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미용사(美容師)

김정옥 수필가

2022-01-16     동양일보
김정옥 수필가

[동양일보]“올해 서리태를 100말 팔았어요.” 전장에서 수훈이라도 세운 사람이 무용담을 말하듯 한다. 장사도 아니면서 참 많이도 팔았다. 나도 한 말 샀으니 그의 공에 일조한 셈이다.

손님들이 농사지어 거둔 것을 미용실 원장이 팔아주었다. 애써서 농사지은 품을 알기에 그러는 것일 게다. 필요한 사람에게 알선해주면 파는 사람은 제값에 팔아서 좋고 사는 사람은 좋은 물건 싸게 사서 좋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남의 일을 중간에서 이리저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무거운 콩 자루를 들고 날고 해야 한다. 주문한 사람이 바로 가져가지 않으면 미용실 한구석에 며칠 동안 콩 자루를 쌓아 두어야 한다. 이런 잡다한 신경을 쓰면서도 신나게 하고 있다. 손님들 머리뿐만 아니라 속마음까지 매만지고 있다. 진정 미용사다.

알고 보니 콩뿐만 아니라 올갱이, 청국장, 무말랭이, 수수, 참외장아찌 같은 먹거리에다가 화장품과 신발도 판다. 손님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구해줄 것만 같다. 미용실에서 뭘 그렇게 파냐고 했더니 손님이 팔아 달라고 해서 한두 번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며 한바탕 깔깔 웃는다. 솜씨를 파는 것이 우선인데 물건 중간 유통업으로 주객이 전도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내년에는 또 무엇을 더 팔려나.

이곳은 20년 된 단골 미용실이다. 요즈음은 간판부터 영어로 '**헤어hair'가 들어간 곳이 많은데 여기는 그냥 *미용실이다. 미용실 특유의 헤어 디자인 사진 한 장 찾아볼 수가 없다. 거울과 미용 재료와 미용 기구가 전부이다. 손자가 어버이날 유치원에서 만든 색종이 카네이션이 떡하니 붙어 있는 곳이다.

파마약 냄새보다 사람 냄새가 폴폴 난다. 손님들이 햇고구마도 쪄 오고, 냉동실에 얼렸던 떡도 녹여 가져오고, 시큼털털한 술빵도 쪄 와 나눠 먹는다. 머리에 파마 롯드를 감은 사람과 시커먼 염색약을 치덕치덕 처바른 사람이 두런두런 정담을 나눈다. 원장도 손은 머리를 매만지며 온갖 참견을 다 한다. 푸근한 시골 사랑방 같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미용실을 찾는다. 머리를 자르거나 파마를 하여 헤어스타일을 바꾸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머리에 갖가지 색의 물을 들이기도 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훤하게 빠진 머리카락을 감추기 위해 가발을 사기도 한다. 또 예식이나 행사가 있는 날에는 미용사의 손을 빌려 화장을 하려고 미용실을 찾는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미용실을 들어올 때와 말끔하게 손질 후 매무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며칠 만에 흰머리가 허옇게 나오는 것이 영 마뜩잖았는데 미용사 손길을 거쳐 십 년은 젊어지고 없던 인물이 살아났다. 머리를 다듬었는데 무겁던 마음마저 한결 가벼워졌다. 그냥 집에 들어가지 말고 어디라도 가야 할 것 같다. 미용사의 손끝에서 부린 마술이 신기하다.

미용(美容)을 속내를 아름답게 하는 의미로 확장하면 어떨까. 삶을 누긋하게 즐기고, 좋은 일을 권하며 마음 맵시를 내며 사는 것이 미용이라고 해도 되지 싶다.

이제부터 수필을 쓰면서 수시로 마음을 수행하며 내면의 맵시를 가꾸는 미용사가 되어봐야겠다. 겉모습보다 내면을 닦고 마음을 갈고 다듬어 보리라. 그러려면 속내가 아름다워지는 미용법을 하나하나 강구하는 것이 우선일 듯하다.

시간이 지난 후 혹시 누군가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단골 미용실 원장처럼 마음 매무새 기술을 펼치리라. 기꺼이 오지랖까지 떨어야겠다. 적법한 미용사 자격이 없어 솜씨는 어눌하더라도 마음을 다하면 통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