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스토리에 현대적 안무… ‘한국무용=송범춤’ 등식 생겨

③ 무용가 송범… 생애와 예술(1926. 1. 30. ~ 2007. 6. 15.)

2023-10-16     동양일보
국립무용단 창단 50년을 맞아 해오름극장에 송범 흉상을 제막했다.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국립무용단장으로 무용극 초석

60년대 송범은 다양한 창작춤에 매달리며 질풍노도와 같은 시간을 보낸다. 무용계는 전쟁의 후유증을 이기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62년 2월 우리나라 최초로 국립극장이 창단되었다. 국립극장 전속단체로 국립창극단, 국립오페라단과 함께 무용단도 출범했다. 국립무용단 단원으로는 발레에 임성남, 송범, 진수방, 주리, 이인범, 한국무용부문에 김백봉, 김문숙, 전려성, 조용자, 정인방, 강선영, 김진걸, 이월영 등 모두 13명이었다. 당시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이었던 송범은 부단장을 맡고, 초대단장은 임성남이 맡았다.

국립극장은 우리나라 공연예술사에서 주축이 된다. 무용공연을 중심으로 국립극장 활동을 시기별로 나누면 ‘전쟁전기-전쟁기-명동시공관기-명동기-그리고 남산기(장충동)’로 구분이 가능하다.

전쟁전기에는 태평로에 있던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당)에서 주로 공연이 이루어졌고, 전쟁기는 피난지였던 대구의 문화극장(현 쇼핑몰)을 이용했다. 전쟁이 끝난 후는 명동 시공관(시공관은 1935년 개관된 영화관 명칭)을 주로 이용하다가, 1962년 명동의 시공관이 독자적인 국립극장이 되면서 장충동에 새 건물을 마련할 때까지 10년간 공연의 중심공간이 된다.

난가꾸기.

 

국립극장이 남산의 장충동으로 옮기던 1973년, 무용단은 한국무용을 중심으로 하는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으로 나뉘게 된다. 발레단은 임성남이 맡고, 송범은 국립무용단장을 맡았다. 국립무용단이 공식적으로 직업무용단이 된 것은 이때부터다. 송범은 첫 단원으로 30명을 뽑았는데 춤의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남자단원이 없었다. 국립가무단에서 소질이 있어 보이는 남자들을 모두 끌어들였다. 그런데 미처 단원들을 훈련시키기도 전에 공연날짜가 잡혔다. 그는 당황했지만, ‘해야 한다’는 의지와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전심전력했다.

첫 작품으로 무용극 ‘별의 전설’을 올렸다. 송범은 피난지인 대구에서 무용극을 시작했다. 해군과 공군의 군악대 지원을 얻어 ‘불의 희생’을 올렸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부산에서는 성두영이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아 1일 5회 공연을 하였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피난민들은 그의 무용극을 보고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송범은 뒷날 자신의 레퍼토리가 되는 무용극 ‘사사의 춤’도 이때 만든다.

4인4색 나흘간의 춤이야기.

 

우리나라 무용극의 첫 시작은 송범 이전에 조택원으로부터 발아됐다고 볼 수 있다. 이시이바쿠로부터 발레를 배운 조택원은 현대무용과 발레의 방식으로 초기 무용극 형식을 취한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무용극은 아니었고 무용에 스토리를 입힌 정도였다. 본격적인 대규모 무용극은 역시 송범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송범은 수준높은 무용극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마침 국립극장의 무용단장으로서 그가 날개를 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장충동시대의 개막은 송범이 무용극에 대한 새로운 개안과 변신의 노력이 함께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송범식 무용극, 또는 국립무용단식 무용극으로 지칭되는 그의 독특한 춤스타일이 구축됐다.

 

춤.

 

줄거리 중심 극적 요소 대입… ‘전통 재창조’ 방식

1980년대 이후 송범의 무용인생 완숙기에 창작된 ‘도미부인’ ‘은하수’ ‘그 하늘 북소리’는 우리나라 무용극의 3대작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명작들이다. 신화와 전설, 전통과 민속 속에 녹아있는 소재들을 바탕으로 창작된 무용극은 한국춤을 세계무대에 알리는 홍보사절로서도 큰 역할을 했다.

그 가운데 차범석 대본에 의해 만들어진 ‘도미부인’은 1984년 초연한 이래 8년 동안 160여회의 공연을 가질 만큼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국립무용단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영국의 브리태니커 사전에도 올랐다. ‘도미부인’은 삼국시대 백제의 도미의 처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현대적으로 안무한 작품이다. 그는 무용극을 창작할 때 줄거리를 중심으로 극적 요소를 대입하는 형식으로 짠다. 일종의 전통의 재창조 방식이었다. 관객들로부터 공감을 얻는 그의 치밀한 스토리에 맞는 안무때문이다.

그는 30년 동안 국립무용단장을 맡으면서 무려 29차례나 해외공연을 했다. 그 많은 공연을 하는 중 한 번도 지치지 않았다. 그의 정열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송범의 삶-. 그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서민생활을 했다. 과장과 겉치레를 싫어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으로 무용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그에겐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실함이 몸에 배 있었다. 평소엔 따뜻하지만 그러나 일단 연습실에 들어오면 눈빛이 달라진다. 송범의 연습은 찬바람이 일 정도로 엄격했고 ‘스파르타’식이었다. 심할 때는 욕도 썼다.

단원들은 “선생님은 항상 우리가 오기 전에 출근을 해서 그날 연습할 것을 미리 준비했다”며, “단원들 앞에서 조그만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렇게 국립무용단장 30년을 지냈다. 그 세월동안 “한국무용은 곧 송범춤”이라는 등식을 만들 정도로 그는 무용계의 왕좌자리를 굳혔다.

그는 또 대학의 무용과 발전을 위해서도 큰 몫을 했다. 1972년 그는 중앙대학교 무용과 교수가 되었다. 무용교수가 된 후 무용협회와 무용교수들과 협력하여 문교부에 건의문을 제출해 체육대학이나 체육과에서 무용과를 분리하는 역할을 해냈다.

송범에 대해 춤평론가 조동화는 “그는 모든 것을 양보하나 무용에 관한 한 욕심쟁이였고, 양보가 없었다. 송범, 이 한사람의 춤경력은 곧 우리무용 현대사다”라고 말했다. 또 춤평론가 김상화는 “송범무용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했고, 송범과 동료교수였던 정병호 중앙대 명예교수는 “송범이 명실공히 ‘한국무용계의 대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라 할 수 있다.”고 했고, 평론가 성기숙은 “송범의 미학적 성취는 한마디로 무용극으로 귀결된다”며, “선구자적 예지와 한국적 무용극의 전형화의 업적”이라고 했다. 송범의 춤예술 60년 <나의 춤, 나의 길>을 기획한 춤평론가 김태원은 “송범은 우리 무용사에 크고 굵은 획을 긋는 거목”이라고 정리했다.



수많은 무용인 길러낸 거목

송범은 1992년 국립무용단장직을 내려놓았다. 그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그와 춤을 추었고, 그에게 배웠고, 그의 안무에 의해 무대에 섰다. 국립극장, 학교, 연구소에서 참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재만, 국수호, 황창호, 이윤철 등 한국을 대표하는 남성무용가들도 길러냈고, 양성옥, 손병우, 김향금, 이문옥, 박정목, 장용일, 이미미, 윤성주, 이지영, 최정임, 홍형경, 홍금산, 이화숙, 양승미 등 국립무용단의 중추 멤버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나는 내가 가르친 사람을 모두 제자라고 하고 싶지 않다. 내가 10년 이상 가르친 사람이 아니면 그런 말을 쓰기가 싫다. 그런데 요즘 보면 돈 받고 작품 하나 가르치고도 그 사람은 내 제자라고들 하는데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라고 말한다. 송범의 평소 생각을 알 수 있기도 하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는 어떤 것인지 정리를 해준 듯해 명쾌하다.

송범은 국립무용단장을 내려놓고도 여전히 바쁘게 지냈다. 국립무용단 시절 그의 지도를 받던 이들이 모인 ‘범무회(范舞會)’에 나가 지도도 하고, 한국무용 지도자 강습회, 벽사춤보존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중앙대(특임교수) 등 1주일에 5회 정도 무용연습장을 다니면서 후학들을 위해 혼신의 열정으로 지도하였다.

1996년 11월26일. 송범은 무대에서 마지막 춤을 추었다. 수석제자 국수호가 안무한 ‘무어랑(오셀로 각색)’에서 테스데모나의 부친 역으로 출연한 것이다. 그리고 2004년 4월에는 ‘4인4색, 나흘간의 춤이야기’에서 송범은 조흥동, 최현, 국수호와 각각 안무를 했다. 이 공연은 4,320명의 관객이 입장했고, 그중 3,454 명이 유료관객으로 입장한 대기록을 세운 공연이었다. 말년에 송범은 난(蘭)을 키웠다. 용돈이 생길 때마다 한 분씩 사들인 것이 꽤 돼서 가족들이 함께 보듬었다. 그래서 송범은 난을 ‘부부화합의 꽃’이라고 불렀다.

2006년 5월, 송범은 이화여대 무용과가 마련한 공개강좌에서 교수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 무용계의 장래에 대하여 강연을 했다. 그것이 공개석상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 가족과 지내기 위해 캐나다로 이주한 송범은 2007년 6월15일 토론토에서 8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012년 국립무용단은 창단 50년을 맞아 해오름극장 2층 로비에 초대단장이었던 송범의 흉상을 제막하였다.



 

청주대 예술관에서 열린 송범추모공연 ‘도미부인’.

 

송범 연보



1926. 1. 30. 청주시 영운동에서 아버지 송내현과 어머니 윤복의 2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남(음력 1925.12.17) 본명은 송철교(宋喆敎)

1942. 최승희 공연 보고 무용 결심

1945. 양정중학교(5년제) 졸업

이후 조택원 연구소, 박용호 무용연구소, 장추화 무용연구소를 다님

1948. 장추화 발표회때 첫데뷔작 <습작>발표

1950. 정훈국 소속 공연단

1951. 전쟁시 한국무용단 합류(조동화, 송범, 정막, 김문숙 등)

1952. 대구 부산 등지에서 <불의 희생> 공연. 대구에서 ‘송범무용연구소’개설

1953. 서울로 환도, 1회 신작발표회(11.11)

1955. 코리아발레단 조직

1956. 한국무용가협회 결성

<비련> 송범, 임성남, 김백봉 3인공동 안무(시공관)

1961.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62. 국립무용단 창단 부단장 취임

1968. 멕시코올림픽 한국민속예술단참가

서울시문화상 수상

1972.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뮌헨올림픽 한국민속예술단 총연출

세계 각국 순회공연

대통령상 표창

1973. 국립무용단 단장취임(국립발레단과 분리)

<별의 전설>초연, 국민훈장 동백장

1974. <왕자 호동> 최리왕역 출연

<사의승무>초연

1976. <사의승무>로 50세까지 춤꾼으로 출연

미국 독립200주년 기념공연

1979. 대한민국무용제 운영위원

1980. 유럽순회공연 안무

1982. 무용공로상 수상

1983.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4.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도미부인>

1992. 국립무용단장 퇴임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1996. 국수호 안무 <무어랑> 특별출연

2007.6.15. 캐나다 토론토에서 타계

2007. 금관문화훈장 수상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