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간을 머금은 것에 이름을/ 화가 여인영 편
[동양일보]
시간을 머금은 것에 이름을
담쟁이 넝쿨의 길게 뻗는 손은 계획된 길이 아니다. 여인영(29) 작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2017년 대전역 뒤편 소제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철도관사촌’으로 사용됐던 ‘적산가옥(敵産家屋)’ 마을에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손길이 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옛것에 관심을 가져 본적없던 나에게 큰 울림을 준 장소’라고 했다.
작가의 첫 개인전 '솔랑시울길을 따라 걷다(재생공간293, 2017)'는 소제동 골목 솔랑시울길에 오랜시간 있지만, 잊혀진 철도관사촌의 흔적을 더듬은 것이다. 솔랑시울길은 ‘반짝이는 솔랑산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아마도 작가가 마을길 이름을 그대로 전시제목으로 삼은 이유의 하나인듯하다.
첫 개인전 소책자에 그녀가 쓴 일기를 읽는다. “… 사라지는 것들 흔적을 남기는 것들 … 10년 전 소제동을 찾은 유현민 선생님은 관사42호를 ‘소제창작촌’이라 이름 지었다. … 지붕 낮은 이 건물은 ‘재생공간293’이라는 이름이 생기고 많은 작가들의 무대로 다시 태어났다. … 나는 모든 물건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부르며 나를 확인한다. 내가 이름하고 품은 모든 것들은 의미 있다. 이름을 가진 이들을 함부로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작가는 일기를 쓴다. 그 일기를 다시 열어 보길 즐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름을 부른다. 작가는 ‘소제창작촌, 재생공간, 시울마실’에 ‘오랜 향기를 머금은 풍경’이라고 부른다. 과거는 다시읽기를 통해 더 이상 잊혀진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로 다시 살아난다.
작가가 ‘솔랑시울길’에서 얻은 깨달음은 이후 자신의 창작과 삶으로 뻗어 ‘시간과 기억에 관한 탐구’라는 창작논제를 설정한다. 스스로 자신을 ‘오래되어 낡아빠진 것들의 기록을 통해 시대를 잇는 매개자’로 위치시킨다. ‘낡아빠진 것들은 (그것을 사용한)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것들’에서 작가가 본 것은 ‘상처’다. 작가는 ‘상처난 채로 벗겨진 나와 닮았다.’라고 말한다. 오송에 살고 있는 작가의 눈에 자신의 동선에서 늘 있었던 낡은 건물 '강남부동산(2018)'이 어느 순간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자신의 일상에 늘 거기에 있었지만 그동안 놓치고 있던 오래된 사물을 보았다. 그녀는 ‘내 기억 속의 틈을 찾는 여행’이라고 한다. '기억과 기록의 사랑(2018)', '기억의 틈(2018)' 전시를 그렇게 만들었다.
작가가 ‘기억의 틈에 젖어 허덕이고 있을 때,’ 2019년 2월 강남부동산이 철거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폐허’에 충격을 받았다. ‘사라짐’에 대한 물음이 그녀의 새로운 창작과제가 되는 순간이다. 그녀는 그 ‘사라짐’ 속에서 ‘버려진 것’을 보았다. ‘오랜 시간 홀로 지내온 외로운 집’이 철거되고 작가는 그 안에서 버려지고 ‘부서진 자개장’을 찾았다. '폐허(2019)', '오래되어 낡아빠진 것들의 기록(2020)'으로 상처입고 버려지고 언제가 사라질 것들에 대한 기록을 보여주었다.
오는 11월 마지막 주 숲속갤러리에서 '발광하는 ××'로 전시 예정이다. 이번에는 자신을 좀더 들여다 볼 작정이라고 했다.
▷여인영 화가는...
충남대학교 회화과(한국화 전공, 2016) 졸업. 개인전 5회, 그룹전 20여회.
미술프로젝트 15회, 충청북도청 작품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