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는 클래식이야기/17. 20세기 가장 매혹적인 작곡가, 라벨 ‘물의 유희(Jeux d'eau)’

강효욱 소리창조 예화 상임작곡가

2022-06-23     동양일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중 피아노 솔로 부분 일부

 

[동양일보] “매우 난해한 음표 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음악”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의 음악을 설명하는 말이다. 라벨은 드뷔시와 함께 낭만주의에서 현대음악으로 넘어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드뷔시와 라벨은 고전과 낭만 시대를 주도했던 장단조 음계를 배제하고 선법이나 온음계를 선호하여 사용하는 등 다양한 색채의 음악을 추구하여 인상주의로 분류되기도 한다.

라벨은 스페인과 국경에 맞닿은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음악 애호가였던 철도기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14세에 이미 파리의 음악원에 입학하여 전문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학업을 게을리 한 탓인지 라벨은 자퇴와 재입학을 번복하였고 상의 운도 따르지 않았으나, 당시 그의 작품들은 그의 재능을 증명하듯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스페인의 왕녀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1899)’는 그의 음악적 입지를 잡는 기반이 된다.

1901년 작곡된 ‘물의 유희’는 라벨이 자신의 스승 가브리엘 포레에게 헌정한 곡으로 초연에서 출판까지 꾸준히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된 곡이다. 이 곡은 제목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물방울에서 폭포에 이르기까지 물의 변화와 그 특성들을 다양한 리듬과 색채로 여지없이 표현해 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라벨의 음악 중 가장 유려하고 아름다운 곡이 아닌가 생각한다. 두 개 이상의 조성을 동시에 사용하는 ‘복조성’을 사용한 ‘물의 유희’는 조성을 넘나들며 현란한 물의 변화를 그려낸다. 라벨은 “이 작품 안에는 후일 나의 작품에서 계속해서 발견되는 모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나는 이 곡의 영감을 물소리와 폭포, 분수, 시냇물 같은 물이 만들어내는 음향에서 얻었다.”라고 설명한다.

라벨의 ‘물의 유희’와 유사한 느낌의 곡으로 프란츠 리스트의 곡을 들 수 있다. 리스트가 40년에 걸쳐 완성한 피아노 작품집 <순례의 해> 중 1권 스위스 ‘샘가에서’ 또한 물이라는 소재를 피아노음악으로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 두 가지 음악을 비교해 들어보면 음악을 회화적으로 그려내는 19세기와 20세기 표현방식의 유사성과 상이성을 경험할 수 있다.

1914년, 라벨의 작품이 인정받고 작곡가로서 위상이 올라가던 시기였으나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라벨은 군 입대를 지원하게 된다. 1917년 다리를 다쳐 제대하기까지 그는 전쟁터에서 참혹한 실상을 경험하고 동료를 전장에서 잃는 등 힘든 시간을 겪게 된다. 전쟁의 충격으로 창작활동에 제약이 생기게 되지만 <쿠프랭의 무덤>을 작곡하면서 이를 극복해낸다. 이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 독주곡 모음집 <쿠프랭의 무덤>은 모두 전쟁 중에 죽어간 친구들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모리스 라벨

 

이후에도 라벨은 전쟁에 얽힌 음악들을 만들어내는데 대표적인 곡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1930)’이다. 이 작품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오른팔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작곡된 것으로 왼손으로만 연주하도록 쓰여졌다. 왼손연주를 위한 곡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피아노 두 단의 악보 중 한 단만 있을 것으로 상상하겠지만, 이 곡은 악보 상으로는 여느 피아노곡과 다름없이 두 단 빼곡하게 악보가 그려져 있다. 라벨은 이 곡을 조금 더 쉽게 편곡해달라는 제안을 종종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고난이도의 음악을 작곡한 연유로는 넓은 음역대 활용으로 풍성한 음향을 갖게 하려함도 있었겠지만 왼손 피아니스트가 연습에 집중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난이도를 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스페인계의 어머니 영향으로 이국적인 리듬을 구사했던 라벨은 스페인 춤곡인 ‘볼레로(1928)’를 작곡하였다. 이 곡은 라벨의 대표적인 곡 중 하나로 지금까지도 영화, 애니메이션, 피겨스케이트 음악 등 다양한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중독성 있는 반복 리듬 위에 주제멜로디가 여러 가지 악기의 연주로 연결되어 있는 이 곡은 관현악 편성에 천재성을 보였던 라벨의 오케스트레이션 기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시대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곡가 라벨.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감상하며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대의 변화를 음악과 함께 느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