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조철호가 만난 사람/ 김현길 향토사학자
“지역 향토사 연구 1세대들의 헌신과 공적에 무한한 존경을…”
[동양일보] 충북 충주의 옛 이름은 중원경中原京이었다.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확대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국을 9주州와 5소경小京으로 개편하면서 오늘의 충주지역을 종래의 국원소경에서 중원경이라 하면서 비롯된 것이요, 중원은 이들 지역의 중심지라는 뜻이다. 신라는 이 중원을 중심으로 삼국민을 삼한일통三韓一統사상으로 제도하고 반 신라적 민심을 무마하여 범국민적 화합을 다지기 위한 상징물로 거대한 중앙탑을 건립했다는 학술논문(‘중앙탑의 건탑 연유에 대한 고찰’<중원경과 중앙탑>p.201) 등 평생 충주의 사료史料를 정리한 대표적인 향토사학자 김현길(金顯吉·91)한국교통대 명예교수.
진천에서 태어나 청주중‧고와 국학대, 고려대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대한유도학교 조교수를 거쳐 1978년 충주공업전문대(현 국립한국교통대) 교수가 되면서 ‘충주인’이 된 그는 45년 간 충주의 향토사학자로 일관했다. 충북문화재위원, 충북향토문화연구소장, 사단법인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장을 역임한 그는 1회 충주시문화상(학술부문)과 1회 충북도민대상(학술부문)을 수상했다. 1977년엔 <수필문학>을 통해 수필가로도 등단, <중원문화산책> 등 3권의 수상집도 출간했다. 주요저서로 <중원의 역사와 문화유적>을 비롯해 6권, 번역서로 <채근담> 등 3권과 100편이 넘는 논문이 있다.
김 교수는 예나 이제나 학자의 면모를 흩으린 적이 없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다. 이제는 고인이 됐지만, 생전에 가까이 하던 두 원로시인들은 그를 일러 “넉넉히 차오른 강물 같은 사람”(양채영 시인), “은발의 원숙함과 학의 고고함을 지닌 사람”(안병찬 시인)이라 했다. 향토사 연구모임으로 명성이 높은 충주예성동호회(현 예성문화연구회)에서 40여 년을 함께 활동 해 온 장준식 박사(국원문화재연구원장)는 “존경하는 역사학자로 한결같이 지역사료 연구에 열정을 다하는 분”이라 했다. 그가 정년으로 대학 강단을 떠난 지도 26년, 90이 넘은 나이에 어떻게 지내는지를 학계學界밖의 사람들마저 궁금히 여겨 4월이 가기 전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가 알려준 집 주소 <충주시 형설로 99>는 23년 전 <충주시 용산동 1410번지> 바로 그 집이었다. 전화도 847-5285 그대로다. 주소명이 바뀌었을 뿐이다. 2000년 1월 11일자 동양일보의 기획시리즈 ‘충북의 101인’을 취재하러 기자가 들렸던 바로 그 집 대문 앞에서 만났다. 40년을 이 집에서 살았다 했다. 도청 출입기자 시절 문화재 관련 회의 때문에 도청 복도에서 몇 차례, 예성동호회가 발견하여 전국을 깜짝 놀라게 한 ‘고구려비’ 현장 답사 때와 충주문인들의 출간기념회장 등에서 몇 차례 뵈었을 때는 그저 선‧후배 간의 의례적인 인사만이었다.
청주를 떠나 충주로 오는 1시간 20분간 차 안에서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얼굴의 주름살이며 꼿꼿한 자세가 90세 넘은 노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택 옆 미술교습소가 있는 건물에 마련된 연구실로 안내 됐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층계를 단숨에 올라가는 뒤를 따라 4층에 오르니 ‘翫史齋완사재’란 현액縣額이 단정하다.
● 완사翫史라면 역사를 즐긴다거나 갖고 논다는 뜻인가요?
“완翫자가 갖고 논다는 뜻도 있지만, 익힌다는 뜻도 지니고 있어요. ‘역사를 익히는 집’이란 뜻으로 썼어요. 몇 천권은 되는 책-주로 역사에 관한 것들이지만, 60평 건물에 3칸으로 나눠 쓰는데 두 칸은 모두 서가書架로 꾸몄어요. 살날이 많지 않아 어찌할까 고민하던 터에 마침 충주문화원 부설 충주학연구소에서 가져갔으면 좋겠다하여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 옛날 모습 그대로신데 건강관리를 위한 비책이라도?
“어머님이 잘 낳아 주셨지요. 3년 전 돌아가신 누님도 94세였어요. 나이가 들면서는 욕심이 없어야 하나 봐요. 내 경우 아무런 욕심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요. 병고로 10여 년을 고생하던 아내(이지순)가 11년 전에 떠난 뒤 혼자 살자니 적적하기는 하지만 편하기도 하고. 그래서 매일 낮잠을 1시간쯤 자는데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고요. 충주에 사는 둘째 며느리가 반찬을 챙기는 등 애를 많이 쓰지요. 2남 3녀를 두었는데 1남 2녀는 서울에, 둘째 아들은 충주에, 둘째 딸은 남편이 모 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는 진천을 드나들지요.”
● 서예를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정년을 하고 충주와 연고가 있는 ‘신라 서성書聖’이라 일컫는 김생金生 711~791? 798?서체를 익히느라 10년이 훨씬 넘게 매달리고 있지요.
매일 오전엔 걸어서 15분이면 닿는 충주시남부복지관에서, 저녁이면 이 연구실에서 쓰고 있어요. 충주엔 그가 머물었다는 김생사 절터金生寺址도 있고, 충주의 명현 5위 중 한 분으로 해마다 ‘우륵문화제’때 추모제를 올리고 있어요. 김생의 글씨를 중국 왕희지王羲之글씨로 오인할 정도라는 <삼국사기> 기록도 있는데 정작 이를 익히려니 자료가 부족하여 ‘김생연구회’도 조직하고, 탁본도 뜨러 다니고, 충주의 서예가 서동형 선생의 도움으로<김생서법자전>도 제작하는 등의 노력도 했지요. 김생서체 연구를 위한 기구가 절실한데 아무래도 충주시가 나서야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 향토사학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작고 큰 일이 많이 있지요. 그 중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우륵 오페라’지요. 2016년 9월인데, 제자가 전화를 했어요. 우륵을 소재로 한 창작 오페라내용을 소개하는 방송에 “우륵이 국원國原으로 유배를 왔다”는데 맞느냐는 것이지요. 충주시 승격 60주년과 2017년 전국체전 성공을 기원하는 ‘창작 오페라 우륵’이 2016년 9월 19~20일 충주시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공연되었는데 18일 모 방송 뉴스테스크에 소개된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중원문화체육진흥공단이 주최하고 주관은 우륵오페라단이었는데, 아무리 창작이라지만 사실史實을 왜곡하여서야 말이 됩니까? 나는 우륵의 행적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이 전부라면서 모 교수가 썼다는 그릇된 묘사를 낱낱이 지적했어요. 그 후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이 작품에 대한 재공연이나 언론의 언급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하마터면 악성 우륵이 순장殉葬된 여인을 잊지 못해 가야를 버리고 신라로 와서 진흥왕의 딸 알타 공주에게 가야금을 가르치다가 왕의 분노를 사 충주에 유배된 것으로 왜곡될 뻔 했어요. 그 시대엔 순장제도도 없었던 때예요. 역사학자가 없었다면 이런 허구의 창작물로 역사적인 사실들이 그릇되게 전해질 수 있지요.
충주댐 건설로 수장될 뻔한 숱한 문화재와 유적들을 미리 조사해 자료를 만들고 보존케 한 일들도 이제 와서 보니 보람이 큰 정열의 소산이었습니다.”
● 향토사 연구에 도움이 될 말씀 좀…
“근년에 들어 지역마다 그 고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각 시‧군마다 향토사연구회가 없는 곳이 없어요. 향토사 연구는 태어났거나 자랐거나 살고 있는 지역을 사랑하는 향토애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있는 곳과 이웃과 이웃한 시‧ 군과 도로 이어지면 곧 나라 사랑으로 통하는 것이지요. 이 연구는 기지와 재치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미련스럽게 꾸준한 관심의 결과로 이뤄지지요. 관심이 있으면 자료는 눈에 띄게 됩니다. 향토문화의 범위는 매우 넓고 심대하여 혼자 보다는 관심 있는 여러 사람들의 협력에 의해 정보와 연구가 이뤄지게 됩니다. 계속적인 관심으로 함께 활동하다 보면 지역의 잘못된 지명이나 유래 등도 발견하게 되어 바로 잡는 성취감도 갖게 되지요. 자기 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보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는 시간이 갈수록 절실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지식인들이 지역사랑에 눈을 돌리기를 간절하게 바라지요.”
● 잊혀 지지 않는 분들이 많으시죠?
“충주에서 대학 정년퇴임하고도 충북대-서원대-청주교대 등에 10년 정도를 강의를 다녔어요. 그래서 각 대학의 역사학 관련 학자들과 교우가 계속되었어요. 그러나 충주에서 함께 어울렸던 장기덕(1921~2007)교장‧김예식(1935~2007)회장, 제천 내제문화연구회를 창립한 최병찬, 김학영 교장이나 옥천의 곽정길(1899~1981)교장, 영동의 김동대(1921~2011)선생, 진천의 정상훈(1929~2000), 봉원용(1930~2007)회장, 단양의 김재호 회장 등 향토사 연구의 1세대들을 잊을 수 없어요. 당시 모두가 주머니를 털어가면서 고향사랑의 좌표를 설정했던 분들이지요. 돌아가신 분들께는 명복을, 살아계신 분들께는 강녕하시기를 빌어봅니다.”
● 모임은 하고 계신지요.
“동갑내기 네댓 명이 모이거나, 예성문화연구회 멤버들이 가끔씩 현장답사 가는데 끼워주어서 바람 쐴 겸 다니지요. 2,3개모임이 있어 그런대로 사람 냄새도 맡는 셈입니다. 90이 넘으니 되도록 젊은이들에게 짐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쭈뼛 거리게 되고요. 이제는 수시로 남은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나를 가끔씩 생각합니다. 진천 이월면 노은리에 선산이 있어 제실도 만들고 영면할 자리도 마련돼 있어서 한 시름은 놓았지요. 사는 날 까지 향토사에 애정을 쏟고자 합니다.”
●기사 될 만한 사료 발굴 있으시면 연락 주십시오. 다시 뵐 때도 이번처럼 건강하셨으면 고맙겠습니다.
■ 조철호 시인·동양일보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