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미래유산/ 11. 수암골
한 계단 한 계단 풍경과 추억이 깃드는 곳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대표이사·에세이스트
[동양일보]바람, 너였구나. 신발 끈 고쳐 매고 물길, 들길, 숲길을 거닐며 봄을 시샘하는 바람, 너였구나. 햇살, 너였구나. 창문 틈을 비집고 쏟아지는 맑고 향기로운 빛이 낭창낭창 내 가슴을 어루만지는 무량한 햇살, 너였구나. 구름, 너였구나. 옛이야기 지즐대는 가르마 같은 대지에서 풋풋한 봄내음, 부풀어 오르는 땅의 기운 살라먹는 뭉게구름, 너였구나.
어제는 고향 집에서, 오늘은 도시의 골목길에서 정처 없는 방랑자처럼 어슬렁거리게 한 것이 바람이고 햇살이며 구름이었다. 인간에게 유목민이라는 원시성이 있다고 했던가. 삶이 고단하고 피곤할 때면 회색 도시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험한 세상에서는 놀이와 게으름도 전략이다. 삶의 쉼표가 있고 여백의 미가 있으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배고프고 괴로운 시대에 살아서일까. 심산한 삶에 돌파구가 없다고 생각할 땐 어김없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옛 추억과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들을 생각한다. 맨발로 골목길을 걸어도 좋고, 논두렁 밭두렁에서 촐랑대도 좋고, 숲길과 실개천을 팔짝거려도 좋다. 자연은 항상 정직했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관용과 화해로 낯선 이를 두 팔 벌려 맞이했다. 이따금 삶에 지치고 남루한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자연은 돌아온 탕자를 기꺼이 허락했다.
북풍한설에 마음까지 얼어붙었는데 봄은 한사코 돌아와 뜰에 매화를 피웠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제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평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다. 심연을 알 수 없는 아득한 눈빛을 보며 사람의 삶이 저 꽃 한 송이보다 낫다고 자신할 수 있을지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비로소 여행은 시작된다고 했던가. 외로움이 깊어지면 수척해진 그림자를 이끌고 한유로운 풍경을 찾아 나선다. 세상의 풍경 중에 으뜸은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라고 했다. 마음의 현이 흐르는 강물처럼 반짝인다. 그러니 문 열어라 꽃들아, 트림하는 대지야, 징검다리 악동들아, 춤추는 새들아, 푸른 강산아. 나, 당신 곁으로 갈 것이니 어서 문 열어라.
봄꽃이 가득한 날, 수암골을 서성거렸다. 꽃 한 송이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텅 빈 충만을 느끼듯이 골목길에서 지나온 날의 추억과 새로운 날의 희망을 찾는다. 한 계단, 두 계단 발을 옮길 때마다 진한 꽃향기 속에 시리고 아팠던 지난날이 새순 돋듯이 피어난다. 까치발을 하면 오종종 예쁜 뜨락이 나그네를 반긴다. 타인의 삶을 훔쳐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의 풍경일 수 있지만 그 속살을 이해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수암골이 그렇다. 6·25전쟁의 피난민촌으로, 서민들의 보금자리로 고단한 삶이 켜켜이 쌓여온 곳이다. 여느 사람들처럼 사랑을 찾으려 했고 자식농사 제대로 지어 풍요의 세상을 만들겠노라 다짐했다. 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남들보다 몇 곱절 더 많이 일해야 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원한을 품는 일도 없다. 이 모든 것이 운명이니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는 것은 사치일 뿐이었다. 외롭지도 않고 헛헛하지도 않았다. 되레 살아온 날들이 장하고 대견할 뿐이니 황혼이 된 지금 수암골 사람들은 저마다의 숲과 삶의 마디를 간직하고 있다.
수암골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여 년 전, 지역의 화가들이 이곳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름하여 공공미술 프로젝트다. 주민들의 애달픈 삶의 풍경을 돌계단과 담벼락에 담으니 낡고 허름한 공간에 볕이 들었다. 아파트와 신도시가 기름보일러나 천연가스로 난방을 할 때, 이곳은 여전히 새벽마다 연탄을 지펴야 했다. 누구는 연탄재를 모아 공예품을 만들었다. 상처 가득한 수암골에 예술의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제빵왕 김탁구>, <카인과 아벨>, <영광의 재인> 등의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인기를 끌면서 도시 사람들이 낯선 풍경을 담기 위해 몰려들었다. 제빵왕 김탁구는 청주를 대표하는 빵집인 서문제과의 창업정신이 담겨 있다.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을 만들라는 정신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서문제과의 빵은 크고 맛있다. 우동은 둘이 먹어도 될 정도로 풍성하다.
연탄은 달동네의 상징이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겨울을 견디기 위해 연탄에 불을 지피고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스라한 희망을 갈망했을 것이고 남루해진 가슴에 영원히 식지 않을 온기를 담았을 것이다. 수암골은 그 추억과 감동을 그대로 담아 연탄이 미디어아트로, 문화상품으로, 캐릭터로, 동화나라로 새롭게 탄생했다. 누군가의 꿈이 되고 존재의 이유가 되었을 것인데 나는 골목길의 연탄재를 발로 차고 침까지 뱉지 않았던가. 골목길 평상에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는 노인들의 풍경을 보니 왠지 나의 가벼운 삶이 부끄럽다. 지금은 빛바랜 추억보다 디저트카페촌으로, 청주시의 전경을 품는 관광명소로 더 인기다.
수암골은 토정 이지함의 전설과 와우산성의 흔적을 품고 있는 우암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그 풍경이 소담하고 햇살은 빛난다. 마음의 평화가 깃드는 사찰도 있고 벚꽃은 무진장 피고 진다. 수암골 진입로에는 김수현드라마아트홀이 있다. 옛 청주시장들이 머물렀던 관사였는데 김수현 작가의 집필실로 이용되고 있다. <부모님전상서>, <엄마가 뿔났다>, <무자식이 상팔자> 등 한국 드라마의 새 역사를 펼치면서 ‘드라마의 대모’,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게 된 김수현 씨의 역작을 만날 수 있다. 이왕이면 옛 시장관사를 역대 시장들의 아카이브 공간으로 활용되면 좋겠다. 김수현 씨가 이를 소재로 불멸의 드라마를 만들면 어떨까.
칼 융은 “모든 치유자는 상처 입은 사람”이라고 했다. 나로 인해 상처받았으니 나로부터 치유가 시작되어야 한다. 치유의 시작은 사랑이다. 예기치 않은 불행이 삶을 유린하기도 하지만 사랑은 새로운 삶을 허락한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엄연해졌다. 역사적 기억 없이는 그 어떤 아름다움도 없다. 하여 수암골을 찾는 이들 모두가 지혜로 빛나고 감성으로 빛나며 새 살 돋는 아름다움으로 빛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