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포럼<141> 존엄성의 가치를 노년 철학에 적용하기 -상-
원혜영 충북대 윤리교육학과 강사
[동양일보]나는 여기서 노년 철학에 관련한 두 권의 책을 소개하기 전에, 최근 영화배우인 안젤리나 졸리가 GEEF 2021(Global Engagement & Empowerment Forum, 2월 5일)에서 난민과 이민자의 어려움에 대해, 그리고 여성과 아이가 겪고 있는 인권 훼손에 대해 강조한 부분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나 자신이 여성이기에 공감을 크게 받은 것도 있지만, 우선적으로 그녀가 가진 영향력을 영화배우로 한정하지 않고, 인류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가졌기에 공유하고 싶다. 여성은 남성보다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감성적으로 가졌다.
예전에는 단순히 여성이 모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여성은 태어나는 그 태생부터 자신이 소수자이고, 약자로 사회적 공동체에서 인정받기까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고 적응하면서부터 감성적인 존재였다. 사회적 차별과 태생적으로 공동체에서 온전한 인정을 경험하지 않은 존재는 그런 감성이 불합리하고 자신감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성이 아이와 노인을 감성적으로 이해하고 가치 있게 대한다는 사실에서, GEEF 2021에서의 토론은 풍부하고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교류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소수 약자에 관련한 인간 존엄성의 실상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면서도 여전히 퇴행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안젤리나는 실망스럽다고 전한다. 그녀에게 인상 깊게 느꼈던 점은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한다는 것이며, 그녀가 전문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통찰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아이와 여성에 대한 투자는 어떠한 것보다 실용적이고 발전적이며 공동체에 이익이 크다”라고 한 그녀의 말은 나에게 깊이 새겨졌다. 미래지향적인 공동체를 꿈꾼다면 지금 한없이 보호받아야 할 존재인 아이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공동체 일원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되고, 나약한 여성이 사회적 존재로 자리하면서 직· 간접적으로 인류 공동체를 위해 도움을 주고 있기에 관심을 끈다. 전폭적인 지원이 아이와 여성을 위해 쓰이는 것은 미래를 위한 것임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제도와 인식이 변하기를 바라는 그녀의 희망은 언제쯤 실현될지 모르겠다. 그녀의 희망이 우리 모두의 희망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뿌리 깊은 이해가 전 지구적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사건들, 과정들, 그리고 법률이 있어야 할까? 이런 일들에 앞장서는 사람이 따로 있고, 여전히 유린당하고 침해하는 제도, 국가, 민족 그리고 개인이 존재한다. 공동체란 정말 미묘하면서 복잡하다. 모든 구성원이 함께 공유하고 연관되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에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항상 해결책과 대안에 관련된 모색은 뒷전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전염병의 시대에도 인간은 서로를 보듬어 나가기보다는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낸다. 팬데믹 현상이 전 지구가 연결되어 있다는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지식층과 미래학자들은 소수 약자 및 소외된 인간에 대한 배려를 존엄성이란 이름으로 강조한다. 팬데믹 시대는 우리가 우리의 공동선과 인류의 발전을 위한 열망과 함께 집단 및 모임의 얼마나 중요한 시간이었음에 큰 영감을 주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이와 여성뿐만 아니라 노인은 사각지대에 놓인다. 사회는 소수 약자에 대한 유린, 학대, 폭행 등의 사건에 대한 묘사와 문제 제기가 공감대를 얻기까지 무수히 반복되기만 하는 것 같다. 대안과 제도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느리기만 하다. 더 큰 문제는 인식의 전환이 사회적인 공감대를 얻고 삶의 실생활에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적이고 인문학적 토대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닐까? 사건 사고의 단편적 상황인식이 아니라 이제는 뿌리 깊은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이다. 인식의 전환이 개개인을 변화시킬 때 효과는 크다.
최근 나온 두 권의 책은 인식적 전환으로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어 권장한다. 나름대로 대안 및 철학적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소개한다. 특히 노년 세대에 관련한 인식의 변화에 의미 있는 진전을 기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목적을 가졌다. 두 학자 모두가 남성이기에 냉철하고 합리적이기도 하다. 이들은 한일 양국에서 노년철학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왔다. 그들은 노년기를 보내는 동안의 생활 흐름에 익숙한 서술을 위주로 논의한다. 대상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추었다. 여성 작가라면 더 감성적이고 노골적이며 직접적으로 서술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비교와 아쉬움도 있다. 아들이 늙으신 아버지를 보고 느끼며 드러내지 않는 깊은 감정처럼 느껴졌다. “아버지, 이렇게 노년을 여유롭게 즐기며 사십시오.”라며 말하는 듯하다. 딸들이 살뜰하게 부모를 챙기는 것과는 다른 거리두기가 느껴진다.
그들의 글은 철학적인 인간존재의 객관화를 위한 것이다. 늙으신 아버지에게서 얻을 수 있는 장점, 배우고 싶은 점, 그리고 존경보다는 그들에게 이제까지 수고스러운 삶을 내려놓고 편안한 노후를 권하며, 그 과정을 그대로 서술한다.
김양식의 <나이듦, 가슴 뛰는 내일>(수륙책방, 2020)은 인문학적인 사고를 토대로 하여 나름의 대안을 위주로 다루었고, 오하시 겐지(大橋健二)의 『노년철학 하기』는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흥미롭게 서술한다.
<나이 듦, 가슴 뛰는 내일>에서는 한국사회의 노년기에 접어든 계층에게 “나이 들면서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실을 인정하고, 현재의 모습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을 필요성”(김양식, 위의 책. 116)으로 설득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의 노년층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취약하다. 황금의 노년기를 맞이하는 계층은 취약한 노년기를 보내는 부류와는 상대적으로 차이가 크다. 노년기에 접어든 모든 계층이 ‘가슴 뛰는 내일’을 맞이할 수는 없다. 후손들의 불안한 삶이 노년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 책은 어느 정도 안정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그리고 인문학적 지식이 탑재되어 있을 때, 공감하기 쉽다. 나이 듦은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단조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활기차게 삶을 살도록 독려한다. 책의 소제목들에서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을 수용한다. 언제 어디서나 미소 짓는다. 단순한 삶을 산다. 배우는 것을 즐긴다. 도전한다. 세상과 소통한다. 규칙적인 운동을 습관화한다. 나이 들어가는 미덕을 실천한다. 내면의 고요함을 즐긴다. 자연과 대화를 나눈다. 죽음을 초월한다.’(김양식, 위의 책. 124-153) 등등이다. 열심히 살아온 노년기의 인생에 보너스처럼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이 든다는 것 자체를 즐기는 노년기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어렵고 힘든 노년을 맞이하는 인생도 여기에 공감하길 바란다.
인생에 모든 것을 성취해서 걱정 없이 보내는 부류보다는, 자신들의 입지와 자식들의 형편을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보내는 부류가 읽기에는 많은 것들이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하루하루의 처지를 걱정하며 빈곤하고 외로운 노년기에 ‘좋은 습관 길들이기’(김양식, 위의 책. 215)는 이제까지의 가져왔던 자신의 습관을 고치기에는 더욱 어렵게 만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환경이 좋은 노년기를 맞이하는 노인들에게 개선하고자 하는 여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이제까지의 습관을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높은 교육 수준과 자기관리에 철저한 삶을 살았던 노년에게 이런 것들은 쉽다. 더 유유자적하고 평온하게 보내길 바라는 것은 경직된 습관을 가졌던 노인들에게 어려울 수 있다. 노년기의 삶의 질은 습관이 좌우한다. 다시 자신의 습관을 고치고 바꾸는 것이 노년기에 가능할 수 있다면, 노력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삶의 공간이 점점 좁아져 끝내 집안에 고립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김양식, 위의 책. 240)라는 문구는 이제 이것은 노년기의 일상만이 아니다. 코로나 시대에 전 인류에 해당하는 말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노년의 삶을 역지사지하는 상황에 놓였다. 단순히 정착하고 고정된 삶이 노년기에만 해당하지 않는 현실을 목격한다.
다양한 인간존재의 어느 순간의 단편적인 상황이 아니라 전 인류의 상황임을 새삼스럽게 알아차린다. 나이 들어가면서 그 이전의 활발한 생활, 즉 모임이 소중했음을 깨달았던 것처럼, 인류는 지금 노년의 생활처럼 예전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류의 이기심에 경종을 울리고 반성하는 계기를 이번 팬데믹 상황이 알려준다. 노인들도 젊은 날의 치기와 이기심, 그리고 배려 없는 마음들을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반성할 수 있다. 팬데믹을 겪은 우리가 지난날의 활기찬 삶을 잃어버리고 그리워하고 후회하는 것처럼 말이다.
노년의 삶에 명상 수행하는 것은 죽음을 좀 더 친숙하고 두렵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좋은 방편이다. 명상 수련의 기본적 자세는 과거의 후회도, 미래의 걱정도 잊고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기본적 자세의 중요성을 인식시킨다. 노년기의 삶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노년기 모든 계층에게 일반적이다.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는 부류와 불행하게 보내고 있는 부류의 양쪽에 명상 수행은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평화로운 일상을 행복하게 보내는 마음 자세이다. 노년기에 새로운 번영이나 파트너십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평온과 잔잔한 미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관계보다는 옛 동지를 챙기기 마련이다. 이기심에 시달리고 젊었을 때처럼 아직도 잡고 싶은 욕심이 있는 노인들에게 이 책은 좋은 주제들을 선사한다.
또한 노인은 TV를 시청하는 것에 시간을 소비할 정도로 비생산적으로 시간 죽이기를 하고 있고, 바둑만 두거나, 온종일 탁구만 치거나, 서재에서 책만 보는 것도 바람직한 시간 관리가 아니라고 제시한다. 사회활동이 줄어들고 외부정보에서 차단될 위험성이 있는 수동적인 자세보다 적극적인 시간 관리와 활동을 권장한다.(김양식, 위의책, 247-249)
시간 관리는 성숙한 나이 들기의 연장선임으로 젊을 때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 좋은 습관이 들었다면 다행이지만, 고쳐지지 않을 수 있다. 나이 들면서 더 편안하고 느슨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나는 추천하기에 저자의 의도와 맞지 않을 수 있다. 김양식의 <나이 듦, 가슴 뛰는 내일>에서 우리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있을 노년기의 다양한 삶의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오오하시 겐지의 <노년철학 하기>는 일본에서 노년기의 다양한 논의를 토대로 한다. 철학하기라는 제목으로 업그레이드된 저서이다. 종전의 일본 노인 문제에 대한 비판서이기보다는 사실 그대로의 서술을 토대로 철학적 생각하기이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꼰대’라는 닉네임처럼 외부 대상화하기보다는 노인 자체의 내부적인 감성으로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는 면도 놓치지 않았다. 현실적인 문제도 그대로 드러낸다. 연금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노인들, ‘악몽의 노후’에 대해서도 ‘하류 노인’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온후한 노후를 맞이해야 할 노인들이 소매치기가 되는 초고령사회의 어두운 현실도 솔직하게 말한다. ‘괴롭다’, ‘외롭다’, ‘쓸쓸하다’, ‘슬프다’라며, 너무나 긴 노후를 ‘생지옥’이라고 한다. (오하시 겐지, 위의 책, 36-38)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노인의 비극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한국은 일본보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고독에 괴로워하는 노인의 실체를 말할 수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노년철학 하기>는 단순히 노년기의 생활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을 내재화한다. 즉, “일본에는 내부로 향하는 전개가 있어서, 그 논리가 일본의 모든 공간성에 각인을 남기고 있다”라고 한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크게 확대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부로 작게 하나로 뭉치려 한다는 것이다.
한국 학자 이어령도 단적으로 ‘축소지향의 일본’(1982)이라고 한다. 오하시 겐지는 종속, 의존하는 회사 시스템이 건전한 시민의식을 형성하게 만들지 못하고, 자유로운 시민사회정치의 존재도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오하시 겐지, 위의책, 96-98) 그는 일본 사회가 가진 통합력이 장점으로 발휘되고도 있지만, 개인의 인격과 존엄성의 훼손을 간접적으로 말한다. 일본 사회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보다 자유로운 시민사회정치가 발달했다고 보이는데, 노년의 존엄성과 인격 모독은 일본보다 더한 이유는 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