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의 아픔 간직한 천주교 평화의 상징
■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 병인박해 때 수십명의 무명신자 운구해 매장 2008년 성지 조성... 순례객들의 필수 코스로
[동양일보 유환권 기자]수려한 경관과 큰 일교차, 청정한 농산물 등으로 유명해 충남의 알프스로도 불리는 청양군 칠갑산 산자락 아래 화성면 농암리 676-1번지 일원.
‘달을 안은 골짜기’라는 예쁜 이름을 줄여 다락골 성지로 알려진 이곳에는 2개의 성지가 있다.
하나는 천주교 박해때 죽임을 당한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묻힌 줄무덤 성지이고, 다른 하나는 김대건 신부와 더불어 최초의 유학 신부이며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1821~1861)의 출생지인 새터성지다.
그중에서도 줄무덤 성지는 한국의 천주교사에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다락골에는 최인주라는 사람이 신해박해(1791)를 피해 정착한 후 복음이 전파되며 교우촌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1866년 흥선대원군 집정 당시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이곳도 피바람 나는 박해를 피해가지 못했다.
당시 홍주와 공주 감영에서 처형당한 사람들과 무명 신자들이 줄줄이 붙잡혀 와 죽임을 당하거나 땅에 묻혔다.
한 봉분 속에 황급히 줄을 지어 가족끼리 시신을 묻기도 했다. 그렇게 줄지어 묻혔다 해서 만들어진 이름 줄무덤.
거친 포졸들에 의해 속절없이 끌려가는 부모를 본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자 엄마가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간다"고 달래며 함께 순교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 다락골 줄무덤이다.
마을 뒷산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는 줄무덤은 다락골 성지의 상징이다.
줄무덤은 산 기슭의 위치에 따라 1, 2, 3의 장소로 나뉘어 있다.
1줄무덤은 초기에 17기가 매장돼 있었으나 파묘와 유실 등의 이유로 현재 14기가 있다.
2줄무덤은 1줄무덤 서남쪽으로 밑으로 20m 쯤 떨어진 지점에 10기의 봉분이 있다.
3줄무덤은 1줄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에 13기가 있어 줄무덤에는 총 37기가 안장돼 있다.
당시에는 천주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마을 사람들, 신자들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끌려온 사람들, 애꿎은 누명을 쓰거나 그들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함께 잡혀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공주에도 황새바위 성지가 있는데 공주 감영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뒤 가족들이 그 시체를 심야에 이곳 다락골로 옮겨와 묻었다.
줄무덤 주변으로 10여채의 민가가 있던 흔적이 발견 되는데 천주교 탄압때 마을 전체가 화를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해가 두려워 천주교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던 중 관아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마을을 불살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곳을 성지로 꾸미려고 노력한 때는 2003년 대전교구에 의해서다.
대전교구와 청양성당에서 줄무덤을 조사해 처음으로 14기가 순교자의 무덤인 것을 밝혀냈다.
1982년 무명 순교자비를 건립하는 등 노력을 이어오다 대전교구 설립 60주년을 기념하는 2008년 11월 9일 최경환 성인 일가 등의 선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한 기념성당을 다락골 성지에 건립하면서 성지조성의 결실을 맺었다.
다락골 무명 순교자의 십자가 상에서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부활의 희망을 잃지 않는 순교자의 미소가 보이는 듯 하다.
모진 박해와 고난을 감수하며 성인의 뜻을 이 땅에 비추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그들의 거룩한 삶과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지금은 순례객들의 필수 코스로 이름나 있다.
성지는 깊은 산자락 안에서 오늘도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롭다. 청양 유환권 기자 youyou9999@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