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길을 걸으며

우승경 수필가

2022-01-09     동양일보
우승경 수필가

[동양일보]출근길 걷기는 쉬운 듯 보이지만 간단하지 않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일어나는 시간을 당겨야 하고 화장하는 시간을 줄여야 가능한 일이다. 어렵게 걸을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지만 버스 승강장을 지날 때는 흔들린다. 목적지로 가는 버스가 나타나면 마음이 변해 순간적으로 올라탄 적도 많다. 늘 흔들리며 또다시 시작하고 흔들리기를 반복하는 과정을 거쳐 지금은 일주일에 서너 번은 걸어서 출근한다.

가끔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같이 출발하던 사람이 훌쩍 앞서 점점 거리가 멀어질 때가 있다. 한 번쯤 따라잡기 위해 어느 때는 뛰듯이 걸어보지만 따라잡을 수가 없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만큼 거리가 생기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진다. 성격이 몹시 급한 사람이구나, 어디로 갔을까? 어떤 직업일까? 방향이 전혀 다르겠지, 하고 혼자 상상한다. 그러다 일정 구간에서 나타나는 신호등 앞에 멈춰 서 있는 그분을 보면 아무리 앞서가도 빨간색 신호등이 멈추게 하는구나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치도 이와 같지 않을까. 주식으로 많은 돈을 벌었거나 부동산으로 큰돈을 벌어도 어느 순간 원점으로 돌아가기도 하니 말이다. 어디 돈뿐일까. 명예를 위해 달려다가 크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멈추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뉴스를 통해 자주 접한다. 또한 멈춰 있던 사람들 중에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면 앞거리가 멀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나보다 뒤처지는 사람도 있다. 앞만 보고 걷다가 어쩌다 뒤를 돌아보면 나와 조금씩 사이가 벌어져 멀리서 가물가물 걸어오고 있다. 거리가 먼 것 같지만 초록색 신호등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록색 신호등과 빨간색 신호등은 서로 공존하며 삶의 이치를 깨우친다.

사람마다 걷는 모습도 다르다. 한쪽 어깨가 내려간 사람과 올라간 사람, 보폭이 넓은 사람 과 좁은 사람, 온몸을 똑바로 세우고 걷는 사람과 구부정한 자세로 걷는 사람 등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모습들이다. 자세를 바르게 세우고 걷는 사람을 보면 왠지 당당해 보이고 자존감이 높아 보인다.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원점으로 돌아가려는 내 삶의 자세도 한 번 더 교정하게 된다.

걷는 길은 몇 갈래의 코스가 있다. 출근길은 최단거리 코스를 걷고, 퇴근길에는 주로 숲이 조성된 길을 걷는다. 그러나 힘들거나 울적할 때는 시장을 통과하는 길을 선택한다. 시장 가장자리에 펴 놓은 물건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본다. 직접 농사지었다는 할머니께 야채를 사면서 요리법과 삶의 자세를 덤으로 배운다. 할머니 곁에서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기분 전환이 된다.

천천히 걷다 보면 출근길에 못 본 것, 지금까지 못 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출근길 걷기와 퇴근길 걷기가 다르고 같은 길을 걸어도 날마다 다른 풍경이다. 어떤 생각으로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과 마음에 담는 것이 달라진다. 걷기는 마음껏 상상할 수 있고 뒤를 돌아보게 하며 현재의 소소한 즐거움을 자주 경험할 수 있어서 좋다.

걷기 좋은 계절은 가을이다. 내 나이도 가을에 와있다. 출근길처럼 봄에는 빛을 받기 위해 애썼고, 여름에는 꽃을 피우기 위해 힘썼다. 목적과 성과를 위해 온 힘을 다해 걸어왔다면 이제 퇴근길처럼 인생의 가을에 와보니 드는 생각은 많다. 내가 지금껏 걸어온 길은 나름의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 열매의 크기가 작고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아름답게 받아들이고 싶다.

새해에도 나의 걷기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