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성 갖춘 우리 무용, 세계 통한다”… 한국 미의식에 확신

② 무용가 송범… 생애와 예술(1926. 1. 30. ~ 2007. 6. 15.)

2023-10-12     동양일보
발레-검은 태양.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누이집에 숨어 강제납북 면해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곳에서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데올로기로 갈등을 겪던 예술인들은 적으로 돌아섰다. 형 송정훈은 공산당이 지목, 수배하는 명단에 들어 즉각 피난을 가고, 송범은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에 남았다. 오직 무용에만 열정을 쏟고 살던 24세 청년 송범에겐 이념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6월 28일 아침, 검은 세단차가 와서 송범을 태워갔다. 붙들려 간 곳은 국립도서관(옛 서울시청 건너편)의 지하실이었다. 그들은 형의 행방을 물었다. 반동을 감춘 죄가 얼마나 큰지 아느냐고 공갈이 심했다. 며칠 만에 풀려난 뒤 인민군이 지휘하는 국립극장 소속이 되었다. 송범은 극장에 나가지 않고 숨었는데, 무용이 너무 하고 싶어서 틈만 나면 몰래 옥상에서도 하고 지하실에서도 연습을 하였다. 그 무렵 이북 무용단이 인민군을 위로하기 위해 서울 시공관에 와서 공연을 했는데, 그곳서 최승희의 딸 안승희와, 최승희의 제자면서 동서인 김백봉을 처음 만났다. 송범은 형 때문에 겁이 나서 귀중한 물건이나 프로그램, 사진 등을 남산에 있는 아는 집에 맡겨놨는데, 그 집이 폭격을 당하는 바람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무용 별의 전설(1973년),

 

전쟁 중에 예술계의 많은 사람들이 월북 또는 납북되었다. 무용계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최승희를 비롯한 장추화, 정인방, 한동인, 함귀봉 등 많은 무용가들이 월북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인민군은 후퇴하면서 예술인들을 명동성당으로 모이라고 해서 모두 끌고 갔는데, 송범은 누이 집에 숨어서 강제납북을 면할 수 있었다.

9.28 수복 후 송범은 육군본부 문화공작대로 편입돼 11월 시공관(부민관)에서 시민위안공연을 했다. 이때 발표한 ‘수련몽’이다. 덕수궁 연못에서 보았던 연꽃을 보며, 전쟁 속에서 평화를 꿈꾸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1951년 1.4후퇴가 시작되었다. 이때 북한에 있던 김백봉, 한순옥, 권려성 등이 국군을 따라 남하하는데 한국무용계로선 큰 도움이었다. 송범을 비롯한 20여명의 젊은 무용가들은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무용대로 ‘한국무용단’이라는 단체를 꾸려 함께 대구로 피난을 간다. 이때 송범은 무용복을 모두 싸들고 내려갔는데 피난지에서 이 옷들이 얼마나 요긴하게 활용될지는 자신도 미처 몰랐다. 이들은 대구에서 합숙을 하며 연습을 하고 군부대의 지원을 받아 대구, 부산, 마산, 진주를 돌며 공연을 했다. 1952년 5월에는 대구문화극장에서 ‘송범무용10주년공연’을 열었다. ‘양자강’, ‘뱀의 생리학’, ‘인도적인 5월’, ‘아리랑 환상곡’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이때 그가 가지고 간 무용복이 빛을 발했다.

 

송범의 춤.

 

피난지서 무용발표...맥 이어

송범은 대구 피난지에서도 춤을 배웠다. 박지홍 노인이 어린 기생들에게 승무를 가르쳤는데, 송범은 어린 기생들이 배우고 나면 뒤에서 배웠다. 1년 걸리는 승무를 6개월에 마스터했다. 이렇게 배운 승무는 ‘참회’(1951년)와 ‘명상에의 동의’(1954)에서 작품으로 나타났다. 그는 또 전라도에서 농악을 잘하는 노인을 모셔와 김문숙과 농악을 배우기도 하였다. 송범은 춤을 배우는데 있어서 누구보다 겸손하였다. 나이나 후배나 가리지 않고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바로 배웠다. 송범은 말한다. “나를 보고 천재라고 하지만, 나는 천재가 아니었다. 그날 배운 것을 그날 돌아가서 죽어라고 연습을 했으니 잘 할수 밖에 없었던 것 뿐”이라고.

1953년 10월, 전쟁이 끝나고 송범은 조금 늦게 서울로 돌아왔다. 대구에서 문을 연 연구소에서 그에게 춤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공연도 여러 차례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서울은 폐허 같았다. 1세대 무용가들이 떠난 텅빈 도시였다. 송범은 무용계를 떠맡아야할 운명같은 것을 느낀다. 그는 그해 11월 11일 ‘항거’, ‘수평선을 밟으며’ 등 16편의 작품으로 ‘제1회 송범 신작무용발표회’를 개최하면서 서울에서의 활동을 재개했다. 주로 피난지에서 만들었던 작품들을 새롭게 꾸민 무대였다. 그 후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발표회를 여는 등 열정적으로 창작에 매달렸다. 1955년 코리아발레단을 만들고, 1956년에는 임성남, 김백봉 등과 함께 한국무용가협회를 결성한다. 코리아발레단은 1956년 5월 시공관에서 ‘송범무용발표회’를 열어 ‘패배자’ ‘환영의 사람’ ‘북이 울리면’ 등을 공연하였다. ‘패배자’는 모던발레의 수법으로 만든 국내 최초의 시도였다. 11월에는 새로 결성한 한국무용가협회의 작품발표회를 안제승의 연출로 공연하였다.

송범무용연구소도 열었다. 송범의 무용연구소는 잘 될 때는 연구생 1백명이 넘었다. 그러나 지도비를 저렴하게 받아서 경제사정은 늘 어려웠다. 너무 자주 무대에 작품을 올리다보니 공연때마다 적자였는데, 매번 형이 다 갚아 주었다. 형은 아버지처럼 송범을 관대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적자가 나면 ‘이제 공연을 하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하지만, 두 달도 못가서 다시 무대를 찾았다. 6·25전쟁으로 인한 공백기를 송범은 이렇게 무용에 대한 애착과 집념으로, 마치 개척자처럼 밭을 일궈 한국무용계를 재건했다.

 

지도자 송범.

 

결혼식 올리자마자 연습장으로

송범은 청소년 시절에 연애를 해 본적이 없었다. 술 담배도 할 줄 몰랐다. 멋 부릴 줄도 몰랐다. 양복이나 구두 대신 반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그저 무용연습만 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광목버선을 지어주었다. 전쟁 후 서울에 올라오니 어머니가 결혼을 독촉했다. 어머니가 다니는 절에서 중매를 서 사람을 소개했다. 황해도 출신의 22살 된 김옥희였다. 첫인상이 수수하고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가 결혼 날짜를 받아왔는데, 하필 공연 이틀 전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없이 곧바로 연습장으로 달려갔다.

아내는 송범을 극진히 위해 주었다. 자식들을 열심히 키웠고 남편도 존경했다. 송범도 평생 부인을 사랑했다. 부인은 무용하는 남편과 오래 살다보니 평론가 못지않은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송범의 작품으로 보고 때때로 평을 해주었다. 부부간의 정은 좋았지만 첫 아이와 둘째 아이를 잃고 셋째로 태어나 살아남은 아들이 ‘윤상’이다. 윤상 밑으로 딸 ‘윤호’를 두었다. 그에겐 아이들이 있는 것이 기적 같았다. 그는 아이들을 너무 사랑해서 동네에서 나팔꽃을 구경할 수 없을 정도로 꽃을 따서 아이들에게 주었다. 딸은 이화여대무용과에 입학했는데, 송범은 딸에게 창의력이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무용을 그만두게 시켰다. 그는 가정을 이루고 나서야 집에서 단란하게 모여 식사하는 소소한 것들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알았다.

그러나 편안하게 행복을 누리려 하지 않았다. 너무 행복하면 안이해져서 예술을 하지 못할까 봐서였다.

 

청년시절 송범.

 

한국 전통무용에 관심가져

송범이 1950년대를 보내면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한국 전통무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한국무용을 해야겠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다시 발레로 옮겨가며 몸에 익혀진 모든 기능이 앞으로 한국무용을 하는데 이용되어야 하겠다는 아주 구체적인 의식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 -송범 회고록 ‘춤은 나의 종교, 나의 전부’ 중에서.

그는 한국인의 정서와 체질에 맞는 ‘우리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가 ‘우리 것’이라고 생각한 무용은 우크라이나춤이나 스페인춤처럼 품격을 갖춘, 우리 고유의 춤이면서도 창작성이 있는 신무용이었다. 세계와 경쟁하려면 예술성을 갖춘 우리 무용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춤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뚜렷한 명분이 생겼다. 바로 멕시코올림픽 공연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송범은 화관무, 검무, 부채춤, 무당춤, 농악무 등 민족적 정서가 녹아있는 한국춤을 쏟아 놓았는데, 외국언론들이 놀라울 정도로 찬사를 보냈다. 그는 한국의 미의식과 우수성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우리 고유의 민속춤에 빠졌는지는 그가 남긴 회고록이 말해준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셨을 때 상여가 나가는 날이 섣달 노을이 넘어갈 때였는데-상여소리가 구슬프고, 아낙네들이 뒤에 따르고-. 나는 그 상여 뒤를 따라 걸으면서 슬픔보다도, ‘아 이 정경이야말로 하나의 작품이구나...’하는 것을 느꼈다.”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