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가을하늘과 119
박상규 진천소방서 재난대응과 반장
[동양일보]하루에 두서너 번 하늘을 올려다볼 만큼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은 높고 파랗다. 유난히 가을하늘이 높아 보이는 것은 늦장마가 끝나고 이따금 찾아오는 태풍이 지나가면 비로소 가을이 시작되는데, 이때 시베리아 벌판의 공기가 우리나라로 다가오면서 높고 파란 하늘이 나타난다. 이는 장마와 한여름의 비가 공기 중의 먼지를 씻어 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눈 시립도록 푸른 하늘은 세상 그 어떤 얘기라도 보여주려는 듯 조각구름으로 주옥같은 시를 써 띄워놓고, 한가위의 넉넉함 만큼이나 가을에는 바람조차 풍요롭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닮아가는 과정이라고들 한다. 그 대상이 미움이면 미운 형상으로, 그 대상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형상으로 투영되는게 세상 이치란다. 소방관으로서 수많은 화재현장을 누비면서 불타는 것들은 모두 아픔이 있다는 걸 그 환한 불길 스치고 지나간 검댕 숲에서 보아 왔다. 잔해를 들어내며 뿌려대는 물줄기에 모든 이들의 아픔들이 말갛게 씻겨 나가길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날이면 어느새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와 있었다. 그런 날이면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마음 깊은 곳에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이 화상 자국으로 형벌처럼 박혀 하루종일 가슴이 아려 왔었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이름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꿈꿔왔다. 그 뜨거운 심장의 박동 소리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언제까지나 메아리치기를, 아무런 대가 없이 흘렸던 투명한 땀방울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 눈물 없는 그런 세상을 우리 소방관들은 꿈꾸고 있다.
이렇듯 119의 일상은 청렴을 강요하거나 주입식 교육을 하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레 표출되는 것이다. 각종 재난현장에서 묵묵히 국민들의 안전만을 바라보며 땀을 흘리는 동료들의 모습에서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숭고함과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모습을 본다고 하면 지나친 자화자찬이라고 오해받을까 조금은 걱정이 앞서지만, 국민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소방인의 한 사람이라는 게 언제나 자랑스럽다.
요즘 공직사회에서 단연 화두가 되고 있는 적극행정 또한 각종 규제로부터 국민의 불편 사항을 사전에 해소해 주는 그야말로 국민을 섬기는 시스템이라 할 것이다. 이런 것에서 유추해 본다면 소방에 있어 예방행정은 재난이 발생하면 대응해야만 하는 모든 과정을 미연에 방지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목민심서는 아닐까.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그 어느 해보다 간절하게 기다렸던 청정한 가을하늘이 코로나19로 지쳐 있는 우리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시간이 흘러 겨울이 오면 새하얀 첫눈에 현재의 모든 아픔이 소복소복 덮이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