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운포’서 ‘운보’로 화명 바꿔… 과감한 화풍 변화 시도

② 화가 김기창… 생애와 예술(1913. 2. 18. ~ 2001. 1. 23.)

2023-11-30     동양일보
운보와 우향의 결혼식.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시 찾은 보물'

 

[동양일보]어머니 사망후 부스박사의 후원



김기창은 자신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세 여인이 있다고 말했다.

세 여인은 외할머니 이정진과 어머니 한윤명 그리고 부인 박래현이었다. 외할머니는 자신을 보육했고, 어머니는 장애가 있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미술의 길로 이끌어주었으며, 박래현은 아내이자 평생 같은 길을 걷는 화가로서 그림에 영감을 준 사람이다.

그런데 김기창이 두 번째 선전에 입선하던 해인 1932년 10월15일 어머니가 동생을 출산한 후 부황과 심장마비 등이 겹쳐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김기창은 극심한 충격과 시름에 빠졌다. 그에겐 어린 동생들이 있었다.

운보(서울미술관).

 

경제적 가장이었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당장 생활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스승인 이당 김은호는 김기창의 그림을 팔 수 있도록 주선해 주고, 세브란스 병원의 부스 박사 역시 외국인들에게 김기창의 그림을 팔아 주면서 도움을 주었다. 부스 박사는 그해 여름 해당화가 만발한 명사십리 별장에서 소품전도 열게 해주었다. 슬픔 속에서도 소품전은 김기창에게 용기를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석왕사·금강산에 들러 스케치를 하는 시간도 가졌다. 부스 박사는 김기창에게 풍속도를 그려보라고 했다. 김기창이 풍속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때의 부스 박사의 조언 덕이다. 부스 박사는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김기창의 절대적인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정청’(1957) 이소제와 동생 김기옥.

 

연속 특·입선으로 27살에 선전 추천작가



김기창은 오로지 그림에만 매달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파는 일 뿐이었다. 1933년 ‘여(女)’가 제12회 선전에 입선되었다. 두 여인이 함께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한 여인은 만돌린을 들고 있었다. 이 그림은 세브란스 병원 대합실에서 스케치한 것으로 한 여인은 김기창의 외숙모로 1977년 2월에 71세로 청주에서 별세했고, 또 한 여인은 김기창이 좋아했던 이소제라는 여인이었다. 이소제는 김기창네 집에 세들어 살던 모녀의 딸로 둘은 서로 좋아했으나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김기창은 제13회 선전에도 입선해 연 4회째 입선을 한다. 이 작품은 ‘정청(靜聽)’으로 역시 이소제와 북한에서 의사로 있는 김기창의 막내 여동생 김기옥의 어린 시절이었다. 이 해에 운보는 ‘전복도’도 그렸는데 이 그림은 1993년 운보의 집에서 15점의 그림 도난 사건이 생겼을 때 같이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작업실에서 운보와 우향.

 

김기창은 은사인 이당 김은호가 가입해 있던 서화협회전에도 ‘장기’와 ‘모란도’를 출품해 제13회 서화협회전에서도 입선을 한다. 1935년, 제14회 선전에서는 ‘엽귀’와 ‘금운(琴韻)’을 출품해 동시에 2점이 입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 출품했던 ‘엽귀’는 낫을 든 어린 소년과 잠자는 갓난아이를 업은 여인이 들에서 밥을 머리에 이고 귀가하는 모습을 옥수수 밭을 배경으로 그린 수작이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20대가 되면서 김기창은 차근차근 화가로의 길을 걸어갔다. 은사인 이당 김은호가 정회원으로 있던 서화협회전에도 정회원으로 입회하여 제14회전에 ‘금(琴)’ ‘추일(秋日)’ ‘석류’를 출품했고, ‘소와 소년’도 제작했다. 22살이 되던 이 해에 김기창은 장운봉과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2인 조선화전>을 개최했다. 당시 그의 그림의 주 소재는 풍속화였다.

1936년, 민족화단의 상징인 서화협회전이 제15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서화협회는 1918년 안중식, 조석진, 오세창, 고희동 등이 창립한 단체로 근대적인 종합미술전인 서화협회전을 매년 열어왔으나 1922년 조선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선전)가 창설됨으로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가 마침내 해체가 된 것이다. 김기창은 마지막 서화협회전인 제15회 전시에 작품을 출품하고, 제15회 선전에도 ‘해녀(海女)’를 출품해 연속 6회째 입선을 한다.

‘해녀’는 200호 크기로, 목포에서 해녀들을 만나 스케치했고, 파도는 이당의 화숙 동문 안명준의 안내로 흥남에서 스케치한 것을 조합하여 완성했다. 이 해에 김기창은 안국교회 김우현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김은호가 허백련, 김복진과 함께 미술학도들을 기르기 위해 전문미술교육기관으로 발족한 <조선미술원> 개설에도 참여했다.

김기창은 흥남에 갔을 때 머물던 흙방을 스케치해 두었다가 ‘고담(古談)’이란 작품을 그렸는데 제16회 선전(1937년)에 이 작품과 ‘농가의 일우(一隅)’를 출품해, ‘농가의 일우’는 입선, ‘고담’이 특선 겸 창덕궁상을 받게 돼 최고 영예를 안게 된다. 이로써 운보는 연속 6년간의 입선을 거쳐 특선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각 신문들이 장애의 역경을 딛고 화가로 우뚝 선 김기창을 대서특필했다. 김기창은 1931년부터 1940년까지 6회 입선, 특선 4회를 기록해 27살에 선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성북동집에서 가족사진(운보전작도록)

 

우향 박래현과 만나 필담으로 연애



김기창은 1938년 도쿄로 가서 선전 심사위원이었던 화가들을 만나 사사를 하고 이후 자주 일본으로 건너가 문물을 익히고 견문을 넓혔다. 그러나 일제 막바지인 1942년에서 1944년까지 이당 김은호를 따라서 친일활동을 한다. 일제 말 친일 미술전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고, 1943년 8월 6일자 <매일신보>에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라는 삽화를 게재했고,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지에 ‘총후병사’라는 훈련병을 그린 그림을 실었다. 이 두 그림은 김기창의 대표적인 친일그림이다.

김기창은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와 ‘총후병사’에 대해 “정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삽화에 불과해 친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면서 친일행위를 부정하였지만 말년에 사죄를 하였다. 1993년 7월, 운보 김기창의 아들 김완은 충북도청 기자실을 찾아 『아버지는 일제 말기 친일을 한 사실이 있으며, 민족과 역사 앞에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아버지의 회개의 뜻을 전했다.

일제강점기 김기창에겐 새로운 인연도 있었다.

1943년 김기창은 운명적인 여인 박래현과 만나게 된다. 진남포 출신으로 일본 동경여자미술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래현은 1943년 선전에서 ‘단장’이 특선으로 총독상을 타게 돼 시상식에 참석하고자 서울엘 왔다가 학교 선배 안희숙과 운니동에 있는 김기창의 집을 찾은 것이다. 당시 김기창은 이미 유명한 화가였다. 두 사람은 첫 만남이후 필담으로 연애를 시작했한다.

 

군마도(국립현대미술관소장).

 

운보-우향 ‘한국 최초로 부부전’



1945년 해방이 되자 김기창은 어머니가 지어준 화명 ‘운포(雲圃)’에서 ‘구(口)’를 벗겨 버리고, ‘운보(雲甫)’로 바꾼다. 구속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굴레를 벗음으로써 자신의 예술관·인생관을 새롭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운보 김기창은 회화 역시 격식과 법도에 얽매인 화풍으로부터 일탈해야 된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박래현을 찾아가 청혼을 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우향은 때마침 미국으로 유학준비중이었다. 그러나 간절한 김기창의 청혼으로 유학을 포기했다. 박래현의 어머니는 두 사람의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울 중구 예장동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관장이던 송석하의 주례로 신식과 구식이 어우러진 결혼식으로 치렀으며, 운보는 친구 이강수에게, 우향은 이모에게 병풍 한 벌씩을 주고 결혼 비용을 마련했다. 우향의 어머니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려, 아버지는 병으로 우향의 부모 모두가 결혼식에 불참했다.

그러나 운보와 우향은 화가부부로서 꿈에 부풀었다. 그들은 한국 최초로 부부전을 열기로 약속했다. 결혼 후 운보는 자유신문사 편집부에 기자로 취직하여 2년여 동안 문화부 기사를 쓰거나 삽화를 그리는 활동을 하다가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침내 삼월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한국 최초의 부부전인 <운보-우향부부전>을 개최했다. 부부전은 두 사람의 각기 다른 개성적 표현으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