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세이/ 쓸쓸한 문안

김애자 수필가

2024-06-06     동양일보
 
김애자 수필가

[동양일보]사르트르는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간다”고 했다. 신경림 시인을 생각하면 사르트르가 한 말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분은 스스로 시인의 길을 선택하고 평생을 시인답게 살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시대의 풍파를 온몸으로 겪었으나 비굴하지 않았고, 배웠으나 세속적인 허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가난하였으나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이들과 한통속으로 섞여 고단한 삶의 여독을 시로 풀어냈다. 지금도 내 귓가엔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이발소 앞에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던” 시 ‘파장’ 속에 등장하는 사내들의 걸쭉한 농담이 들려오는 듯싶다.

시인을 처음 뵌 것은 2002년 5월 ‘목계장터’ 시비를 세우던 날이다. 그날 시비는 충주시에서 따로 예산을 세워 남한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목계나루 둔덕에 세웠다. 시비에 새긴 글씨는 판화가 이철수 선생이 맡아 썼다. 시의 내용과 글씨가 그토록 잘 어울리는 시비는 지금껏 보지 못했다. 1980년대 민주화 시위 현장에는 의례 이철수 선생의 판화가 걸려 있었던 것으로 보면 민중시인의 시비에 이철수 선생의 글씨는 필연이지 싶었다.

그날 시비 제막식에 오신 선생께선 무척이나 흡족해하셨다. 목계나루는 일찍이 뗏목을 이용하여 물물교환의 메카로 알려진 곳이요, 당신 시 ‘남한강’의 발원지이기도 한 곳에 시비를 세웠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으시겠는가. 게다가 점심은 시비 옆, 지붕이 낮은 허름한 강변횟집에서 내빈과 주민들이 함께 어울려 먹었다. 목계천에서 건져 올린 다슬기에 부추와 아욱을 듬뿍 넣어 끓인 토장국이었으니 시와 음식마저 구색을 제대로 갖춘 셈이다.

선생께선 평생 시를 찾아 떠도는 노마드였다. 스스로 자신을 유랑의 길에 방목시키고 자신이 견뎌내야 하는 삶의 풍파를 징표로 삼았다. 나는 지금도 선생의 연작시 ‘남한강’을 읽으면 그 시를 이루고 있는 역사성과, 가난의 밑바닥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지린내 질펀한 재래시장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장삼이사들의 구구한 사연과, 그런 소읍을 끼고서 해질 녘이면 조용히 내리는 적적한 어둠과, 그 어둠살을 끼고 이내처럼 깔리는 쓸쓸한 시의 情操를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시로 옮긴 기지에 감동한다.

선생께선 ‘남한강’ 연작시를 쓰기 위해 남한강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발로 걷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채록한 시다. 그것도 지극히 평범한 언어로 썼으며, 문장 어디에도 힘이 들어 있지 않을뿐더러 철학적 분위기도 끼워 넣지 않았다. 선생의 시 선집에 해설을 달은 이병훈 선생은 “최고의 재능은 자연스러움”이라고 했다. 그분의 말대로 이분의 ‘시적미학’을 구태여 꼽으라면 ‘자연스러움’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자연스러움’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자연스러움’이란 형용사를 입에 담지 못한다.

선생께선 숨을 내려놓고서야 고향 선산으로 돌아오셨다. 장례를 치르던 날, 고인의 시를 써 만든 만장 50개를 든 행렬은 5월의 산하를 들썩이며 빛났다. 하지만 선생께선 이를 보고 혀를 끌끌 찼을지도 모른다. 평소 남의 신세 지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던 분인지라 가족장으로 조촐하게 치를 것을 자손들에게 당부했다지만, 태어남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었듯 사후의 일 또한 자신의 뜻대로 되어 지지 않는 게 사람살이다.

오늘 선생의 묘소에 찾아가 술 한 잔 올렸다. 세 번째 문안이다. 첫날은 삼우제여서 찾아왔었고, 두 번째는 묘소에 놓인 꽃바구니와 화환에 꽂힌 꽃들이 시들어 널브러진 꼴이 보기 흉해 그걸 거두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세 번째 발걸음은 어제 밤늦도록 다시 읽은 대서사시 ‘남한강’ 여운에 이끌려서다. 검은 대리석에 새겨진 선생님 존함을 가만히 손으로 어루만지며 여쭤보았다. 반세기 만에 아내 곁으로 누우신 감회가 어떠하시냐고?, 저승에서도 뼛속까지 시인으로 사실거냐고?...하지만 적막한 숲에선 산비둘기만 청승맞게 울뿐 고인은 묵묵부답이셨다.