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민족교육 억압 위해 육체적·정신적 탄압 계속돼

이충호 충북도립대학 명예홍보대사

2021-01-31     동양일보
이충호

 

[동양일보]●조선인학교에 대한 무력 탄압

도립 조선인학교 교육과 활동이 이와 같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노선을 견지해서 반 침략적 입장에 서 있는 한, 미군 및 일본 정부의 눈에 조선인학교는 반미·반전운동의 근거지로 간주하였다.

행정조직을 무력화한 단계에서 새롭게 기동대에 의한 조선인학교 습격이라는 탄압과 반미 반일 교육을 선동한 매스컴 선전이 민족교육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 그야말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수법은 한국전쟁 중(1950년 6월~53년 7월)에 도립 조선인학교를 억압하는 주요한 무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서 ‘빨갱이 조선인학교’라는 이미지가 일본 사회에 정착하였다.

미국과 일본의 지배자는 조선인학교가 일본 내부를 갉아먹는 용납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하고, 물리적으로 억압할 기회를 노려 3차례에 걸쳐서 이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첫 번째 습격은 중국 인민 의용군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이 한·미군을 38도선의 남쪽으로 물리친 1951년 2월에 행해졌다.

도립 조선고교의 한 학생이 반전(反戰) 전단을 갖고 있었다는 구실로(실제로는 경관에게 심문을 받고 경찰서로 연행되던 도중에 바지 한 벌을 보자기에 싸서 냇가에 던져버리는데 지나지 않았다.) 교육장이나 교장에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 500명의 무장경관이 조선 중·고교를 갑자기 덮쳤다. 이 상황을 학생의 증언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51년 2월 28일 오전 6시 15분 조선인학교 중에는 빨갱이의 비합법적 인쇄소가 있다는 이유로, 돌연히 500명의 완전히 무장한 경관이 습격하였다. 학생들이 자고 있던 여자 숙소에 진흙이 묻은 군화를 신은 채 침입하여, 이불을 걷어 젖히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였다. 그리고 교무실에 있는 학기말 시험의 답안 용지, 도화, 작문, 그 밖의 작품까지 다 가지고 가 버렸다. 우리는 이 굴욕에 참을 수 없어 항의 운동을 일으켰고, 학부모와 동포에게 널리 호소했다(도립 조선인 고교 학교 자치회, <태풍은 어린나무를 습격> 1954년 6월).

개인 수사라는 이유로 전교를 짓밟은 이 탄압은 2.28사건으로 부르고 있다. 이런 경관의 행위로 명확히 알 수 있듯이 이는 조선인학교에 대한 강제적인 현장 조사였다. 그리고 조교조(朝敎組)의 항의 성명에 의하면, “힘들여 쌓아 올린 교육 성과도 하루아침에 완전히 수포가 된 느낌이 들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라는 것이었다.

그해 3월 7일에, 2.28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이 학교에서 PTA 총회가 열렸지만, 신고하지 않은 집회라는 이유로 3000명의 무장경관이 다시 학교를 포위했다. 앞에서 인용한 <태풍은 어린나무를 습격하다>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3월 7일, 도립 조선고교에서 PTA 총회(2000명 참가)를 열었다. 그런데 이 PTA 총회까지 신고하지 않은 집회라고, 3000명의 무장경관이 학교를 포위하고 비상사태를 선언해 버렸다. 오후에 대회가 끝나고 학부모는 뿔뿔이 흩어져서 항의했고, 나중에는 중학교 하급생 300명이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이어서 직원회의에서 수업 재개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으로 옮기려 할 그때, 경관 대는 권총 1자루가 없어졌으니까 그것을 수색한다고 해서 학생과 교직원만이 있는 교내로 밀어닥쳤다. 그때의 일을 한 학생은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있었던 일이다. ‘돌격!’이라고 하는 살기 어린 경관 대장의 호령이 있은 10분 후. 아! 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비참한 일이었다! 참으로 비인도적이기 짝이 없는 자들이. 교문은 피로 물들었다. 교문 주변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학교를 지키려고 하는 중학생들이 무참히도 짓밟혀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중상자 수 10명, 경상자 200명, 의식 불명자 7명…… 이 광경을 사진으로 찍으려 한 카메라맨까지 경관의 곤봉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또 그 광경을 찍으려 한 산(サン) 사진의 신문은 정간당했다.

조교조(朝敎組)의 항의 성명은 이 순간의 광경을 “‘국가 권력에 불만은 있나!’ ‘조선인 따위는 모두 죽여버려!’라고 외치면서 뒤에서 곤봉을 마구 휘둘러 내려치고, ‘물러가라,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울부짖는 학생들을 학교에서 완전히 내쫓아 버렸다”라고 전하고, 아울러 이때 “학생 중에서 중경상 60명(위독 3명) 및 검속자(檢束者) 6명을 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28사건 및 3.7 사건에 의한 이와 같은 조선인 학생에 대한 폭행은 일본 교육사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박해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인학교에 대해서 감행되었다. 朝敎組는 “우리는 일본인이건 조선인이건, 교사이건 학생이건 이 폭거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라고 성명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치안 당국은 원인을 찾아내서 도립 조선인학교의 무력 수사를 꾀한 것이지만, 1952년의 메이데이 사건 직후에도 소란죄로 포박하고, 이번에는 조선인 소학교를 덮쳤다. 앞에서 언급한 세계교원회의에 제출된 보고서는 그 광경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도내(都內) 6개 조선인 소학교에 대해서 수천 명의 무장경관과 장갑차, 기관총까지 동원해서 교내를 구석구석 수색하고, 理科의 실험 재료를 화염병의 재료라고 하고, 운동회에 사용하는 막대기는 죽창이라 하여 압수했다. 교원 10명을 소요 용의자로 검거해 갔다. 또 후카이와(深川)의 도립 제2 조선인 소학교에서는 6명의 교원 전원이 검거되고, 수업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

이상에서 조선인학교는 치안 단속의 대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내용이었다.

●‘반일 교육’ 캠페인

이와 같은 탄압과 수사가 행해진 때에 마다 조선인학교 탄압을 지지하고 ‘빨갱이 교육’을 비난한 매스컴의 공격이 뒤를 이었다. 조선인학교의 전후사(戰後 史)는 매스컴의 비난 중상으로 계속 상처받은 역사였지만, 그래도 이 시기만큼 대대적으로 ‘반일 교육’ 캠페인을 펼친 적은 없었다.

3.7 사건의 때에도 “각 신문은 모두 경찰 당국의 태도가 마치 정당한 것처럼 기사를 썼고(朝敎組 聲名)” 메이데이 사건에 허점을 이용해서 수사한 때도, 각 신문에서는 “매일 같이 조선인학교 ‘화염병 제조소’, ‘죽창 훈련소’라고 하는 등 허위 선전으로 지면을 떠들썩했다”라는 것이다(세계 교원 회의 보고서.

어떤 어머니는 사실과 보도의 격리됨을 알고 고발의 필을 들었다. “내 막내 아이가 다니고 있는 제1 소학교(荒川)의 예를 들어보아도 화염병을 제조하고 있다고 하고, 그 증거품을 많이 몰수했다고 신문에는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죽창 사진까지 찍어서 보도하고 있습니다”만, “경관들이 마음대로 교무실로부터 시작해서 창고, 변소치는 구멍, 천정 등 아이들이 정성껏 청소한 평화스러운 학원을 더러운 구둣발로 여지없이 황폐하게 짓밟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러자 理科 실험실용 약품 상자에서 두세 개의 약품과 창고에서 등사판에 사용하는 휘발유병을 꺼내서 화염병 제조라고 날조한 것입니다. 더욱이 운동회에 사용하는 대나무 장대를 창고에서 꺼내 와서 죽창이라고 주장하였다”라고 고발했던 것입니다(朴靜賢, ‘아이들을 행복하게’ <평화와 교육> 1952년 11월호.

도립 조선인학교는 이와 같이 치안 당국의 감시와 탄압하에 있었고, 또 탄압할 행해질 때마다 매스컴의 중상모략을 받았기 때문에 그곳에 있던 조선인 교사·학생은 물론 일본인 교사까지도 계속 긴장된 정신생활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그 위에 추격 탄을 던지는 식으로 1952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서 조선인학교 교육내용에 대한 ‘반일’ 캠페인이 펼쳐졌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이 그 중심이었다.

1952년 8월 7일의 ‘빨갱이 조선인학교, 나는 그곳을 정신병원이라 부른다. - 한 일본인 교사의 수기’라는 표제의 신문기사가 그 시작을 알렸다.

그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일련의 조선인학교 비행 기사의 특징은 조선인학교에 근무하는 일부의 일본인 교사로부터의 취재·보고한다는 형식을 취했다.

이들 일본인 교사의 일부는 국어를 일본어로 알고, 학생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부르는 것에 의심하지 않았고, 조선인 학생들을 일본인으로서 교육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따라서 조선인 교육집단에서 고립되고, 그것에 반발하여 비난과 편견의 눈으로 교육을 보고 있었다. 그 왜곡된 영상이 매스컴의 손에 의해 더욱 선정적으로 왜곡되어 전해지게 되었다. 가지이(梶井) 씨의 요약에 의하면 캠페인의 주된 항목은 아래와 같았다.

1. 조선인학교 교실마다 김일성의 초상이 걸리고, 매시간 공산주의 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2. 理科 시간이나 방과 후에는 화염병을 제작법을 지도하고 있다.

3.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본인 교사를 닥치는 대로 규탄하고, 추방하려 한다. 그러므로 양심적인 일본인 교사는 언제 공격의 대상에 오를지 전전긍긍하는 상태이다.

4. 조선인학교에서는 금지되고 있는 조선어로 수업하고 있고, 국어(일본어)는 무시되고 있다.

5. 이것이 도민(都民)의 혈세로 운영되고 있는 도립 조선인학교의 실태이다. 무엇인가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인학교 중상모략의 캠페인에 대해 조선인은 항의했지만, 신문사에서는 국익 옹호라는 답변뿐이었다.

즉 8월 7일 자 조간신문에 조선인학교에서는 매일 2시간씩 교원을 대상으로 정치교육을 하고, 이과 시간에는 화염병의 제조법을 가르치고, 체조 시간에는 죽창 던지는 법을 연습시키고 있다.

특히 8월 15일 자 조간신문에는 학교의 교원과 PTA회장이 조국방위대장이라며 발언한 내용을 두 기사 모두 반 페이지에 걸쳐서 게재했는데 얼마나 심하게 날조했는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 기사뿐만이 아니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거듭된 주제의 기사는 조선인에게 대한 적대 행위이고, 조·일 양 민족 간에 이간책을 써서 국내의 모순을 타민족에게 전가하려 한 선전이 아닌가’라고 추구한 점이다.

이에 요미우리(讀賣) 신문사의 상담부장은 ‘본사는 확신을 갖고서’ 기사를 실었다. “귀하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것은 자유이고, 견해의 차이다. 어쨌든 귀하들은 우리 보고 거짓말쟁이 신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견해가 다르면 자유롭게 선전하면 될 일이다. 본사는 국책에 따라서 운영할 방침이다”라고 대답하고, 편집국장과 사회부장에게 맞출 필요는 없다고 갑자기 돌변했던 것이다(‘횡포한 讀賣신문사’<평화와 교육> 1952년 8월호).

그렇게 한 이후 <週刊 讀賣> 9월 29일호에서 ‘조선인학교 린치 사건’이라는 머리기사를 싣고(橫須賀市立 諏訪小學校分校의 사례), 소학생까지 ‘반일’ 교육으로 취해지고 있다는 비난이 가해졌다.

이 기사는 투서의 소개와 현장 탐색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초점은 두 개가 있다. 음악 시간에 일본의 창가를 불렀다는 데 대해서 6학년생끼리 싸운 것이 하나이고, 그 교육내용의 양상을 묻지 않고, 일본 노래를 부른 학생을 공격한 다른 학생의 행동을 ‘린치(괴롭힌)다’고 해서 과장·비난했다.

또 하나는 공격한 학생에게 “조선으로 돌아가세요”라고 한 일본인 여교사의 문제로 그 정도로서 화살을 던진 것에 대하여 동정을 피로하고, 부제로 되어 있는 ‘요코스카(橫須賀)의 일본인 교관 추방 투쟁’을 ‘추방’당하는 측을 동정하는 시점에서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캠페인은 아무래도 ‘일본인과 구별 없는 교육’을 당연시하는 시각을 전제로 하고, 이를 타파하는 조선인학교 교육은 반미·반일·빨갱이 노선에 선 것으로서 일본인에게는 위험한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는 역할을 다했다.

당시의 매스컴은 패전 후의 ‘제 3국인’론에서 ‘빨갱이 반일 교육’ 선전에 이르기까지 지배자의 눈으로 재일조선인을 바라보는 체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캠페인은 치안 당국에 의한 조선인학교 감시·탄압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1952년 4월의 ‘강화조약’ 발효에 기초해서 재일조선인 교육정책의 수정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어쨌든 가지이(梶井) 씨의 요약 제5항에 있는 것 같이 ‘혈세로 빨갱이 조선인학교를 먹여 살리지 말라’는 논리는 일본 국민에게 사이에 잔존해 있는 차별 의식과 쉽게 연결되어, 지금까지의 취학의무제를 폐지하는 정책의 전환을 의심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격주 월요일 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