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칼럼/ 약속

최은묵 시인

2024-01-24     동양일보
최은묵 시인

[동양일보]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린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 짧은 시간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한다. 누군가는 눈에 보이는 행동을 하고, 누군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을 한다. 거리는 여전히 멈춤과 움직임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시간의 흐름이라고 부른다.

삶의 숱한 흐름에서 중요한 것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약속이다. 시내버스가 제시간에 정류장에 도착하는 일이나, 은행과 행정복지센터의 업무시간처럼 사회적 약속부터, 지인과의 식사 또는 소소한 모임처럼 개인적인 약속까지 시간은 무수한 약속들로 채워지고 있다.

신호등이 정해진 순서에 의해 일정한 간격으로 바뀌길 반복한다. 각자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본다. 전화를 걸고,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과 밖으로 나오는 사람, 그리고 또 횡단보도에는 아까와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행동으로 무언가를 한다.

약속(約束)의 사전적 해석은 다른 사람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약속이 꼭 타자와의 관계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다짐을 하고 더 나은 삶의 방향을 계획한다. 목표를 세우거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순간 ‘나’는 저절로 발화한다. 톱니바퀴처럼 물려 돌아가는 관계 속에서 하나의 톱니바퀴로 살아가는 동안 나 자신과의 약속은 분명 소중한 가치임이 틀림없다.

나 자신 또는 타인의 시간을 공유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제 피로서 약속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하자”고 말한 송찬호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약속이란 꼭 지킬 수 있는, 꼭 지켜야 하는 일에 마음을 내어놓아야 한다. 노쇼(No show)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까닭도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시간적 물질적 피해가 생긴 까닭이다. 그러므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공동체에서 하나의 톱니가 노쇼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정함에 있어 숙고가 필요하다.

2024년 봄에는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허언(虛言)과 공약(空約)에 지친 국민에게 ‘약속’의 무게를 진중하게 실행하는 사람이 지역의 대표가 되었으면 한다. 이런 바람은 지역민의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팔정도(八正道)에 보면 정어(正語)가 아닌 말로,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說)이 있다. 부디 이번에는 후보자들이 또 당선자들이 정어가 아닌 말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지 않고 실천하는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길 부탁한다.

신호등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규칙적으로 순환하는 중이다.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까닭은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만약 신호등이 엉망으로 켜진다면, 세상은 이 작은 현상 하나만으로도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약속의 근본은 신뢰다. 이런 규칙이 세상을 균형 있게 움직이는 상식이다.

결국 약속이란 사람과 사람의 예의다. 예의는 사람을 배려하는 내면에서 흐르는 몸짓이다. 제도와 규범의 경도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교류에서 파생된 현상이야말로 인간관계의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하지만 규칙으로 지켜야 할 약속과 예로써 지켜야 할 약속을 애써 구분 지을 필요는 없다. 약속의 구분이 무엇이든 타인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먼저 행동하는 모습을 보일 때 상호 간의 신뢰는 저절로 단단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모든 약속이 조급함이 아니라 여유로움이길 바란다. 무슨 날이 아니어도 고향 부모님을 찾아뵙고, 애경사가 아니더라도 지인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계획하지 않은 여행도 떠나고, 횡단보도가 없는 눈 쌓인 들판을 걸어보기로 하자. 어쩌면 이런 소소한 일들이 오래전에 나 자신에게 했던 약속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