비주류계층이 목말라 있는 상황이었다. 비주류계층은 이러한 명분과 욕망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권력의 배분이 어떻게 적절한 지점을 찾아 교환될 것인가에 관련하여 국가의 운명도 걸렸지만, 인권과 존엄성에 관련한 신중한 인식도 생길 수 있다. 단순히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류라고 해서 보수라고 생각하고 비주류라고 해서 진보라고 할 수는 없다. 다양한 계층과 신분, 신자유주의를 통해 재단된 빈부의 격차, 교육의 차이 등등의 여러 요소가 주류와 비주류의 계층 속에 혼재되어, 어려운 분류의 법칙이 한국사회에 존재한다.

다만 개인 자신이 가진 역할과 능력에 따라 주류계층인지 비주류계층인지 구별할 방법은 있을 것이다. 한국 공동체사회에서 개개인의 좌표는 다양한 형태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특히 ‘존엄성’을 기반으로 하는 공정과 정의, 원리원칙에 있어서는 일치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잠시 잠깐의 정치적 성향으로 치우치는 경향은 있지만, 일시적이라 대의명분을 거스르는 사건과 결정은 후대에도 치명적으로 운명지어진다.

따라서 비주류계층이 가진 ‘자유’에 대한 열망은 주류계층에게 어필하면서 개인에 관련한 존엄성은 새롭게 인식되고, 주류가 가진 엘리트적인 경영방식과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비주류계층이 배워가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입법, 사법, 행정이 완전히 독립된 시스템의 구축은 개인의 ‘존엄성’이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작동하길 원하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열망이다. 다양성의 인정이 ‘존엄성’의 척도로 여겨지는 정신적 성장은 한국사회에서 급속도로 번져가고 있다.

소수 약자계층에 대한 이해도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어서,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한국사회에 깊고 넓게 성장한다. ‘좋은 정치인’을 바라는 한국인의 기대는 ‘존엄성’이 국가의 권력으로 인해 그 성장의 테두리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아직도 성인지감수성(性認知感受性)이라는 단순한 개념인식마저도 부족하고 ‘인권이나 존엄성의 본질’에 대해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