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물건도 사람과 오래 하면 생명이 돋는다" /회화설치 고정원 편
박종석 미술평론가
[동양일보]첫 물음부터 작가에게 무척 곤혹스런 질문을 했다. 고정원(37) 작가는 대학 졸업 후, 2013년부터 폐간판을 주요 소재로 작업해왔다. 2019년 6번째 개인전까지 폐간판을 철거 해체하여, 주요 부품을 갈무리해서 정돈해 놓았다가, 다시 작가의 이야기를 담아 전시작품으로 재조립하여 설치하는 일련의 행위에는 참으로 많은 시간과 땀이 필요하다.
그가 비교적 규모가 큰 입체설치물 작품 전시를 마치고 난 후, 새로운 소장자를 찾지 못한 그의 작품은 다시 작가의 작업실로 돌아와야 했다. 공간을 줄이고 효율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작품을 다시 해체할 때의 심정은 어떠한가?
‘내가 왜 이 힘든 작업을 계속하고 있지? 나는 왜 이 작업을 멈추지 못하지? 이 두 물음 모두에 아직 명쾌히, 나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답을 못하고 있어요. 특히 2019년 개인전을 마치고 작품을 철수하기 위해 한 조각 한 조각 해체하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더욱 큰 공허함이 밀려와 작업의 지속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졌어요. 물론 그때도 지금도 결론은 같아요. 작업은 한다. 계속한다. 내 삶이다.’
작가는 2014년 대학을 졸업하기 이전부터 간판제작설치 사업을 하는 부친의 일을 도왔다. 당당하게 학비와 용돈을 받는 일이기도 했다. 누구 못지않은 회화 능력을 갖고 있는 그가 왜 폐간판을 활용한 설치작업에 몰두했는지, 필자가 처음 그를 만났던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상당 부분 이해된다.
‘버려진 물건을 제 작업실로 가져오는 이유를, 저는 그것을 연민이라고 생각해요. 철거되어 해체된 폐간판에 나의 이야기를 투영시키죠. 버려진 물건을 수집해서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 안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나에 대한 위로가 아닌가 생각해요.’
작가의 눈에 비친 버려진 물건, 특히 아버지와 함께 철거해낸 다양한 재료와 형태(상호명, 글자체, 언어, 나무, 금속, LED, 네온, 벗겨진 페인트 등)의 폐간판이 품고 있는 지난날 이야기가 작가의 마음에 강하게 파고든 듯하다. ‘간판은 한 자리에서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나름의 생명을 다해요. 그 가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리는 일을 묵묵히 하죠. 주인과 함께,. 그것이 정말 수명이 다해 망가져 어쩔 수 없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고,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짧은 시간에 어쩔 수 없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고. 어느 경우든 제 눈에는 버려짐에 대한 연민, 안타까움이 있었어요. 나는 그 시간을 연장시키픈 마음이 있어요.’
작가의 말을 들으니, 한갓 사물도 인간의 세계(삶)로 들어와 사람과 체온을 나누고 함께 오래 하면 생명이 돋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2021년 초에, 작업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도 굳이 폐간판을 소재로 한 설치작업이 아니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일상의 오브제로도, 영상작업으로도, 회화작업으로도 그 이야기가 가능하니까요. 버려진 것에 대한 연민. 시간의 연장. 쓸모의 연장. 그 쓸모가 애초의 쓸모가 아니더라도 다른 쓸모의 발견. 연민의 가슴으로 보면 발견할 수 있죠. 다른 이에 대한 연민은 나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죠.’ 그는 넓고 깊은 품을 갖은 사람이다.
▷고정원 작가는...
충남대 예술대학 회화과(2011년) 졸업, 개인전 6회, 단체전 30여회. BRT작은미술관(세종시), 충북문화재단(동부창고, 청주) 등 작품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