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있는 커피이야기(10)/ 커피, 반복적인 우연과 행운의 결과
이상조 카페 컨설턴트·다락방의 불빛 대표
[동양일보]비가 오는 날이면 컵에 받은 뜨거운 물 속으로 커피믹스 한 봉을 털어 넣는다.
그리고 스푼으로 휘휘 저으면 물 사이로 퍼져나가는 갈색의 커피 가루와 달콤하게 피어오르는 향. 평소에는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지만 비가 오는 날 커피믹스 한 봉의 유혹을 나는 거부할 수가 없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주말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등산을 열심히 다녔다.
거의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휴일마다 등산을 하러 가다 보니 출발할 때는 날이 조금 흐린 정도였는데, 산을 오르는 중에 비가 내리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웬만한 폭우가 아니라면 준비해 간 우의를 입고 예정된 산행을 마치는 편이었는데, 우중 산행이 좀 불편하긴 하지만 몇 가지 좋은 점도 있다.
우선 비가 오는 중에 숲속을 걷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경험이다.
그리고 대지를 때리는 빗소리와 내 귀 바로 옆 우의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원근감이 느껴지도록 ‘쏴 아아’, ‘후드득’, ‘후드득’ 하고 소리가 나는데, 정말 듣기 좋다. 또 마지막으로 정상 부근 경치 좋은 적당한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며 마시는 커피믹스 한 잔이다. 그 한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서너 시간이 지나도 뜨거움이 식지 않는다는 성능 좋은 보온병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커피를 우려내든, 녹여서 먹든 필요한 것이 물인데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체내의 수분이 말라가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수분을 보충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결국 지구에 물이 없었다면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비도 내리지 않았을 것이고, 뜨거운 물로 커피를 녹여 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주에 셀 수 없는 별들과 행성들이 있지만, 지구처럼 물이 풍부한 곳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언젠가 지구에 물이 풍부해진 이유에 대해 읽은 적이 있는데, 먼 옛날 얼음덩어리인 소행성이 지구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물을 공급했다는 것이다. 왜 지구에만 그런 소행성들이 대거 몰려와 충돌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굉장한 우연의 일치이며 행운의 연속인 사건이 계속적으로 발생하여 지구는 오늘날과 같은 환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구에 물이 많은 것 같지만 지구 전체의 0.1%만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바다의 평균 수심이 3~4km에 이르는 것과 지표면의 80%를 물과 얼음이 덮고 있는 것을 생각해볼 때 ‘지구 전체의 0.1%만이 물이다’라는 말이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지구의 지름이 1,384km인 점을 생각해보면 지구 표면에 얇은 막이 깔린 정도에 지나지 않는 정도이고 그 얼마 되지 않는 물이 지표면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많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얼음덩어리인 소행성이 무수히 몰려와 지구와 충돌해서 바다가 생기고 바닷물이 증발해서 비가 되어 내려 담수와 지하수가 생긴 것이라는 가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오늘 내가 커피 한 잔 마시는 일이 따지고 보면 거의 일어나기 어려운 수천억분의 일에 해당하는 우연과 행운의 반복적인 사건의 결과임을 생각하니 결코 가볍지가 않다.
우리의 삶은 화롯불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같은 것이라고 했던가?
이토록 짧은 한 사람의 생 안에, 또 이토록 매력적인 음료를 마시는 찰나의 순간을 배치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